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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e—mid—monolog

나는 다시 강으로 가고 싶다.

by e-bluespirit 2006. 3. 20.

 

 

 

 

 

 

나는 다시 강으로 가고 싶다.
 
 
 
오늘은 하루 종일 가슴 저 밑에서 출렁이는 강물 소리를 들었다.
 
내 가슴을 흔들고 내 몸을 흔들다가 강가 모래톱 어딘가에
 
나를 부려놓고 흘러가는 강물 소리.
 
온종일 젖어 있다가, 온종일 설레게 하다가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잔잔해진 강물 소리.
 
얼굴을 한쪽으로 젖힌 채 따뜻한 돌멩이를 갖다대고 톡톡 두드리면
 
귓속에서 쪼르르 흘러내릴 것 같은 강물 소리.
 
 
그 강줄기 위에다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꽃잎처럼 띄워놓고
 
천천히 따라 내려가고 싶다.
 
따뜻한 모래밭에서 사랑하는 이의 무릎을 베고 누운 듯
 
편안하게 누워 잠시 잠이 들고 싶다.
 
눈을 감고 풀잎을 스치는 소리처럼 들려오는 그의 말소리를
 
듣고 있고 싶다.
 
그 말을 해본 지가 언제인지 너무도 오래된 사랑한다는 말을
 
강물 소리 곁에서 다시 하고 싶다.  강으로 가고 싶다.
 
 
'다시 바다로 가고 싶다고, 그 호젓한 바다, 그 하늘로.
 
내가 원하는 건 오직 키 큰 배 한 척과 방향 잡을 별 하나...
 
나는 다시 바다로 가야겠다고, 떠도는 집시의 생활로,
 
갈매기 날고  고래 다니는 칼날 같은 바람 부는 바다로' 가고 싶다고
 
노래한 시인도 있지만 나는 다시 강으로 가고 싶다.
 
 
"여유 있게 흐르면서도 온 들을 다 적시며 가는 물줄기와
 
물살에 유연하게 다듬어졌어도 속으론 참 단단한 자갈밭을 지나
 
천천히 천천히 걸어오고 싶다.
 
욕심을 버려서 편안한 물빛을 따라 흐르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한적한 강 마을로 돌아가 외로워서 여유롭고
 
평화로워서 쓸쓸한 집 한 채 짓고 맑고 때묻지 않은 청년으로
 
돌아가고 싶다."
 
 
지는 노을이 너무도 아름다워 강물도 그만 노을 물이 들어버린 강가에서
 
나도 다시 잃어버린 감동을 되찾고 싶다.
 
아름다워서 아름다움을 주체할 수 없고, 외로워서 외로움을 참을 수 없고
 
슬퍼서 슬픔으로 하루가 다 젖는 그런 출렁임을 다시 만나고 싶다.
 
제비꽃 한 송이를 보아도 한없이 사랑스럽고 물새 한 마리를 보아도
 
가슴이 애잔해져 오던 젊은 날로 돌아가고 싶다.
 
 
다음 글쓰기 시간에는 시를 배우러 오는 소녀들에게 너희도 모두
 
어디인가로 가라고 말해주어야 겠다.
 
숲으로 가고 싶으면 두 팔을 벌리고 숲으로 가고,
 
드넓은 바다로 가고 싶은 사람은 파도를 헤치며 배를 저어 나가고,
 
끝없는 벌판으로 나가고 싶은 사람은 말을 달려 벌판으로 가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러 가고 싶은 사람은 그들 곁으로 가고,
 
그래도 아직 갈 곳을 정하지 못한 심약한 사람이 있으면 강으로 가라고
 
말해주고 싶다.
 
 
오늘은 하루 종일 마음 깊은 곳에서 시작하여 여린 살갗을 적시는
 
강물 소리를 들었다.
 
부드럽게 흐르면서도 오래오래 유장하게 흘러가는 물 소리,
 
강물처럼 맑으면서도 착해지는 마음으로 돌아가고 싶다.
 
