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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e—intro—intercolumn

감독 이만희를 다시 보자

by e-bluespirit 2009. 1. 12.

 

 

 

 

 

 

 

 

 

이만희 감독을 부르는 호칭은 다양하다. ‘천재감독’, ‘다양한 장르 안에 깊이있는 주제와 철학을 담은 감독’, ‘검열과 삭제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1년에 5∼6편의 완성도있는 영화를 찍은 감독’, ‘곤궁한 시대의 무드를 다양한 영화적 장르와 모드로 바꿔낸 감독’ 등등. 하지만 그러한 평가에 비해 이만희의 영화는 거의 보여진 적이 없다. 그런 점에서 5월12일부터 30일까지 한국영상자료원 고전영화관에서 이만희 ‘전작전’은 한국 영화사의 거장을 새삼 발견하는 흔치 않은 기회가 될 것이다. 이 자리에서는 가장 널리 알려진 <돌아오지 않는 해병>과 <삼포가는 길>로부터 지난해 기적적으로 발굴된 <휴일>에 이르기까지 작품 22편이 상영된다. 프린트 소재를 파악할 길이 없는 <만추> 등을 제외하면 상영할 수 있는 이만희 감독의 모든 작품을 선보인다는 의미에서 이번 ‘전작전’은 더욱 뜻깊다. 이만희 감독의 생애와 작품세계, 그리고 영화평론가 김소영, 허문영씨의 이만희 감독에 대한 단상을 전한다.

 

오는 5월12일부터 30일까지 한국영상자료원은 “영화천재 이만희”라는 제명 아래 그의 전작전을 개최한다. “천재”란 무엇인가 지식인에게 물어보았다. 천재란 “보통 사람의 능력 이상을 선천적으로 타고난 사람”이며 중요 특징으로 “창조성과 생산성”을 지닌다고 한다. 이만희는 한국 영화사에서 가장 독특한 소재를 다룬 감독이라는 점에서 “창조성”을 과시하고, 15년이라는 기간 동안 50여편의 영화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생산성을 증명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천재성은 보통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천재성은 깊이있는 주제와 형이상학적인 철학을 보통의 언어로 풀어내며 대중적인 외형 속에 존재했다. 그가 한국 영화사 속의 어떤 감독보다도 많은 장르영화를 만든 이유는 바로 여기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이만희의 작가성을 그의 전작을 통해서라기보다는 몇몇 제한된 작품에 국한하여 발견했던 이유이며, 그에 대한 변변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지금까지 그의 전작을 본다는 것은 몇몇에게 주어진 특권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전작전은 영상자료원의 소개에서처럼 그의 작품세계를 가장 폭넓게 접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회”가 될 것이 분명하다.

 

<다이알 112를 돌려라> _ 페르소나 문정숙을 만나다

이만희 감독과 배우 문정숙

이만희 감독은 1931년 10월6일 서울의 하왕십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연극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한국전쟁이 끝나고 연극계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다 1956년 안종화 감독 밑에서 조수로 일하면서 영화계로 발을 들여놓게 된다. 안종화 감독에 이어 박구, 김명제 감독 밑에서 연출수업을 받은 그는 임원직 감독의 <인력거>의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하면서 영화의 주연을 맡았던 배우 김승호의 추천으로 1961년 <주마등>으로 감독 데뷔하게 된다. 그는 같은 해 <불효자>를 연이어 내놓으며 활발한 활동을 폈으나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정교하면서도 박진감 넘치는 연출”을 보여주는 젊은 감독으로 인식되었다. 그의 이런 연출력이 확실하게 드러난 것은 <다이알 112를 돌려라>였다. 이 작품으로 이만희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다. 이 작품은 당시로는 그리 대중적이지 않았던 스릴러 장르를 가져와 당시 제작사들이 그리 반겨하지 않았던 밤장면으로 점철된 범죄드라마였다. 이 작품으로 이만희는 감독으로서의 역량을 인정받았고, 10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상업성 역시 인정받았다. 이 작품이 이만희에게 제공한 기회는 우연히도 25편이라는 똑같은 편수를 함께 작업한 배우 문정숙과 촬영감독인 서정민과의 만남이었다.

 

감독 이만희와 배우 문정숙이 연인 사이였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만희가 사랑한 것은 여자로서의 문정숙이 아니라 배우로서의 문정숙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이것은 단순히 그들의 사생활을 지켜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화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했던” 이만희의 정신세계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만희는 문정숙을 통해 세상을 보았고, 문정숙은 그가 만들어낸 세상의 히로인이었다. 그는 전쟁 이후 변화하는 사회규범과 새롭게 정립된 가치질서의 혼란스러운 물결에 적응하며 순응하고 때로는 처절하게 저항하는 인물로 문정숙을 선택한 것이다. 둘이 만났을 때 이미 서른을 넘어선 문정숙은 젊은 배우에게서 찾기 힘든 완숙함과 도도함, 고상함과 우아함 그리고 세파를 초월한 듯한 우울함을 두루 지니고 있었다. 또한 그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가장 왕성한 활동을 펼쳤던 1962년에서 1967년까지 총 25편의 영화에서 서정민 촬영감독과 함께 작업했다. 열린 공간보다는 닫힌 공간, 여백보다는 채워짐의 미학을 추구했던 이만희의 영화적인 비전은 서정민이 가진 정교한 카메라의 눈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이만희는 그 어느 시기보다 이 기간 동안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며, 서로 다른 영화적 형식을 실험하였고, 서정민은 그 서로 다른 다양함을 하나로 관통하는 이미지의 힘을 실어주었다.

