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Life/e—mid—monolog

바람에 띄우는 편지

by e-bluespirit 2006. 3. 23.

 

 

 

 

 
 
 
 
바람에 띄우는 편지
 
 
 
피어오르는 들국화 꽃망울 하나하나가 너무 앙증맞게 예뻐
 
손으로 만져보려다 손을 놓고 가만히 바라봅니다.
 
하루가 다르게 서늘해지는 밤바람을 견디고 참으로 의연하게
 
피어 있습니다.
 
이 들국화를 당신과 함께 바라볼 수 있다면 하고 생각했습니다.
 
들국화 짙은 향기를 맡다가 볼에고 머리칼에고 옷에고
 
들국화 향기를 잔뜩 묻힌 채 꽃 속에 함께 앉아 있고 싶습니다.
 
빨간 산수유 열매가 가을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며 익어가고 있습니다.
 
고추보다도 더 붉고 고추잠자리 꼬리보다도 빨간 산수유 열매를 따서
 
당신에게 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나는 산수유나무 아래에서 산수유 열매를 올려다볼 뿐
 
열매를 따지는 않았습니다.
 
 
금박을 입힌 책갈피 두 개를 샀습니다.
 
우리 한옥의 방문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는 단아한 책갈피의
 
문살을 가만히 손으로 밀고 그 안으로 들어가고 싶습니다.
 
책갈피 끝에는 노란색의 예쁜 매듭이 묶여 있는데,
 
하나는 내가 갖고 또 하나는 당신께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그 하나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보왕삼매론> 한 구절을 적어 편지 맨 끝에 추신으로 얹어
 
당신이 힘들어할 때마다 보내드릴까 생각했습니다.
 
깊은 깨달음에 이르게 해주는 불경의 금과옥조(金科玉條) 같은 글귀들이
 
한 번도 당신께로 가지 못하고 내 수첩에 적힌 채 묻혀 있습니다.
 
 
어라연 가는 길에 강가에서 아름다운 대나무 무늬가 새겨져 있는
 
돌 한 개를 주워 왔습니다.
 
그 돌 안에다 당신과 함께 고즈넉하게 바라보고 싶은 산천과 초목을
 
나 혼자 머릿속에 그려 넣으면서 앉아 있을 때가 있습니다.
 
이 돌을 당신의 집 안에서도 눈에 잘 띄는 곳에다 옮겨놓고 싶었습니다.
 
 
나는 당신을 향해 반 발짝 앞으로 나가 서 있습니다.
 
그러나 한 발짝을 더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려다 당신을 사랑할 자격이 없다는 걸 생각합니다.
 
사랑한다는 말 대신, 당신을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고 애틋하게 생각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지도 못했습니다.
 
몸과 마음을 다해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할까 하다 그만둡니다.
 
혼자 저녁 바람에 나부끼는 가을 억새풀을 바라보듯 당신을 바라볼 뿐인
 
내가 어떻게 당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늘 마음뿐인데 어떻게 사랑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편지를 써서 띄운들 당신이 어떻게 읽을 수 있겠습니까.
 
혼잣말로 쓰는 이 편지를 당신이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바람에다 띄워 보내는 이 편지를 당신이 어느 겁 어느 뒷세상에서
 
다시 받아보겠습니까.
 
이승에서는 함께할 수 없을 당신이여,
 
이 세상에서는 바람과 구름처럼 스쳐 지나갈 당신이여,
 
나 혼자 바라보다 갈 당신이여...
 
 
 
 
 
 
도종환님의 산문집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 에서...
 
 
 
 

 

 
 
 
 
 
 
 

 
 
Suites for 6 Cello Solo,No.3 IN C Major, BWV 1009

Johan Sebastian Bach(1675-1750)
Cello--Maurice Gendr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