편안하게 내 발걸음, 내 속도에 맞는 강물 곁으로 돌아가고 싶다.
 
 
 
 

 

 
 
 
나무보살 물보살
 
 
 
겨울 산사에 갔다.  절까지 가는 동안 길 옆에 서 있는 나무들이 장엄하였다.
 
안아주고 싶었다.  그러나 안아도 다 안을 수 없는 나무의 색신(色身)은
 
차라리 법신(法身)이라 부르고 싶었다.
 
인적이 끊긴 산사의 한적한 오후, 나무들은 적멸 속에 서 있었다.
 
제가 가졌던 것을 다 주고도 담백하게, 담담하게 서 있는 모습이
 
나무를 오백 년 천 년씩 살게 한다.
 
봄에 피었던 꽃도 여름에 무성했던 나뭇잎도 가을에 알차게 맺은
 
열매도 다 돌려주고 지금은 빈 몸이다.
 
사람이 원하면 사람에게 주고 산이 원하면 산에게 돌려준다.
 
저를 키워준 흙에게도 나누어주고 물이나 바람에게도 조금씩 나누어준다.
 
마지막에는 제 몸을 도끼로 쪼개 가지고 가도 그것까지 내준다.
 
애당초 흙이나 바람이나 물이나 햇빛에게는 받은 게 있으니
 
받은 것 이상으로 되돌려준다고 하지만, 사람에게는 받은 게 없어도
 
제 몸을 내준다.  그저 끊임없이 주는 삶으로 일생을 산다.
 
이 어찌 보살이 아닌가.  나무의 삶이 보살행이요, 나무가 바로 보살이다.
 
 
골짜기 얼음장 밑으로 맑고 투명한 물이 흐르고 있었다.
 
풍경 소리를 들으며 산 아래로 흘러가는 물은 불심으로 충만해 있었다.
 
그래서 물 소리는 청아하였다.
 
반야심경, 금강경, 독경 소리를 들으며 산골짜기를 나서서 그런지
 
물은 제가 만나는 모든 것을 이롭게 하면서 간다.
 
산발치의 대나무 뿌리를 적시고 바위이끼를 자라게 하고
 
숲을 푸르게 한다.  들에 꽃이 자라게 하고 풀들이 눈뜨게 한다.
 
사람들에게 깨끗한 몸을 내주고 더러운 몸이 되어 강으로 돌아온다.
 
강과 바다로 가는 동안 수억의 물고기 떼를 살게 하고
 
다시 하늘로 제 몸을 돌려보낸다.  하늘이 부르면 언제든 되돌아간다.
 
하늘에서 받은 몸이니 언제든 하늘로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다.
 
하늘이 시키면 사막 한가운데도 가 있고, 눈보라 몰아치는
 
고원지대 꼭대기나 폭발한 화산의 입 안에도 가서 앉아 있다.
 
사람에게는 받은 게 없어도 사람들이 원하면 제 전부를 내준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남을 이롭게 하고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무엇을 되돌려받아야겠다는 생각도 물론 없다.
 
그저 끊임없이 남을 돕는 삶으로 평생을 산다.  이 어찌 보살이 아닌가.
 
물의 삶이 보살행이요, 물이 바로 보살이다.  그래서 영원히 산다.
 
 
우리는 조금 베풀고 그가 보답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조금 남을 이롭게 하고 남이 나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속으로 화를 낸다.
 
주는 일 자체가 기쁨이요 그 기쁨 자체가 보답인데, 그래서 이미 받은 것인데
 
또 받을 생각을 하고 속을 끓인다.  어리석다.  그래서 보살되기도 어렵다.
 
그래서 나무처럼 오래 살지도 못하고 물처럼 영원히 살지도 못한다.
 
대숲의 바람 소리 물 소리 속에서 나무보살 물보살, 나무보살 물보살 되뇌인다.
 
 
 
 
 

 

 

 

 

도종환님의 산문집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 에서...

 

 

 

 

 

 

 

 

 

 

 

 

 

snow in March...

 

Snowy winters,
early morning meetings,
and brand n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