 

<7인의 여포로> _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

<돌아오지 않는 해병>

하지만 이만희로 하여금 이렇듯 다양한 실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은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성공이었다. 당시 최대 규모의 제작비를 들인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해병대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우여곡절 끝에 공개되고, 전쟁영화로는 최초로 20만 관객 동원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세상을 놀라게 한다. 이만희는 이 영화를 통해 당시 감독으로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으며 연출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의 기쁨도 잠시, 1964년 12월, <7인의 여포로>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필름이 압수되고 이만희에게는 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 각계에서는 이만희 감독을 옹호하는 성명서가 발표되었고, 정부에 진정서가 제출되었지만 정부의 태도는 강경했다. 오랜 법정 시비 끝에 1965년 9월 영화는 혹독한 검열을 당한 뒤 <돌아온 여군>이라는 제목으로 바뀌어 개봉되었고, 그 결과는 참혹했다. 게다가 영화 개봉 뒤, 감독을 구속하는 이변을 연출하며 이만희 감독은 결국 수감되었다. 약 3개월 뒤, 집행유예로 풀려난 이만희 감독은 그러나 잠시 쉬고 나왔다는 듯 영화계로 복귀하였다. “반공영화”를 만들고도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는 시련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만희는 고집스럽게 다시 전쟁영화와 이른바 “반공영화”로 되돌아온다. 1966년 <군번없는 용사>와 1967년 <싸리골의 신화>는 이러한 이만희의 고집이 엿보이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추> _ 이만희 영화세계의 전환점

웬만한 사람이라면 헤어나오기 힘들었을 시련을 겪고 난 1966년, 이만희는 생애 최고의 해를 창초해낸다. 주변 사람들에게 “다양한 영화를 모두 시도해보는 해”로 삼겠다고 공공연히 이야기했고, 그는 보란 듯이 다양한 장르를 누빈다. 전형적인 멜로드라마 <잊을 수 없는 여인>과 나도향의 원작을 영화화한 문예영화 <물레방아>,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전쟁영화 <군번없는 용사> 그리고 그의 대표작인 <만추>가 모두 이해에 탄생했다. 그의 기세는 1967년까지 멈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다양하면서도 완성도를 잃지 않는 탁월한 연출력을 과시라도 하듯이 자그마치 11편의 영화를 쏟아놓았다. <만추>의 뒤를 잇는 또 하나의 대표작 <귀로>와 <방콕의 하리마오> 같은 대중적인 작품을 섞어놓으며 이만희 전성시대임을 다시 한번 증명한 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추>

특히 <만추>에 대한 평단의 관심은 대단했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현대적인 영화언어는 “새로운 한국영화의 지평을 여는 획기적인 수확”으로 평가되기도 하였고, 동시에 “서구의 모더니즘 영화언어의 답습”이라는 유보적인 평가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평가와 상관없이 <만추>는 분명히 이만희의 영화세계에서 전환점이 되고 있다. <만추> 이전의 작품들이 좀더 대중적인 기호에 따르고 있다면 이후의 작품들은 같은 장르영화라 할지라도 좀더 실험적이고 개인적인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결과적으로 이만희에게 고통스러운 시기를 예고한다.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 변덕스럽고 억압적인 영화정책과 제작구조의 기형화, 텔레비전의 등장 등으로 영화산업 전체가 쇠퇴기로 접어들기도 하였지만 대중과의 교감 지점을 잃어버린 이만희의 영화들은 상업적으로 실패를 거듭하기 시작했다. 이 실패는 결국 이만희에게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줄어들게 하였고, 영화 만들기가 삶의 전부였던 이만희에게 이것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휴일> _ 우울과 절망의 시기

이 시기 이만희의 영화들은 우울함과 절망의 깊이를 더해간다. <휴일>은 이 절망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태어난 작품이다. 이 영화는 휴일마다 만나는 가난한 연인의 이야기다. 지연은 애인인 허욱에게 임신사실을 알리고 자신들의 환경에서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설득한다. 함께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는 지연의 건강상태로 인해 중절은 필연적이라고 말한다. <휴일>은 태어날 수 없었던 아이처럼 세상과 만나지 못했다. “우울하고 퇴폐적인 정서”로 인해 상영금지 처분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난관은 이만희에게 처음은 아니었다. <7인의 여포로> 사건 이후 제작에 들어간 <천국의 사랑> 역시 촬영이 50% 정도 진행된 시점에서 제작정지 처분을 받았고, <포대령>이라는 영화는 제작허가조차 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미 완성되고 여러 차례 검열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개봉에 실패한 <휴일>은 이만희에게 커다란 실망을 안겨주었음이 분명하다. 이유는 분명치 않지만 영화 만들기를 목숨처럼 여기던 이만희 감독이 1969년에 영화계를 떠나버린 데는 이러한 실망감과 좌절감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쇠사슬을 끊어라> _ 구원과 용서의 메아리

