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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irit/e—echo—bluespirit

참선수행

by e-bluespirit 2006. 9. 17.

 

 

 

 

 

 

 

 

 

 

수행의 길

 


조사선(祖師禪)의 수행/유진 스님

 

 

일반적으로 祖師禪이라면 唐代의 傑僧 馬祖道일(708~788)이 조사선의 정의라고 할 수 있는 「平상심시도」라는 주장처럼, 수행이 필요 없는 일상생활 그대로의 평상심으로 살아가는 종교로 안이하게 간주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

 

또한 「이 마음이 곧바로 다름 아닌 부처」라고 하는 「卽心是佛」의 주장은 이러한 생각을 한층 더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간주되어 왔다. 사실 唐代의 조사선에서는 마조의 설법에서 「도는 수행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道不用修)」라는 주장을 비롯하여,『보林傳』에서나 『임제록』에서도 「수행도 없고, 깨달음도 없다(無修無證)」이라는 주장을 강하게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언뜻 생각하기에는 수행과 깨달음의 사실을 완전히 부정하는 주장도 보인다.

 

그리고 『전등록』이나 당대의 禪語錄을 보면, 조사들은 대개 일상생활을 하는 가운데 깨달음을 체득하기도 하고 스승과의 일상 대화(禪問答)나 일상의 作務(勞動)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깨달음을 얻게된 機緣을 많이 전하고 있기 때문에 선수행의 기본이 되는 좌선의 실천은 하지 않았다고 간주되기도 한다.

 

사실 馬祖道一이 南嶽에서 부처가 되기 위해 좌선 수행을 하고 있을 때, 懷양禪師가 「그대가 좌선수행으로 부처가 되려고 하는 것은 기왓장을 갈아서 거울이 되도록 하는 것과 같다」고 좌선 수행을 실날하게 비판하고 있는 逸話에서 좌선 수행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몇 가지 특수한 경우의 事例와그 선문답에 대한 내용의 의미를 잘못 파악하여 조사선의 본질과 참된 수행 정신을 잘못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여기서 필자는 조사선의 본질적인 정신과 수행 체계를 올바르게 파악하여 이에 대한 오해와 실천 수행에 착오가 없도록 제시해야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제기하여 조사선의 수행체계를 논해 보고자 한다.

 

회향선사는 왜 좌선 수행하여 부처가 되려고 하는 마조의 좌선을 비판하고 있는가?

 

조사선에서 좌선 수행은 무의미한 것인가?

 

또한 마조는 왜 平常心이 道라고 하면서 「道는수행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道不用修)」라고 주장하고 있는가? 그가 주장하는 平常心은 어떤 마음이며, 平常心이 道라고 주장하는 그 의미는 무엇인가? 그러면 조사선의 수행체계는 어떻게 이루어 졌으며, 平常心이 道인 그 사실과 「도」는 수행이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그 사실을 어떻게 체득하여 그러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인가?

 

이상의 문제점을 중심으로 조사선의 기본 정신과 수행체계를 唐代의 禪어록 등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조사선의 기본정신- 平常心是道

 

조사선의 본질을 한마디로 「日常性의 종교」 혹은 「생활 속의 종교」 「자각의 종교」등으로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는데,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는 의미에서 먼저 馬祖道一이 주장한 「平常心시도」라는 조사선의 정의를 통해서 살펴보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한다. 「전등록」 제28권에는 馬祖道일의 「平常心시도」에 대한 설법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道를 이루는데 修行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다만 더럽히지(汚染) 않도록 해야 한다. 무엇이 汚染이 되는가? 生死의 마음을 일으키고 造作하여 趣向하려고 하는 것은 모두 汚染이 된다. 만약 곧바로 道를 알고자 한다면 「平常心이 바로 도」이다. 平常心이란 造作이 없고 是非도 없고 取捨도 없고 斷常도 없으며, 凡聖 등의 차별심, 분별심도 없는 그 마음이다. 經에 말씀하시길 「凡夫行도 아니요 賢聖行도 아닌 바로 그것이 善薩行이다」라고 말씀 하셨다. 다만 지금의 行住坐臥에서 환경에 순응하고 사물을 접하는 것(平常心)이 바로 道인것이다. 道는 즉 바로 法界인 것이며 恒河沙와 같은 미묘한 작용(妙用)도 이 법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대정장』 51권 440쪽, 上)

 

마조의 설법은 『전등록』과『어록』 등의 馬祖傳에 한결같이 전하고 있는 유명한 일단인데, 여기서 먼저 그가 주장하는 「平常心이 바로 도 라고 하는 「平常心」에 대해서 살펴보자, 마조의 설법에「平常心」이란 「수행하여 깨닫고 부처가 되려고 하는 造作된 마음이 없고, 옳고 그름을 시비하는 분별심도 없고, 좋은 것은 取하고 싫은 것은 버릴(捨)려고 하는 간택하고 선택하는 차별심도 없고 편견과 고정 관념의 마음도 없고 범부나 성인을 구별하는 차별, 분별심도 없는 本來心을 가르키고 있다.

