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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irit/e—echo—bluespirit

유관순 柳寬順 Yu Kwan Sun

by e-bluespirit 2009. 3. 2.

 

 

 

 

 Yu Kwan-Sun (1904–20)

Image source: The web page Ryu Kwan Sun’s Dungeon 800 Words:

 http://www.crosswinds.net/~sroney/dungeon.html

 

 

 

I am one of Korea’s most famous independence fighters. I am very young, just sixteen years old, but people believe that I contribute significantly to the Independence Movement against Japan. I am enraged by what has happened to our country during the occupation and organize and provoke people to resist Japanese colonialism. I help plan the March 1, 1919 demonstration, a nonviolent peaceful protest similar to your Martin Luther King’s civil rights march on Washington in 1963. While most people followed King’s march on Washington, we plan our protest secretly. We catch the Japanese completely by surprise, a tribute to our careful organization as well as to the overly confident police. The peaceful demonstration sparks a nationwide movement in the following months and involves over one million people. Massive demonstrations on this scale are unprecedented, and it is clear that the Japanese do not think we are capable of such a concentrated effort.

We suffer greatly under Japanese rule. The idealism of Woodrow Wilson and his Fourteen Points raises our hopes at the end of WWI. We believe, perhaps naively, that Wilson’s proclamation of self-determination for subjugated peoples will somehow lead to Korean independence. Our hopes are very high.

 

 

The leaders of the movement write a Declaration of Independence, expressing our desire to be free and independent. Thirty-three Korean nationalists sign this document.

Three years before the demonstrations begin, I start attending the Ewha Girls’ School in Seoul, one of Korea’s earliest schools for women. I study very hard and become known as someone with firm convictions and commitment. When I return home during the summers to my small village, I teach people to read and expose them to Western science and geography, which is very different from the traditional Chinese classical education they are receiving.

 

In 1919 the determination to be independent from Japan reaches a climax when King Kojong, who abdicates his throne in 1907, dies in Seoul amid rumors he has been poisoned by the Japanese. My classmates and I join the nation in our sorrow for the king. Leaders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decide to capitalize on the mood of the country and agree to massive demonstrations on March 1, two days before the king’s funeral.

 

When my friends and I get copies of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we pledge that we will participate in a mass demonstration in Pagoda Park in downtown Seoul. Our principal strongly advises the students not to participate. However, on March 1, seven of us cut class and join the crowd at Pagoda Park. A few days later I join the protests, but this time I am arrested, though only for a short time.

 

When the governor-general closes all the schools in Seoul because of the unrest, I return to my hometown where I convince my brother and several friends to hold a rally similar to the one in Pagoda Park. With the help of members of a local church, I begin to organize a demonstration. I travel from village to village to get additional support. I announce that the signal for the demonstration to begin will be a lighted torch on the mountaintop.

I personally light the torch and carry it to the mountaintop.

 

The next day I address a crowd assembled in the market place. We wave the national flag, which is outlawed by the Japanese government. We shout for independence. The police appear and shoot down many people. My parents are among the first to be killed. They arrest many people, including me.

 

I am tortured for many days. Then I am transferred to a prison in Kongju. I am later tried, found guilty, and sentenced to three years in prison in Seoul. Prison life is very difficult for me. After a period of torture and suffering, I die. My last words are "Japan shall fall." I die along with an estimated 7,500 others in demonstrations that sweep the country in a period of ten months. There are approximately 45,000 arrests.

 

The movement fails terribly. Our country will not be independent until the Japanese are defeated in 1945. The twentieth century is a time of terrible sorrow for my people: occupation, war and political division. Yet we never give up hope to be a unified nation.

I am glad that I am remembered for my role in our history. I am often called the Korean Joan of Arc. I give hope to my people when they need it the most. There is a shrine in my memory in Ch’onan, the village of my birth. I am buried on the mountain where I carried the torch for freedom many years before. In Seoul there is a statue in my famous pose, arm outstretched, torch in hand.

 


 

 

 

 

유관순 열사는 성경구절을 한번 들으면 줄줄 욀 정도로 머리가 총명하였다.

유관순의 오빠 유우석은 유관순을 이렇게 기억한다.

“그 시절엔 한글을 반절이라고 했지요. 아무도 관순이에게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그 반절을 혼자 익혀서 성서를 읽더니 외워대지 않겠어요. 재주는 꽤 있었던 것 같애.”