이만희와 허장강

그리고 2년 뒤, 이만희는 <쇠사슬을 끊어라>로 돌아온다. 만주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액션영화 <쇠사슬을 끊어라>는 영화에 대해 변화된 그의 태도를 반영하듯 좀더 유희적이며, 냉소적인 유머감각을 선보인다. 이만희 영화 중 예외적으로 주인공들 모두가 살아남아 유유히 석양 속으로 사라져가는 이 영화에서 그들이 가는 곳이 희망찬 내일이 아님이 분명할지라도 그들의 질주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으려는 70년대 이만희 영화의 예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형사물인 <0시>(1972)도 이와 같은 맥락에 있다. 자신을 잡아넣은 형사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의 아들을 납치한 유괴범은 타고난 순수함으로 아들과 친구가 되고, 처벌을 면하게 된 뒤, 둘이 함께 서울역 광장을 놀이터 삼아 함께 놀며 끝난다. 이 영화는 분명히 범법자이지만 순수한 유괴범은 악법으로 인해 범죄자의 너울을 쓴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했던 당시 사회에 대한 항변이며, 구원과 용서를 통해 우울한 시대에서 희망을 찾고 있는 이만희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구원과 용서”는 이만희 후기 영화의 대주제이다. <청녀>와 <태양을 닮은 소녀>, 그리고 유작인 <삼포가는 길>까지 이것은 세상과 병마에 지친 이만희의 역설적인 외침처럼 희망을 이야기한다. 그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1975년 4월3일, <삼포가는 길>의 편집을 하던 중 이만희는 갑자기 쓰러진다. 이미 암으로 발전된 심각한 상태의 간경화도 문제였지만 급성 위출혈이 직접적인 이유였다. 늘 건장한 모습으로 작업현장을 지배했기에 그의 입원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지만 누구도 그의 죽음을 예견하지는 못했다. 그가 병원에 실려간 지 열흘 만인 4월13일, 이만희는 45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서양의 영화천재이며 서스펜스스릴러의 대가였던 앨프리드 히치콕은 죽기 전 프랑수아 트뤼포와 긴 대화를 통해 자신의 영화세계를 친절히 설명해주었다. 영화를 만드는 것은 감독의 몫이고, 영화를 보고 해석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라고 누누이 스스로에게 다짐시키지만 아무래도 범인이 이해할 수 없는 천재의 영역이 있는 법인가보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가버린 이만희 감독의 부재가 두고두고 아쉽다.

 

 

글 : 조영정 (한국 영화사 연구가) | 2006.05.12

 

 

 

 

허문영 평론가가 말하는 지금 이만희 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

이 사람은 도대체 어디까지 갔던 것일까

이만희는 그의 영화를 보면 볼수록 더 말하기 힘든 감독이다. 이 말은 한 사람의 관객이자 평자로서 내가 한 감독에게 바칠 수 있는 최상의 찬사다. 이것은 그가 만든 모든 영화가 걸작이라는 뜻은 아니다. 실은 그렇다고 말할 자격도 없다. <만추>를 제외하고도 그의 영화 50편 가운데 우리는 반도 만나지 못했다. 이만희는 이제 막 말해지기 시작했고 앞으로 더 많이, 더 맹렬하게 말해져야 할 감독이다.

 

그의 작품들은 아예 행방조차 알 수 없거나(<만추> <시장> <7인의 여포로> 등등), 40년의 망각을 넘어 이제 막 도착했거나(<휴일>), 일부의 소리를 잃어버려 혹은 괴상한 계몽영화로 치부돼 창고에 처박혀 있었지만(<물레방아> <생명>), 그들을 한편씩 만날 때마다 보는 사람을 전율케 한다. 이 사람은 도대체 어디까지 갔던 것일까.

 

이만희의 영화를 볼 때 우리는 1년이면 30여편에 출연하는 배우를 불러놓고 기껏해야 2주에 한편을 촬영하며 그렇게 1년에 대여섯편을 찍어댄, 그러고서도 검열과 삭제와 금지의 지옥을 경유해야 하는 끔찍한 제작환경을 감안해 가산점을 줄 필요가 없다(이 가산점은 실은 정당한 것이지만). 이 천재가 모든 걸 극복했다는 말이 아니며 지혜롭게 타협했다는 말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그 저주받을 만한 존재 조건을 자신의 내부로 끌어들여 유의미한 상처로 만들어낸다. 이만희의 영화는 그 모든 악조건과 저주와 상처를 끌어안고, 영화를 사랑한 한 사내가 영화라는 매체의 심장에 기어이 이르려는 순간들의 숨막히는 기록이다.

