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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e—fellow—friendship

진정으로 고픈 것

by e-bluespirit 2004. 4. 16.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  진정으로 고픈 것
 

“이제 집에 가면 또 책을 봐야지. 매일 저녁 자기 전에 다섯 페이지 정도 읽어.” 술만 좋아하는 이 친구가 매일 책을 읽는다는 데에 놀랐습니다. “장편 소설 <남부군>이야.” 아니, 그 책이 천천히 의미를 새겨가며 읽어야 하는 <채근담>이나 경구 모음이라도 되나 싶어 놀람이 웃음으로 변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남들은 벌써 다 읽은 책을 이제서 겨우 다섯 페이지씩 억지로 읽고 있는 모양이구만….’

“나는 이렇게 잘 먹고 집에 가는데, 그 친구들은 오늘도 꽁보리밥도 못 먹고 있을 거구만. 어떤 때는 너무 안됐어서 더 읽지 못하고 혼자 술 한잔 하지.” 대학 동창인 그는 술잔을 비우면서 우리 앞에 놓인 술과 안주를 대하기가 미안하기라도 한 듯 내려다보았습니다. 오래 전에 읽은 책이라 내용은 가물거리지만 지리산 자락을 헤매고 있는 빨치산들이 고생하는 대목쯤일 것입니다. 그는 소설 속의 그들을 마치 지금 집으로 가는 길에 만나게 될 이웃처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종류의 소설은 일단 손에 잡으면 밤을 새고서라도 다 읽고 마는 저와는 얼마나 다른 유형의 성격인지요. 화를 낼 만한 상황에서도 ‘그럴 수도 있는 거’라고, 누구나 다 아는 것도 ‘그런 것이 있냐’고 묻는, 매사에 저보다 몇 박자 느리게 살고 있는 친구입니다. 구체적으로 말을 해본 적은 없지만, 지적인 측면에서도 그 친구보다 제 쪽이 우월하다는 것을 서로 인정하고 있는 사이입니다.

뭐든지 제게 맡기고 자신은 뒤로 빠져 있기 때문에 이런 판단을 하게 했는데,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하니 너구리 같은 이 친구가 저보다 몇 급수 높다는 확신이 섭니다. 느슨한 그의 성격을 못 참고 먼저 나서는 급한 저의 성격이 마치 제가 더 잘났다고 착각하게 했던 것입니다. 밤을 새며 책을 읽어버린 저는 그 속도만큼 소설 속에서 빨리 빠져나왔는데, 그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읽어가면서 그들의 고통을 현실처럼 나누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느리게 사는 이점을 일상에서 만끽하는 친구입니다.


“우리들은 없었던 시절 이야기를 더 했습니다. 아니, 그날은 주로 그 친구가 말을 했습니다. “군대에서는 늘 배가 고팠어. 훈련 끝나고 나누어주던 논일 빵이 그렇게 맛있었지.” “논일 빵이 뭐야?” “아, 논산의 제빵 브랜드지. 어느 날 부대에 누군가 높은 사람이 왔다며 서울서 선물로 가져온 빵을 배급해주었어. 비닐 봉투를 뜯자마자 확 풍겨오는 질 좋은 버터 냄새가 기가 막히더군. 앙꼬나 크림도 없는데 어찌나 맛이 좋던지 혀가 녹는 것 같았다니까. 군대에서는 화랑 담배만 태우잖아. 그런데 저만치 오십 미터 밖에서 누군가 한 사람이 태우는 양담배 냄새는 코로 딱 꽂히듯이 들어와. 다른 담배 연기와 섞이지도 않고….” 남자들의 군대 이야기는 세월이 얼마큼 지났든, 오래된 책갈피에 들어 있는 네 잎 클로버같이 변하지 않게 마련입니다.

듣는 우리도 순수하게 웃을 수 있는 까닭은 힘들고 가난했던 시절이 모두 지나갔다는 안도감 때문이겠지요. “그렇게 배가 고프면 눈, 코, 입이 발달해. 감각이 예민해지지. 예술가가 가난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거야. 최상의 감각으로 만드니까 메시지가 강력해지는 거지. 그러니까 예술은 토론을 벌이지 않고도 설득하는 영역이지. 너무나 풍부하면 감각들이 마비되게 마련이잖아….” 잘 들어주었기 때문인지 평소보다 말이 많았던 친구의 이 날 이야기는 꽤 곱씹을 만했습니다.


예술은 인간의 영혼에 모아둔 벌꿀이라고 합니다. 예술이 힘이 아니고 위로인 이유인 것입니다. 인류 진보의 기관이 바로 감각이라는데, 요즈음 진정으로 ‘고픈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몇 끼 굶기라도 해서 몸을 가난하게 만들어 무디어진 감각을 일깨우고 싶습니다. 예술가가 될 수는 없을지언정 한 가지라도 절실하게 느끼는 그런 삶이 그립습니다. 도드라져 올라오는 봄을 둔하게 맞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위장을 비우고, 천천히 바라다보고 싶습니다.

“추신 : 이 도시에는 예술은 고사하고 폭력 같은 언어의 온갖 플래카드들이 지나치게 많이 보입니다. 저들만이라도 우선 떼내어도 … . 우리 사회가 좀 더 차분히 가라앉았으면 싶습니다.
 
월간 <행복> 2004년 04월호

 

 

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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