 

『信心명』에서도 「지극한 道를 이루는데 조금도 어려울 것이 없다. 다만 取捨選擇하는 마음만 없으면 된다. (至道無난 唯嫌간택)』이라고 읊고 있는 주장과 똑같은 입장임을 알 수 있다.

 

어떠한 경계에서도 편견과 고정관념도 없고 일체의 차별 분별심도 일으키지 않는 이러한 인간의 근원적인 本來心을 마조는 「平常心」이라고 부르고, 이 平常心이 바로 道이며,平常心이 곧 다름 아닌 부처(卽心是佛)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 선불교의 사상적인 발전을 잠깐 살펴보면 하澤神會(684~758)의 南宗禪과 『六조단경』에서는妄念이 없는 無念의 眞여自性을 頓悟하도록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自性淸淨한 眞如自性과 번뇌의 妄念을 구분하는 입장에서 頓悟見性(自性)의 수행구조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마조는 이러한 眞如自性과 妄念을 구분하지 않고 이를 인간의 평범한 일상생활을 전개하는 平常心으로 통합하여 주장하고 이러한 平常心 이외에 달리 眞如自性이나 근원적인 마음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마조가 주장하는 「平常心」은 경전에서 주장하는 「眞如自성」이나 「自性淸淨心」인 인간의 본래심을 말한다. 이러한 사실을 『馬조어록』에 전하는 그의 설법을 통해서 확인해 보자.

 

또 질문했다. 「어떠한 견해를 지어야 도에 도달할 수가 있습니까?」

 

마조대사가 대답했다. 「自性은 본래 구족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善惡의 事象에 구애되지 않는다면 修道人이라고 할 수 있다. 善을 취하고 惡을버리며,空을 觀하여 禪定에 드는 것은 바로 造作하는 행위(業)이다. 게다가 다시 밖에서 道를 구하려 한다면 道와는 더욱 더 멀어질 뿐이다(『속장경』 119권, 406쪽 a 단)

 

마조가 주장하는 平常心은 인간 누구라도 본래 구족하고 있는 「自性淸淨心」이며, 인간의 근원적인 本래심을 인간의 평범한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그 본래의 마음(平常心)이라고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일상생활의 언어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인간의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平常心은 무한히도 충실하고 완전한 것이며, 더군다나 본래심이기 때문에 또다시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인간의 평범하고 소박한 그 마음인 것이다. 이러한平常心으로 살아가는 것이 다름 아닌 道이며, 근원적인 本來淸淨心인 平常心이 다름 아닌 부처(卽心是佛)라고 단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마조가 주장하는 「平常心」은 일체의 차별, 분별과 편견과 고정팔념을 완전히 탈피한 근원적인 인간의本來已,을 말하는 것이지, 일체의 경계에 끄달리며 분별과 차별 심에 떨어져 시기 질투를 일으키는 범부의 몰 자각된 衆生,已,을 지칭하는 말이 아님을 잘 알아야한다.

 

마조는 「道는 修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만 더럽히지(汚染) 않도록 하라 무엇을 汚染이라고 하는가? 生死의 마음을 일으키고 遣作된 마음으로 수행하여 부처가 되려고 하는 것은 모두 汚染이된다」라고 설하고 있다.

 

마조는 「平常毛셰 道」라고 주장하면서, 그러한 道의 생활은 汚染이 없는 平常,已,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마죠는 번뇌를 일으켰다가 없애고 하는 生毋已,, 차별심, 분별심이나 조작된 마음을 가르쳐 수행하여 도를 이루려고 하거나 부처가 되려고하는 모두 汚染이라고 말하고 있다. 汚染이없는 마음은 다름 아닌 청정한 本來已,인 것이며, 이러한 본래심을 「平常,山이라고 말하고 있다.