 

<생명>
<생명>

여기선 다만 <생명>(1969)에 관해 말하고 싶다. <생명>은, 그의 영화 가운데 단 한편만 보기를 권해야 한다면, 가장 마지막에 권하고 싶은 영화다. 이 영화가 가장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가장 개인적이기 때문이다. 한 시간 남짓한 짧은 영화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다. 영화의 첫머리에 이런 구호가 떠오른다. “삼천만 한몸 되어 분쇄하자 북괴만행.” 이 영화는 탄광 매몰과 광부 구출 사건을 다루고 있으므로 ‘북괴만행’과는 무관하다. 그 구호 다음에는 이것이 ‘기록영화’라고 스스로 말한다. 이 영화는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한 픽션이므로 이것 역시 말이 안 된다. 이런 어이없는 자막이 들어간 자세한 경위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은 이만희라는 인물이 당대의 질서와 맹렬하게 대립한 자취 혹은 그로 인한 상처의 흔적으로 읽힌다. <생명>은 한몸 되어 분쇄하자고 말해놓고 한몸이 되지 않는다. 기록영화라고 말해놓고 기록하지 않는다(여기선 기록영화라는 장르가 아니라 ‘기록’이라는 말이 함축하는 리얼리스트의 계율이 중요하다). 이만희는 자기가 가장 무관심하고 가장 끌어안기 싫은 표지를 내세우고 그 안에서 완전히 반대편으로 가버린다.

 

이 영화에서 갱도 붕괴는 사실적으로 묘사되는 게 아니라 “무너졌다”는 외침 하나로 처리된다. 곧이어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몰려드는 기자들, 슬퍼하는 매몰 광부의 가족 등등 이런 영화가 기록해야 할 대상들은 모두 등장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영화는 그 모든 걸 무성의하게 보일 만큼 간략히 처리한다. 이만희는 정말 기록에 무관심하다. 그러나 한 장면은 자꾸 변주되면서 반복된다. 무너진 갱도에 홀로 갇혀 죽어가는 사내(장민호)의 모습. 그는 갱도에 갇혀 반쯤 실신한 상태로 꿈을 꾼다. 포성과 총소리, 비명이 환청으로 들려온다. 잠에서 깨면 좁은 갱도에는 물 떨어지는 소리만 청명하게 울려퍼진다. 이 영화는 이상하게 조용하다. 울부짖음도 분노도 환호도 없다. 그저 광부는 갇혀 죽어가고 있고 그의 가냘픈 신음 소리와 맑은 물소리가 전쟁의 기억이 만들어낸 간헐적인 환청과 함께 폐쇄공간을 채운다.

 

<생명>이란 영화는 놀랍게도 이것이 거의 전부다(구출 과정도 매몰과 마찬가지로 얼렁뚱땅 묘사된다). <생명>은 오직 갇혀서 죽어가는 사내의 형상에 관한 영화다. 이 영화의 가장 냉혹한 대사. 신문기자(허장강)가 몰려든 사람들로 바빠진 다방 종업원에게 묻는다. “살아날 것 같은가요?” 종업원이 대답한다. “관심 없어요. 다만 빨리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가장 놀라운 순간은 마지막 장면에 등장한다. 매몰 사건이 일어난 첫 장면에서 갱도 아래로부터 지상으로 올라가던 카메라는, 광부가 구출된 뒤에 지상에서 갱도 아래로 수직 낙하한다. 그리고 영화는 끝난다. 저 카메라는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이미 무너져버린 그 갱도로 다시 가서 우리에게 뭘 보여주려는 걸까. 이 기괴한 카메라의 움직임보다 더 가혹한 절망의 영화언어를 기억해내기 힘들다.

 

이렇게 엉성하고 절충적인 영화에서 이처럼 숭고한 영화적 순간이 등장한다는 사실은 믿겨지지 않는다. 나는 이만희의 모든 영화가 그런 순간을 또 어디엔가 감추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지 못하겠다. 그의 영화를 자꾸만 보고 싶다.

 

 

 

김소영 교수가 말하는 지금 이만희 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

곤궁한 시대의 무드를 다양한 장르로 변주하다

이만희 감독은 1961년부터 14년간 50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주마등>이 처음이었고 <삼포가는 길>이 마지막이었다. 대단히 다작인 셈이고, 1967년엔 한해에 무려 11편을 찍었다. 그의 영화들은 대체로 일곱 개의 스펙트럼으로 나뉜다. 유실된 영화가 많아 이것은 엄정한 범주화라기보다는 스펙트럼이라는 용어의 의미 그대로 잔상이나 영역 정도의 의미다.

 