유관순열사 생가(사적 제230호)

매봉산을 사이에 두고 유관순이 태어난 용두리(‘지랭이골'이라 불렀다)와 반대방향에는 탑원리 등재부락이 있다. 열일곱 살에 이 등재부락에 시집온 김원숙은  당시 사내아이처럼 괄괄했던 유관순을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17살에 5~6가구밖에 살지 않는 이 마을에 시집을 왔을 때 소녀 관순은 귀밑머리, 황새머리, 조랑머리로 머리를 세 갈래로 땋고 사내처럼 동네를 휘젓고 다녔으니까 5살 되었을 거야.”

유관순열사가 다녔던 매봉교회.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 소재

김원숙할머니와 같은 부락에 살며 조부인 최준근으로부터 유관순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왔던 최선재씨에 의하면 유관순은 용두리와 탑원리를 전전하며 여러 차례 이사를 했고, 작은 집에서 어렵게 기거했다고 한다.

같은 마을에서 자란 먼 조카 유제한은 유관순의 생김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관순은 이마가 넓고, 미간이 윤택하며, 눈이 약간 큰 듯하나 흑백이 분명하고 광채가 유난히 빛나며, 코가 뚜렷하고, 아래 위가 고르고 튼튼한 체격을 가졌다.”

현재의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전경

유관순의 오빠 유우석의 며느리인 김정애씨는 유관순의 이화학당 재학시절 찍은 사진을 보며 유관순의 생김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 얼굴처럼 우럭부럭 생기지는 않았다고들 말해요, 얼굴이 희고 복스럽고......어깨동무하고 찍었기 때문에 으쓱 어깨가 올라가 찍혔어요. 다른 학생들은 서로 오른쪽 학생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는데 유열사는 키가 커서 오른쪽 사촌언니 유예도와 어깨동무를 하듯 팔을 올려 놓고 찍었어요. 키가 컸던 거지요.”

실제로 유관순열사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을때 기록했던 수형자 기록표를 보면 유관순열사의 신장은 5자 6치, 즉 11자를 30.3cm로 환산하면169.7cm이다. 조선총독부 관보 제 3226호(1923년 5월 15일)에 따르면 당시 여학생의 평균키는 4자 98치, 즉 150cm 였다. 유관순열사는 키가 크고 활달하며 남자 못지않은 배포가 있는 소녀였던 것이다.

이화학당 재학시절의 유관순
(뒷줄에서 맨 오른쪽)

유관순열사와 같은 이화학당을 다니며 5년간 같은 기숙사생활을 했던 보각스님(1904년생,속명 이정수)은 유관순은 지기 싫어하고 고집이 세며 때론 18살의 소녀다운 장난끼 있는 아이였다고 말한다.

이화학당 기숙사는 공부 종을 친다음 자기 전에 기도종을 치면 방에 있는 사람들이 돌아가며 기도를 하게 되어 있었다. 그 날은 유관순이 기도하는 날이었는데 유관순은 기도를 끝낼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하는 것을 “명태 이름으로 빕니다.”라고 하였다. 친구들은 모두 배를 잡고 웃었고 이 소리를 듣고 사감선생이 달려와 이 방 학생들에게 품행점수를 낙제점을 주었다고 한다.

유관순은 보각스님 집에서 보내온 명태반찬이 하도 맛있어서 명태생각에 그렇게 기도했다고 하여 친구들이 다시 한번 웃게 만들었다.

유관순열사와 같은 이화학당에 다녔던 보각스님

사촌인 유경석과 노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당질인 유제경에게는 손수 뜨개질을 하여 모자를 선물하기도 했으며, 학교에서는 어려운 청소를 도맡아 했었다고 한다.

이같이 유관순은 또래 소녀들처럼 장난 잘치고 웃음 많고 뜨개질을 좋아하는 18세 소녀였던 것이다.

유관순열사가 생전에 5촌 당질인
유제경에게 직접떠준 뜨개모자

일제는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우리의 내정을 간섭하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노골적으로 침략의 야욕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후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 되었으며 1910년에 이루어진 치욕적인 국권강탈로 우리민족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는 유관순의 나이 8살 때의 일이다.

꿈많고 총명하며 장난잘치고 웃음많던 소녀 유관순은 나라를 빼앗긴 서글픈 시대적 현실속에서  배일의 사상이 싹텄고 부친에게 기울어진 민족의 국권회복을 위하여 혼과 마음을 불태울 이념과 정신도 공급 받았다.

