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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e—cultivate—culture

리상호와 한국고전

by e-bluespirit 2005. 12. 29.

 

리상호와 한국고전

 

 

서점에 ‘청구영언’ 을 사러 갔지만 그 책이 없었다. 우리 문학의 국보적인 시조집 ‘청구영언’ 이 서점에 없다는 것이 놀라웠다. 대신 ‘해동가요’ 를 찾아봐도 역시 없었다. 점원이 컴퓨터를 한참 두들기더니 며칠 후 ‘청구영언선’ 이라는 책을 대신 보내왔다. 편자가 ‘리용수’ 라는 사람이었는데 놀랍게도 그 책은 북한에서 출판한 것을 남한에서 영인한 것이었다.

 

활자는 더러 깨어졌고 횡서한 판형은 조잡하였지만, 리용수는 나름대로 시조를 분류하고 주해를 달아 읽기 쉽도록 해 놓았다. 이처럼 ‘청구영언’ 같은 책이 우리가 도서관 고서 더미에서 찾지 못한다면 이제 접할 수도 없는 책이 되어버렸다.

 

필자는 최근에 세 권짜리 ‘열하일기’를 사서 읽어보았는데 그 문체가 썩 마음에 들었다. 아마 박지원의 원래 문체가 날카롭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원래 문체가 그렇더라도

번역을 어설프게 하면 향기가 빠져 버리는데 이 ‘열하일기’는 토속어를 감칠맛 나게 구사하여 원문의 향기를 그대로 살리고 있었다.

 

역자를 보니 북한의 ‘리상호’ 라는 사람이었다. 그 책의 서문에, 북한에서 벌이고 있는 ‘조선고전문학선집’ 출간 사업은 1983년부터 시작하여 훌륭한 성과를 거뒀는데, 그 책은 이 사 업에서 출간한 ‘열하일기’ 를 거의 그대로 출판한 것이라고 한다.

 

북한에서는 이미 1950~60년대 국가 차원에서 고전 문학작품을 현대어로 옮기는 작업을 해 왔다고 한다. 특히 조선과학원 고전연구실 소속의 학자 리상호는 ‘열하일기’ 를 1955~57년에 완역했는데 이것이 남북한 통틀어 최초의 완역이라고 한다.

 

리상호는 또 ‘삼국유사’ 도 번역하였는데, 이것 또한 남한에서 ‘북역 삼국유사’ 로 출판되어 지금 시판 중에 있다. 북한에서 출판한 ‘청구영언선’ ‘열하일기’ ‘북역 삼국유사’ 를 남한에서 읽는다고 해서 이념이 문제될 것은 없을 것이, 이런 고전에는 이념을 초월한 우리 민족 고유의 정신과 정서가 배어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몇 년 전에 ‘왕오천축국전’ 을 빌려서 읽다가 두음법칙을 무시한 철자법을 이상하게 여겨 자세히 들여다보았더니 그 또한 북한에서 나온 책을 남한에서 영인한 것이었다. 물론 실망이 컸다.

 

그러나 다행히 작년에, 한때 ‘깐수’ 로 알려졌던 정수일 교수가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를 집대성하고, 원문을 영인한 두루마리까지 끼워 그야말로 ‘왕오천축국전’ 의 결정판을 내 놓았다. 필자가 그 전에 나온 책과 비교해 보았더니 그 동안 많은 연구를 해 혜초의 삶을 대부분 밝혀 놓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북한학자가 썼든, 북한간첩 전력자가 썼든, 우리 민족의 빛나는 고전을 해박한 지식으로 번역하고 풀이한 업적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 기상호의 간결하면서도 콕 쏘는 문체의 경지는 글을 갈고 닦는 수련을 하루 이틀에 하여 이룬 것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꼭 짚어야 할 문제는 이런 고전에 관한 남한의 문화 정책이다.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우리 고전의 상당수는 도서관의 빛 바랜 책으로 밖에 접할 수 없거나 아니면 아예 번역조차 되지 않았다. 일년에 한국학술진흥원에서는 수천억 원의 예산을 연구˙출판에 부어넣지만 ‘청구영언’ 같은 고전 하나 번듯하게 내놓은 것이 없다. 좀 덜 알려졌지만 ‘동문선’ ‘동경잡기’ ‘택리지’ 동국여지승람’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국정운’ ‘계원필경’ 같은 책도 곡 같이 구할 수 없는 책들이다.

 

문화관광부는 시 한 편 잘 쓰면 금방 40만원을 주는 것도 좋지만, 이런 고전 출판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이런 사업보다 더 기본적인 사업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우리의 소중한 고전을 지금처럼 방치하는 것은 상감청자나 금동미륵반가사유상 같은 국보를 창고에 처박아 두는 것과 같다.

 

 

 

 

남궁곤

구제한의원 원장

 

 

 

 

 

서울 우리신문 제 199호

2005 년 11 월 8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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