<귀로>

먼저, <휴일> <물레방아> <귀로>처럼 어떤 미적 완성도를 향해 가고 있는 것. 이 영화들은 이른바 당시의 ‘문예영화’들을 고쳐 쓴 것으로 그 범주에 치유 불가능한 삶의 비극을 깊숙이 주입한다. 이 텍스트들이 구성되고 있는 공간으로서의 자연이나 도시에 놓인 대상과 소품, 조형물들은 인물들과 불화한다. 위안이나 휴일은 좀처럼 오지 않는다. 일반 문예영화의 스토리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풍경의 사용과는 달리 이 영화들 속의 빛나는 장면은 시네필적 현현의 순간이라고 부를 만한 시각적, 감정적 동요와 흥분을 일으킨다. <휴일>, 흙바람 날리는 봄의 공원에 선 연인의 무기력, 그리고 그 프레임을 침범하는 꽃가지가 그러하다. <물레방아>, 사랑이 돌아오기를 기원하며 어두운 강물에 흰옷을 띄우는 신영균의 표정이 그렇다. <귀로>, 문정숙이 서울역 광장을 빠져나와 불안하나 기대에 찬 모습으로 고개를 돌려 도시 공간을 바라볼 때, 이 영화는 근대성의 체험을 양가적으로 기술하는 탁월한 텍스트가 된다. <만추> 역시 이 분류에 드는 유장한 작품이 될 것이나 영화가 남아 있지 않다. 여기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물레방아>로, 나도향 원작이고 20세기 초반을 다루고 있으나 전근대적 믿음을 동정하면서도 그것을 냉정하게 관찰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도시가 아닌 무진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나, 그 풍경과 마음의 심상을 모더니스트적으로 그렸던 김승옥의 태도와 유사하다.

  

다른 한편으로 호방하고 활달하나 동시에 시대적 암울이 추동했던 활극 장르영화들이 있다. 이중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쇠사슬을 끊어라>로, 상상의 대륙을 배경으로 한 활극이다. 역시 필름이 남아 있지 않으나 <흑룡강> 등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세 번째로는 엔터테인먼트영화다. <창공에 산다> <방콕의 하리마오> 등이 여기에 속한다. 여기에 냉전 이데올로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텍스트의 상처로 걸고 있다기보다는 플롯의 핍진성이나 추동력으로 삼은 정도다.

 

네 번째로 당시 냉전, 분단 이데올로기와 어떤 방식으로든 깊이 개입된 경우다. 당시 사회적 파장을 가져왔던 <7인의 여포로>, 무늬만 프로파간다 영화인 <싸리골의 신화> 등이 그 예일 것이다.

 

다섯 번째로 이영일 선생이 이만희의 리얼리즘 영화라고 불렀던 것으로, <흑맥> <시장>등이 그것이다. 사실 여기에는 위에서 내가 달리 분류했던 <물레방아> <만추> 등이 함께 포함되어 있으나 좀더 상세한 구분을 위해 일단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이분법은 피해가기로 한다.

 

여섯 번째로는 위 스펙트럼을 공유하고 있으나, 범주 속으로 잘 떨어지지 않는 영화들 군이다. 좀 난데없는 영화들 말이다. 데뷔작 <주마등> <한석봉>의 경우다.

 

마지막이 스릴러영화들이다. <다이알 112를 돌려라> <마의 계단> 그리고 <여섯개의 그림자> <삼각의 함정> 등이다. 특히 <다이알 112를 돌려라>는 당시 스토리없이 ‘무드’만으로 영화를 이끌어간다는 평을 받았다.

 

사실 이렇게 스펙트럼을 나누었으나, 나는 이만희 감독을 보는 기존의 범주들을 좀 교란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천재 이만희라는 표현은 그 사람에 대해 범재인 누구로서는 잘 모르겠다는 말이 되니 일단 기각하자. 리얼리스트/모더니스트라는 이분법은 위의 스펙트럼을 통해 본 것처럼 그의 작품들을 상당수 버리고서야 가능하다. 이만희 영화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보려고 하는 경우 그나마 적합한 범주는 ‘무드’다.

 

 ‘무드’는 관찰 가능한 심리적 상태다. 그리고 감정의 조합이다. 일반적 기능으로 보자면 무드는 적응 가능한 외부적 사건들의 영향을 받는다. 우울증과 같은 무질서한 무드는 비적응 현상으로 기술된다. 군사독재 정권이 자리를 잡아가는 60년대와 70년대 이만희 영화들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봐야 할 경우 그것은 이러한 양극단을 오가는 무드, 조울증 현상 속에서 파악될 수 있다. 나는 이 용어를 의료적 병리 현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통속적 의미에서 사용하고 있다. 멜랑콜리와 무기력이 있는가 하면, 시네필적 현현에 다름 아닌 흥분, 신대륙 발견(장르)과 횡단의 활력, 심리적 도착성과 유토피안적 아나키즘의 공존이 있는 이만희의 14년에 걸친 50여편의 영화는 그야말로 ‘무디’(moody)하다. 세태에 잘 적응한 영화가 있는가 하면, 무질서 그 자체인 영화가 있다. 난세에 따르는 시대적 우울과 그에 반하는 저항의 활력의 변주. 그러니 물어보자. 누가 곤궁한 시대의 무드를 다양한 영화적 장르와 모드로 바꿔낸 그의 영화를 거부할 수 있을까?

 

 

 

기회가 왔을 때 잡으라! 상영작 22편 소개

<돌아오지 않는 해병>
1963년 | 110분| 흑백 | 출연 장동휘, 최무룡, 구봉서
이만희의 첫 번째 전쟁영화이며 현존하는 이만희 영화 중 가장 초창기의 작품이다. 해병대와 국방부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대규모 제작비를 투자하고 순촬영기간만 6개월이 넘는 대장정을 통해 만들어진 이 영화는 한국 전쟁영화의 한획을 긋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국가나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니라 “살아남아 가족에게 돌아가기 위해 승리해야만” 하는 군인들이 던지는 “생존을 위해 우리는 얼마나 인간이기를 포기해야 하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은 이후 이만희 전쟁영화가 지속적으로 다루는 핵심이 된다.