 

 

1919년 1월 22일 광무황제(1852-1919)서거는 온 국민을 나라 잃은 슬픔에 젖게 했으며, 민족대표는 이 사건을 독립운동 절호의 기회로 삼았다.

 

1919년 3월 1일 서울은 전국에서 몰려온  애족행렬들로 넘쳐났다.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문의 발표로 시작된 삼일 운동은 2000만 민중의 하나된 외침이었으며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우리 동포가 있는 곳 어디서든 힘차게 울려퍼졌다.

 

 

3.1독립운동봉기현황

시위횟수

1542회

참가인원

약 200만명(당시인구 약 2000만명)

 

 

유관순은 김복순, 국현숙, 서명학, 김희자 등과 함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하고 ‘결사대'를 조직하여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에도 참여했다. 만류하는 프라이 교장선생님 등을 뿌리치고 학교담을 넘어 탑골공원까지 나가 만세를 부르고 돌아왔다.

 

3월 2일 학생대표들이 이화학당에 와서 3월 5일 학생단 시위에 참여할 것을 권고했다. 유관순과 5인 결사대는 3월 5일 남대문 앞에서 벌어진 학생단 시위도 참여했다. 이날 유관순을 비롯한 학생들은 지금의 남산에 있었던 경무총감부로 붙잡혀 갔다. 외국선교사들이 아이들을 내 놓으라고 강력하게 요구하자 국제여론을 일으킬 수 있는 외국인들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학생들을 풀어주었다. 이렇게 유관순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후 3월 10일 기해 모든 학교에 임시휴교령이 내려지자, 유관순은 같은 이화학당을 다니던 사촌 언니 유예도와 함께 고향 병천으로 내려갔다.

독립운동화

 

 

고향으로 내려온 유관순 열사는 동지를 규합했다. 유관순은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아주머니들처럼 머리에 수건을 쓰고 다니면서 병천(竝川), 목천(木川), 천안(天安), 안성(安城), 진천(鎭川), 청주(淸州) 등지의 교회학교와 유림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음력 3월 1일에 총 궐기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종용하여 약속을 얻어냈다.

드디어 거사일로 정한 음력 3월 1일의 하루 전인 2월 그믐날 저녁 용두리 뒷산인 매봉산에 올라가 횃불을 높이 올렸다. 이 횃불이 내일의 거사 신호이며 밀약된 동지들과의 연락 신호이었다.

매봉산 정상에 봉화대(사적 제230호)

매봉을 중심으로 구밋들 우각산, 강단산, 백전리 돌산, 세성산, 아우내 장터 뒤 갓모봉, 봉화대, 개목산 등 일곱 개의 산에서 불길이 솟아 올랐다. 거의 같은 시간에 광덕산, 덕산, 화산, 진천의 덕유산, 구도산,서림산 동남편의 약사산, 청주방면의 수리봉, 남쪽의 백석봉, 남산, 발산, 망경대, 연기지방의 율산, 서남으로 마산, 장명리의 장산에서 또한 횃불이 치솟았다. 모두 24개소나 타 올랐다고 한다.

1919년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는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어 마침내 3000명이 넘는 군중이 모였다.

유관순은 직접 만든 태극기를 주민들에게 나눠주며 자주 독립 쟁취를 위한 연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자 군중들이 동하여 만세소리는 천지를 진동했고 감격에 휩싸여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거리를 행진했고 이 소식을 듣고 온 일본 헌병들은 평화로운 시위를 하는 군중에게 닥치는 대로 총을 쏘아댔다.

이날 일본 헌병의 무자비한 총공격에 유관순의 부모를 비롯한 19명이 죽고  죄없는 주민 30여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유관순도 체포되었다.

유관순만세 벽화

1920년 상해에서 간행된 김병조의 『한국독립운동사』(상)에도 아우내독립만세운동의 기사가 실렸다.

천안군의 병천장에서 의사 김구응이 남녀 6천4백 명을 소집하여 독립을 선언하였다. 일본 경찰이 우리 민중의 기수(旗手)를 찌르고자 하자, 기수는 맨손으로 칼날을 잡으니 유혈이 임리(淋璃)할 때에 적이 (기수의)복부를 연거푸 찔러서 치사시켰다. 이에 김구응이 적의 잔인무도함을 힐난하여 변박(辨迫)하니 적은 이치에 굴복하고 말에 궁하게 몰려 문득 그 총으로 자살코자 하더니 도리어 그 총을 김구응에게 발사하니 김구응이 순국하고 말았다.
그러나 적은 시체가 된 김구응의 머리를 때려 부수고, 시체의 사지를 칼로 난자하였다. 이윽고 김구응의 늙은 어머니가 와서 시체옆에 이르러 혼도(昏倒)하여 쓰러지며 적을 크게 꾸짖으니 적은 또한 그의 늙은 어머니를 찔러 죽였다.

