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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e—fellow—friendship

걸음... 근원... 거름

by e-bluespirit 2005. 11. 5.

 

 

 

 

 

석촌동백제초기적석총 石村洞百濟初期積石塚

 

지정번호사적 : 제243호

지정연월일 : 1975년 5월 27일

시대 : 백제초기

규모·양식 : 49,999㎡

소유자 : 국유

소재지 : 서울특별시 송파구 석촌동 61-6

 

 

석촌동백제초기적석총은 백제가 한강 하류역에 위치한 한성(漢城)에 도성을 정한 후 서기 475년 웅진(熊津)으로 천도하기 이전까지 형성된 백제 전기 고분군이다. 백제의 매장 풍습과 함께 축조 당시 문화ㆍ정치ㆍ사회 등에 관한 백제사의 여러 가지 내용을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표고(標高) 20m 정도의 남북 방향의 얕은 뚝 모양의 대지 위에는 1917년 당시만해도 60기 이상의 적석총이 남아 있는 등 돌이 많았기 때문에 '돌마리'라고 불리워 왔으며, 석촌동이란 지명은 서울특별시 관할구역으로 편입되면서 생긴 것이다. 이 고분군에는 막돌ㆍ포갠 돌 등을 섞어 쌓아 분구를 축조한 방형단축(方形段築)의 적석총(積石塚)을 비롯하여, 즙석(葺石)을 덮고 흙을 쌓아 분구를 축성한 봉토분, 지표에 장방형 토광을 파서 묘광을 만든 토광묘, 그리고 내원외방형(內圓外方形)을 이룬 고분 등 구조형식과 축조시기를 달리하는 고분 8기가 자리잡고 있다.


이중에서 사적 제243호로 지정되어 보수ㆍ정비된 것은 제3ㆍ4호분이며 모두 적석총(돌무지무덤)이다. 제1ㆍ2호분 및 내원외방형분 등 3기는 파괴가 극심하여 하단부의 일부만 남아있고, 토광묘 2기는 원형을 보존하기 위하여 흙을 덮고 그 위에 모형 토광묘를 만들어 놓아 백제 전기 고분의 성격을 알 수 있게 하였다. 제3ㆍ4호분은 방형단축의 분구라든가 큰 자연석을 비스듬히 세워 놓은 지탱석 등 분구의 구조형식이 고구려의 기단식 적석총(基壇式積石塚)과 동일함에 따라, 이 시기에 백제와 고구려가 밀접한 교류가 이루어졌음을 짐작하게 한다.


고분군의 보수·정비 공사는 1983년 3월에 착수하여 1991년 6월에 완료되었다.

 

 

 

 

http://sca.visitseoul.net/korean/relics/i_prehistory_site09002.htm

 

 

 

 

 

 

 

 

 

 

삼전도비 三田渡碑

 

 

지정번호사적 : 제101호

지정연월일 : 1963년 1월 21일

시대 : 조선 인조 17년 (1639)

규모·양식 : 보호구역 2,850㎡, 석비 1기(基)

                               전체 높이 5.7m, 비신 높이 3.95m·너비 1.4m

재료 : 비신 대리석, 귀부 화강암

소유자 : 국유

소재지 : 서울특별시 송파구 석촌동 289-3

 

 

병자호란 때 청군(淸軍)의 침입에 패배한 조선이 삼전도에서 강화를 맺은 뒤 청나라 태종(太宗)의 요구에 따라 그의 공덕을 새긴 비이다. 원래의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이다.


청나라는 만주에 살던 여진족(女眞族)이 세운 나라이다. 여진족은 본래 조선에 조공을 받치던 부족이었다. 그런데 임진왜란으로 인해 조선과 명(明)나라가 큰 피해를 입자 이를 틈타 누르하치는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세력을 키운 뒤 국호를 후금(後金)이라 하였다. 이에 조선은 광해군 11년(1619) 명나라의 군사동원 요청에 따라 만주 지역에 파병하여 후금의 군사와 대치하기도 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조선과 후금 사이에 긴장이 점차 고조되었고, 이에 세력을 더욱 키운 후금은 마침내 인조 5년(1627) 조선에 쳐들어와 정묘호란을 일으켰다. 그 뒤 조선과 후금은 화약(和約)을 맺었으나 양국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인조 14년(1636) 후금이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면서 조선에게 신하의 예를 갖출 것을 강요하자 마침내 양국관계는 단절되었다. 그 해 12월 청 태종은 십만의 군사를 직접 이끌고 조선에 쳐들어와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당시 인조는 신하들과 함께 한강 이남의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신하여 청군과 대치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또 비축했던 식량조차 바닥이 나자 인조는 부득이 이듬해 1월 30일에 항전을 그치고 청군이 머물고 있던 한강 남쪽의 삼전도 나루로 나와 굴욕적 강화협정을 맺었다.


병자호란이 수습된 뒤 청 태종은 자신의 공덕비를 세우라고 조선에 요구하였다. 이에 조선은 장유(張維)·조희일(趙希逸)이 지은 비문을 청에 보냈으나 번번이 거부되었고, 결국 인조의 특명으로 도승지 겸 예문관 제학이던 이경석(李景奭, 1595∼1671)이 지은 비문이 받아들여졌다. 이에 공조(工曹)는 삼전도의 제단터를 높여 증축하고 인조 17년(1639) 12월 8일 비석을 세웠다. 글씨는 오준(吳竣, 1587∼1666)이 썼고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란 전서(篆書) 제목은 여이징(呂爾徵, 1588∼1656)이 썼다.


비석은 대리석 계통인데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명문이 잘 남아있다. 비석의 앞면 왼쪽을 몽고문자, 오른쪽을 만주글자, 그리고 뒷면을 한자로 새긴 희귀한 예이다. 비석 위쪽의 이수(螭首)에는 여의주(如意珠)를 중심으로 두 마리의 용이 화려하게 새겨졌다. 귀부(龜趺)는 17세기 석비의 전형을 보여주는데, 몸체에 비해 머리가 지나치게 크고 비석을 받치는 비좌(碑座)를 연잎 모양으로 새겼다.


삼전도비는 조선이 청에 항복하게 된 경위와 청 태종의 침략을 '공덕'이라 찬미한 굴욕적 내용이지만, 반면 자주국방의 중요성을 후세에 일깨워주는 소중한 역사적 교훈이 된다. 또 비문에 새겨진 만주·몽골문자는 조선시대 외국어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http://sca.visitseoul.net/korean/stone_construction/i_tombstone08008.htm

 

 

 

 

 

 

 

United Buddy Bears

 

 

 

 

2005 아름다운 버디베어 서울페스티벌

 

일시 : 2005.10.08 ~ 2005.11.09

장소 : 서울 올림픽 공원 평화의 광장

UN회원국인 124개국 124예술인들이 참여한 지구촌 예술 행사
자라나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예술적 체험, 놀이
그리고 교육을 동시에 제공하는 행사
지구촌 극빈 어린이를 돕는 아름다운 공익행사

124개국을 대표하는124마리 곰들의 문화 올림픽!!

 

 

 

 

 

http://www.buddybears.or.kr

 

 

 

 

 

 

평화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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