 

<YMS 504의 수병>
1963년 | 112분 | 흑백 | 출연 박노식, 김혜정, 장동휘
‘YMS 504호’의 선장이 공석이 되고, 선원들은 백전노장인 한 중위가 선장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의외로 엘리트 출신인 장 대위가 새로 부임하면서 갈등이 시작된다. 전우간의 인간적인 결속을 중심에 놓았던 다른 이만희 전쟁영화와는 달리 서로 다른 계급에 속한 수병들의 갈등을 해소하는 과정을 중심에 놓은 이색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설봉(설태호) 감독과 공동감독으로 연출한 작품이다.

 

<검은 머리>
1964년 | 105분 | 흑백 | 출연 문정숙, 장동휘, 정애란
이만희의 초기 스릴러를 가늠케 하는 작품으로 형식과 내용 면에서 한국적 필름누아르의 진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범죄조직의 두목인 ‘검은 머리’와 조직의 규율에 따라 자신을 강간한 남자를 매춘으로 부양해야만 하는 두목의 아내 그리고 그녀를 구해내려는 젊은 남자의 삼각관계가 조밀하게 얽혀 있다. 밤거리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아름다운 미장센이 일품이며, 세 사람을 연기하는 장동휘, 문정숙, 이대엽의 매력이 물씬 풍겨나는 작품이다.

 

<마의 계단>
1964년 | 108분 | 흑백 | 출연 문정숙, 김진규, 방성자
<마의 계단>은 장르적인 형식실험의 시험대이다. 극적인 긴장감을 배가시키는 서스펜스의 서사구조를 충격효과를 노리는 공포영화의 호흡으로 세워나간다. 성공을 위해 애인을 살해한 남자 앞에 죽은 애인의 유령이 나타나면서 흥미를 더해가는 이 영화는 현악기를 이용한 금속성의 괴기스러운 음악(이만희 영화 중 가장 예외적인 음악 사용을 확인할 수 있다)과 빠른 편집, 그리고 극적인 화면 구성을 통해 ‘스릴’의 세계를 선사하고 있다.

 

<군번없는 용사>
1966년 | 121분| 흑백 | 출연 신성일, 문정숙, 신영균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게릴라 부대의 대장인 형과 영웅 칭호를 받은 북한군 장교인 동생의 대립을 그리는 <군번없는 용사>는 아버지의 사랑을 놓고 벌이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차용한 가족멜로드라마의 전형이다. 공산당 대의원인 아버지의 사랑과 신임을 얻기 위해 전쟁 영웅이 되어 돌아온 작은아들이 아버지가 당을 배신하고 자신을 외면했음을 깨닫게 되면서 벌어지는 증오심과 질투심 그리고 윤리적인 갈등을 밀도있게 그리고 있다.

 

<물레방아>
1966년 | 91분 | 흑백 | 출연 신영균, 고은아, 허장강
떠돌이 방원이는 어느 마을에서 열린 굿판에서 한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마을에 머문다. 종살이를 하며 여자를 찾아낸 그는 여자의 빚을 갚기 위해 평생 종살이를 자청하고, 주인은 호시탐탐 여자를 차지할 욕심에 차 있다. 일제를 배경으로 한 저항문학을 원작으로 삼은 영화들은 대부분 사실주의와 한국적인 미학을 화두로 삼는다. 그러나 이만희는 한국적인 배경과 소재를 통해 가장 서구적이며 현대적인 서사와 몽환적인 스타일을 시험하고 있다. 영화는 주술적이며 환영과 같은 여인을 향한 방원의 집요하고 강박적인 욕망을 따라간다. 통제할 수 없는 상황과 욕망에 지배받는 인물들의 폭력적이며 자기파괴적인 모습들을 눈부시게 아름답고 정교한 화면에 담아내고 있다. 나도향 원작.

 

<귀로>
1967년 | 90분 | 흑백 | 출연 문정숙, 김진규, 김정철
<만추>와 더불어 이만희 감독의 대표작으로 한국 영화사의 걸작이다. 한국전쟁으로 부상을 입고 반신불구가 된 남편과 14년간 살아온 지연은 남편의 소설 원고를 신문사에 전해주기 위한 서울 나들이가 유일한 탈출구이다. 신문사의 강 기자는 첫눈에 그녀에게 끌리고, 그녀 역시 전쟁과 과거로부터 단절된 젊은 남자에게서 구원을 찾는다. 이만희는 전장에서 풀지 못한 전쟁 이야기를 통속적인 멜로드라마의 틀 속에서 다시 전개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과거와 단절된 현재의 불구성을 도시의 황량함 속에 투사시키고 있다.