아우내만세운동 디오라마(기념관내)

아우내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6개월이 지난 1919년 9월 29일 조선군사령관 우츠노미야타로가 본국의 육군대신 다나카에게 3.1운동 중의 사상자에 대한 종합적인 보고를 하였는데 다음은 그 가운데 충청남도 천안군 병천에서 일어난 시위운동에 관한 기록이다.

천안군 병천은 소요 당일(4월 1일)수일 전부터 밤마다 읍내 주의의 고지에서는 모닥불을 피우고 만세를 고창하고 또 여러 가지 유언비어를 퍼뜨리면서 형세가 불온하였는데 4월 1일은 장날에 해당하여 아침 이래 현저히 다수의 선인들이 들어왔으므로 시장이 심히 잡답하여 매우 불온한 형세가 되었다. 헌병 등은 크게 경계 중 오후 2시경 군집 약 3천 명은 시장에서 한국 태극기를 선두로 5,6백 개의 한국기를 손에 들고 만세를 고창하며 크게 소요하면서 드디어 헌병 주재소로 몰려와 제지를 궁락하지 않았다. 헌병은 부득이 격투를 개시하게 되었는데 중과부적이라 발포하자 일시 사산하였으나 그래도 폭동하여 위험에 임박해 있다는 보고를 접하고 곧 당시 천안철도 엄호대장이던 키네대위 이하 6명은 자동차를 타고 동지로 급행하였다. 오후 4시경 동지에 도착하였을 즈음 선민은 아직도 사산하지 않고 시장 부근은 크게 잡답하고 있었고 또 폭동선민은 군집하여 주재소를 포위하고 감히 제지를 듣지 않을 뿐 아니라 폭행하여 틈만 있으면 엄습하려는 형세이었다. 이에 있어  출동한 병졸로 하여금 이에 대해 병기를 사용하여 적극 진압에 힘써 겨우 동소에서 사산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래도 부근 고지상에는 묵묵으로 산재해 있으나 다시 군집하여 몰려 올 형세는 없게 되었다. 일몰 후 천안으로부터 증원한 상등병 이하 5명을 잔류하고 헌병과 협력하여 경계에 당케하고 타(他)는 천안으로 철퇴 귀환하였다.

사모탄(파견병만)실탄14발피해의 정황

헌병주재소는 구내1면에는 소석이 투입되어 있고 창유리는 파손되고 주위의 조망 담은 전부 파괴되고 또 유치장 뒷벽은 가래로 파괴해 있었다. 우편소 부근에서 전화선이 절단해 있었고 면사무소의 입구에는 미닫이가 약간 파괴되었다. 부상자 선인 61명 그중 18명은 부상 후 사망하다. 대부분 키네대위 도착 전에 지방 관헌이 사상자를 내게 하였다.

일제는 사건을 축소하기 위해 축소 보고한 것이다. 실제로는 더 많은 사망자가 부상자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현재의 아우내장터 장날 풍경

 

 

 

유관순은 천안에 일본헌병을 거쳐 공주재판소로 넘겨졌다. 공주지방법원은 유관순,유중무(유관순의 숙부), 조인원(유석 조병옥 박사의 아버지) 세 사람에게 징역 5년을 언도했다. 수신과 성남면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했던 김교선, 한동규, 이백하, 이순구는 보안법위반 및 소요죄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고 김상철은 징역6월을 선고받았다. 시위대가 인명을 살상하지 않은 시위에서 5년형을 선고받은 예가 없었고 이로 인하여 유관순과 조인원, 유중무 등이 얼마나 치열하게 법정투쟁을 벌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어린 여학생인 유관순이 조인원과 유중무 등과 같은 중형을 받았다는 것은 유관순이 시위에서 큰 역할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유관순열사 경성복심법원 재판기록문

 

유관순이 공주지방법원에서 받은 형량에 대해서는 판결문이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여러 가지 설이 있어 왔다. 최은희는 공주에서 7년 구형에 3년 언도했으나, 복심법원에 공소를 제기하여 재판장에게 의자를 집어 던져 법정 모독죄가 가중되어 7년이 언도되었다고 한다.
박용옥은 공주에서 3년, 서울 복심법원에서도 3년형을 받았다고 한다.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간 유관순과 복역한 어윤희 여사는 공주에서 6년형을 받았다고 하였다.