 

<싸리골의 신화>
1967년 | 96분 | 흑백 | 출연 최남현, 김석훈, 문정숙, 박노식
아직 전쟁의 마수가 미치지 않은 평화로운 ‘가상의 마을’ 싸리골에 낙오된 국군 8명이 들어온다. 마을의 지도자인 강 노인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이들을 보호하기로 하지만 곧 인민군이 마을을 점령하면서 마을에 긴장감이 돌기 시작한다. 게다가 과거 마을의 머슴으로 천대받던 자가 새로운 권력자인 인민군 군관으로 돌아오면서 마을의 위기는 깊어져간다. 표면적으로는 ‘휴머니즘’의 전형을 이어가지만 ‘싸리골’이라는 사회의 축소판을 통해 전통적인 질서와 새로운 질서 사이의 충돌과 갈등을 그리고 있다.

 

<원점>
1967년 | 97분 | 흑백 | 출연 신성일, 문희
<원점>은 분위기와 스릴이 공존하는 작품이다. 범죄조직의 말단 조직원과 거리의 여자의 사랑이 한축을 이루고 조직의 안전을 지키려는 악당들과 그들에게 처형당할 위기에 놓인 주인공의 대결이 다른 한축을 이루고 있다. 한마디의 대사나 음악도 없이 전개되는 오프닝 10분은 이미지로 이야기하는 이만희의 연출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순간이다.

 

<휴일>
1968년 | 73분 | 흑백 | 출연 신성일, 전지연
휴일마다 만나는 가난한 연인인 허욱과 지연은 커피값이 없어 흙먼지 이는 공원에서 하루를 보낸다. 지연은 임신사실을 알리고, 허욱은 중절비용을 얻기 위해 서울을 헤맨다. 그리고 의사는 그들이 아이를 낳고 싶다고 해도, 아이가 너무 허약한 상태라고 말한다. ‘암울하고 퇴폐적인 정서’를 이유로 상영이 금지되었던 이 영화는 지난해에 비로소 처음으로 관객과 만났고, 소개되자마자 이만희의 대표작 반열에 올랐다.

 

<창공에 산다>
1968년 | 108분 | 컬러 | 출연 신성일, 장동휘, 남정임
일찍부터 공군영화를 기획하였지만 신상옥의 <빨간 마후라>(1964)가 발표되면서 뒤로 미루어진 것이 결실을 맺은 게 <창공에 산다>이다. 그러나 ‘전시’라는 긴박감이 증발된 상태에서 갈등지점을 정확하게 포착하지 못하면서 영화는 방향을 잃는다. 하지만 공군의 지원 속에 이석기 촬영감독이 전투기에 탑승하여 목숨을 건 촬영을 감행해 재현된 공중전 장면은 새로운 영화기법을 실험하고자 했던 이만희의 열정을 확인할 수 있는 지점이다.

 

<생명>
1969년 | 73분 | 컬러 | 출연 장민호, 남궁원, 허장강
<생명>은 무너진 갱도에 갇힌 광부와 구출과정을 그린 작품으로 실제 사건을 재구성한 작품이다. 영화의 첫 부분, “이 영화는 기록영화이다”라고 대담하게 자막을 내보내지만 실상 발생한 ‘사건’과 ‘과정’들을 ‘기록’하는 데에는 무심한 영화이다. 대신 영화는 무너진 갱도라는 폐쇄된 공간에 갇힌 광부의 의식의 흐름을 집요하게 좇고 있으며, 그의 생존을 둘러싸고 지상에서 벌어지는 인간 군상의 다양한 반응들을 추적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휴먼스토리’에서 벌어지는 사건해결의 긴박함이나 인간승리의 카타르시스를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의 본질론적인 성찰을 내세우는 이 영화는 인간의 위선과 존재에 대해 좀더 ‘사실적’이며, ‘기록’적이다. 실제 사고가 난 갱도에서 촬영된 깊이있는 영상미와 광부 양창선을 연기한 장민호의 연기가 돋보인다.

 

<암살자>
1969년 | 78분 | 컬러 | 출연 장동휘, 남궁원, 박암
최근 들어 가장 적극적으로 재평가를 받고 있는 <암살자>는 사건의 인과율을 좇는 일반적인 장르영화와는 달리 인물의 심리변화 과정을 중심에 놓은 독특한 방식의 영화이다. 제목이 말하는 것처럼 암살자인 장동휘를 중심으로 그의 내면세계의 변화과정을 추적한다. 자기 손에 죽은 남자의 딸을 키우고,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 희생자를 만나고, 암살자에서 암살의 대상이 변모하는 암살자의 모순에 찬 상황이 실험적인 편집방식을 통해 구성된다.

 

<여섯 개의 그림자>
1969년 | 98분 | 컬러 | 출연 윤정희, 남궁원, 신성일, 허장강
<여섯 개의 그림자>는 이만희의 출세작인 <다이알 112를 돌려라>의 첫 번째 리메이크이다(<삼각의 함정>(1974)이 두 번째 리메이크). 엄청난 재산을 상속받은 여자와 그녀의 재산을 노리는 악당들이 벌이는 음모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얽히고설킨 복잡한 플롯을 풀어나가다보니 인물들의 깊이가 떨어지지만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전개되는 사건의 과정을 따라가는 재미가 만만찮은 작품이다.