유관순열사 수형자기록표

 

 

 

 

 

공주감옥에서 만나 함께 재판을 받았던 이화동창인 김복희와 경성복심법원에서 상고심 재판을 받던 중에 유관순을 만나 직접 이야기를 들었던 이화학당 교사 박인덕, 공주감옥에서 함께 재판받았던 김현경은 유관순이 공주지방법원에서 7년형을 받았다고 하였다. 또한 조인원의 아들 조병호는 부친 조인원도 7년형을 받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최근 병천·수신 형사사건부가 발견되면서 유관순은 공주지방 법원에서 5년형을 받았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유관순은 서울 서대문형무소 수감 중에도 독립만세를 부르며 옥중 동료들을 격려했고 그때마다 매질과 고문을 당했으나 끝끝내 자주 독립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당시의 서울 서대문형무소

 

 

 

유관순은 감옥에서도 독립만세를 부르며 옥중 동료들을 격려했고 그때마다 모진 매와 고문을 당했으나, 끝끝내 대한 독립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일제의 계속되는 고문과 체포 당시 입었던 상처가 도져 결국 그토록 목놓아 외치던 조국의 독립을  못 본 채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서대문 형무소의 어두운 감방에서 순국했다. 옥중 생활 1년 반의 세월이 흘렀고 유관순열사의 나이 19세의 꽃다운 청춘이었다.

유관순열사의 관은 이화학당에 인도되어 스승과 동문들의 손에 의하여 10월 14일 정동교회에서 김종우 목사 주례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유관순열사의 시신은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나, 이태원 공동묘지가 일제하에서 일제의 군용기지로 전환됨에 따라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되는 과정에서 없어지게 되었다. 이에 유관순열사의 고혼(孤魂)이라도 편히 쉬게 하고자 1989년 10월 12일 이곳 매봉산 기슭에 초혼묘(招魂墓)를 봉안하였다.

초혼묘

 


 

 

 

 

Yu Kwan-Sun (March 15, 1904-October 12, 1920) was a student and organizer in what would come to be known as the March First Movement against the Japanese occupation of Korea in the South Chungcheong.[1] In 1919, Yu Kwan-Sun was a student at Ewha Womans University in Seoul, where she witnessed the beginnings of the March 1st Movement. Her deep faith in God and the teachings from the Methodist Ehwa School gave her the courage to act boldly.[2] The school went into recess, because of an order by the Japanese government to close all Korean schools. Yu Gwan-sun returned to her home in the Jiryeong village.

 

There, along with her family, she began to attempt to arouse public feeling against the Japanese occupation. She also planned a demonstration for independence, which included people from some neighboring towns, Yeongi, Chungju, and Jincheon, The demonstration was scheduled to start on the First lunar day of March 1919 at 9:00 a.m. in Aori Marketplace. She, along with about 2,000 demonstrators, shouted, "대한 독립 만세" (Daehan Dokrip Manse), which translates to "Long live Korean Independence!" The Japanese police were dispatched at around 1:00 p.m.

 

That same day, and Yu was arrested with other demonstrators. Both her parents were killed by Japanese police during the demonstration. She served a brief detention at Cheonan Japanese Military Police Station, and then she was tried and sentenced to seven years of imprisonment at Seodaemun Prison. During her sentence, Yu Gwan-Sun continued to protest for the independence of Korea, for which she received harsh beatings and torture. She died in prison on October 12, 1920, reportedly as the result of torture. Her last words were "Japan shall fall." The Japanese prison initially refused to release her body, but eventually and reluctantly the prison released her body to Fry and Walter, principals of Ehwa Women School and only after Fry and Walter threatened to expose this atrocity to the world. Her body was reported to have been cut into pieces.The dismembered body was contained inside the oil crate which was supposed to be returned to Saucony Vacuum Company. The Japanese Authorities did so as a retaliation against the threat from Ehwa School.

She was given a national burial in 1962.

 

 

 

 

 

 

 

 

http://www.yugwansun.com

http://www.aasianst.org/EAA/connor.htm

http://en.wikipedia.org/wiki/Yu_Gwan-s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