 

<여자가 고백할 때>
1969년 | 89분 | DVCAM | 출연 문정숙, 신성일, 남궁원, 윤일봉
이 영화는 문정숙이 이만희 영화에서 주연을 맡은 마지막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의미있지만 그동안 일부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이번 전작전을 통해 처음으로 공개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남편의 외국 유학으로 오랫동안 혼자 지내온 지연은 외로움 끝에 자신을 사모해온 남자와 관계를 갖는다. 그러나 지연은 남편의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 남자들이 세워놓은 윤리틀에 맞추어 구원되기보다는 자신의 욕망이 이해되기를 바라는 강한 여성상을 확인할 수 있다.

 

<쇠사슬을 끊어라>
1971년 | 98분 | 컬러 | 출연 장동휘, 남궁원, 허장강
<쇠사슬을 끊어라>는 ‘사실적’인 어떤 것도 부인하며 영화적인 유희를 즐기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정통 액션영화이며 동시에 60년대 말 유행했던 ‘만주웨스턴’에 대한 이만희식 답가였다. 민족의 독립이라는 대의명분을 전면에 내세우고 일본군과 대립하는 기본 구조를 가져왔지만 그는 그 구조에 연연해하지 않는 듯하다. 시대적 배경을 뛰어넘는 소품(세단형 자동차와 모터사이클, 소형 기관총 등의 사용)의 활용과 대의명분보다는 자기 이익에 충실한 인물들, 그리고 그들을 지배하는 유머감각 넘치는 ‘게임의 규칙’은 기존의 장르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며 한껏 유희를 펼친다.

 

<0(영)시>
1972년 | 99분 | 컬러 | 출연 허장강, 신성일, 윤정희, 문오장
늘 범죄자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이만희의 작품에서 경찰이 주인공으로 등장한 예외적인 영화가 <0시>이다. 답답하리만치 자기 임무에 충실한 주인공 장 형사는 자기 아들이 유괴된 순간에도 사사로이 행동할 수가 없다. 형사와 가장으로서의 의무가 충돌하는 와중에 유괴범과 아들 사이에 전개되는 기묘한 우정이 영화를 단순한 형사물의 전형에서 벗어나게 한다. 장 형사의 집 옥상에서 내려다보이는 남대문시장과 아들이 놀이터로 삼는 서울역 광장의 풍광이 새롭다.

 

<04:00-1950>
1972년 | 88분 | 컬러 | 출연 장동휘, 김성욱, 정욱
<04:00-1950>은 인간의 존엄성을 가장 직접적으로 논하는 작품이다. 전쟁이 일어나기 하루 전인 6월24일에 젊은 지식인 병사가 전방 초소에 새로 전속되면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전쟁을 둘러싼 무의미한 정치적 논쟁으로 시작하지만 막상 전쟁이 발발하면서 그 절대적인 상황 속에 갇힌 군인들의 인간적인 고뇌와 선택을 중심으로 전환하게 된다. 무너진 초소에 갇혀 한명씩 죽음의 운명 앞에 쓰러져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가슴 무거운 엄숙함과 성찰의 시간을 제공한다.

 

<들국화는 피었는데>
1974년 | 102분 | 컬러 | 출연 신성일, 이영옥, 김정훈
1974년 영화진흥공사의 지원으로 제작된 이 영화는 <04:00-1950>의 확장판이라 할 수 있다. 군인들의 가족과 북한군의 등장은 이야기를 좀더 풍부하게 끌어나간다. 그러나 정부지원으로 제작된 ‘반공영화’가 ‘본분’을 다하지 못하면서, 이에 당황한 영진공이 신상옥 감독을 불러 재편집을 의뢰했으나 “한 군데도 손댈 곳이 없다”며 거절한 것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결과적으로 영화는 검열로 인해 손상되어버렸고 현재 남아 있는 판본은 안타깝게도 검열본이다.

 

<청녀>
1974년 | 83분 | 컬러 | 출연 신성일, 장동휘, 남정임


<태양 닮은 소녀>
1974년 | 78분 | 컬러 | 출연 신성일, 문숙, 고영수
앙드레 지드의 <전원교향곡>을 각색한 <청녀>와 <태양 닮은 소녀>는 모두 젊고 순수한 소녀로 인해 깊은 죄의식로부터 구원받는 중년의 남성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접근방법은 매우 다르다. <청녀>가 암울한 분위기와 소녀의 절대적인 자기희생을 기본으로 한다면 <태양 닮은 소녀>는 제목처럼 햇살 가득한 발랄한 소녀와 그녀로 인해 다시 삶의 빛을 확인한 남자의 죽음을 통해 구원이 이루어진다. 신중현의 <미인>이 주제곡으로 사용된다.

 

<삼포가는 길>
1975년 | 99분 | 컬러 | 출연 김진규, 백일섭, 문숙
이만희 감독의 유작이며 가장 자주 논의된 작품이다. 모든 사람의 고향인 가상의 공간 ‘삼포’를 향해가는 세 사람의 관계맺기와 여정을 담고 있다. 황석영의 원작을 영화화한 것으로 아름다운 설경과 실험적인 사운드가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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