 

『傅飜』 제5권 慧能章에 「도는 마음으로 깨닫는것(道由,已,'h吾)」이라고 말하고 『祖堂巢』 제3권 동에서「無心이 바로 道(無心곶道)  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사실 道는 자각된 마음에 있는 것이지 어떤 외부적인 場所나 事象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근원적인 本來心으로 자각된 「平常,已셰 바로 道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본래심의 자각에 의해道가 이루어 지는 것임을 단적으로 제시하고 있는것이다, 이 自性淸淨心임을 전제로 하고 있는 표현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마주가 말하는 平舍心,은 단순한펌부의 몰 자각적인 衆生心을 지칭한 말이 아님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평상심을 자각하고 일상생활에 자유롭게 오염되지 않고 전개할 수 있는 입장이 되게하기 위해서는 수행을 하지 않고도 가능한 일인가? 汚染과 더불어 禪嫩의 修譜論으로 항상 문제가되고 있는 중요한 禪問答이 육조혜능과 남악회양과의 유명한 대화가 『傅燈롭氣』 제5권 有澱1稟讓章에는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六祖 : 「그대는 어디서 왔는가?」

회양 : 「嵩山에서 왔습니다.」

六祖 : 「어떤 물건이 이빻게 왔는고?」

회양 : 一令이라고 說{臥하여도 맞지(옳지)않습니다.」

六祖 : 「또 다시 修行하고 證牙룹해야 할 것이 있는가?」

회양 :「嶼聾證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더럽혀서(汚染)는 안됩니다.」

六祖 : 「단지 이 더럽히지 않는 것(不汚染)만이 諸佛이 凜念하는 것이다. 그대가 이미 이와 같구나 또한 이와 같다.」 『大正籤』 515권 240쪽 下)

 

이미 잘 알려진 유명한 六祖와 '稟讓과의 禪問答은 회양이 六祖戇能의 불법을 계승하게 된 근거가되고 있는 黴彖의 일단이기도 하다. 이 일단의 대화는 사실 마조계의 禪宗史害인 凜林傳』(801년 성립)에 최초로 등장하고 있는 것인데, 『祖堂集』 제3권 등에도 수록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회양이 「설사 한 물건(一輧)이라고 말해도 옳지 않습니머」라는 말은 불법의 본질을 직접 체득하여 자기 자신의 경지에서 자신있게 제시한 한 마디인 것이다 회양은 이 한마디로 六祖慧能으로부터 인가 받게 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말은『桎斟齊誼叭』 등 당대의 선 어록에 자주 인용되고 있으며,宋代에 재편된 『六祖壇經/서 혜능의 ,L,偈를 「本來無-令」로 고칠 수 있게 된 사상적인 근거가 되는 말이기도 하다

 

「說似一物卽不中」이라는 회양의 말이나, 「本來無-令」은 똑같은 의미로서 因綵으로 이루어진 일체의 모든 존재는 無常한 것이며, 결국은 本來의 空으로되돌아가는 필연적인 것이기에 어떤 고정된 존재로나 형체로서 이름 붙일 수가 없다는 입장을 말한다.이러한 本來麴一物의 경지를 깨닫고 제시한 말이다.『金剛經』에서 말하는 「고정된 정법이란 있을 수가없다(無有定法)」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다시 말하면 「本來撫?令」은 대승불교에서 주장하는 一셍皆空의 입장을 말한다 때문에 육조는 회양이 이러한 一셍皆空의 본질을 깨닫고 「說臥-物卽不中」이라는 질풍 같은 한마디에 곧바로 印찹河고 있는것이다.

 

그런데 혜능이 다시 「그러면 그대는 다시 修行하고 證斧屛해야 할 것이 있는가?(還可퓸釜람否)」 라고 재차 회양의 경지를 재확인하자, 회양은 「퓸聲證이 필요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더럽힘(汚染)이 있으면 안됩니다.」라고 대답하고 있다.그러자 혜능은 「이 不汚染만이 諸佛이 貢藻念하는것이다」라고 하면서 자네가 이미 이와 같그L 나 또한 이와 같다고 말하면서 재차 회양의 修證養!을 확실히認定하고 있다

 

 여기에는 혜능과 회양이 諸佛과 마찬가지로 不汚染의 修꼲을 체득하고 있음을 八祖慧能이 확인하여 확신시켜 주고 있는 일단인데, 不汚染의 修證觀은 어떠한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인가? 이것은 마주가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수행하여 도를 이루고 부처가 되려고 하는 조작된 마음과 生夕0已,, 차별심, 분별심,편견과 고정관념이 없는 근원적인 本來L,(平常,已,)으로 일상생활을 전개하는 그 마음을 말한다.

 

이러한 自性淸淨한 本來心은  깨달음을 체득하여 얻을 수 있는 마음이 아니라 인간 각자가 본래 구족하고 있는 근원적인 마음이기에 「도는 수행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본래심(평상심)을 오염하지 않도록 하라'」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육조혜능도 「汚染되지 않는 수행과 깨달음(修證)」을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마조의 「平雷,已,이 道」가 되는 조사선의 일상생활의 종교는 이러한 汚姜徒없는 청정한 本來의 平常,已,으로 일상생활을 지혜롭고 무애자재하게 전개하는 자각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지 범부의 몰자각적인중생심이 아님을 잘 알아야 한다

 

 그러면 이러한 平常心으로 깨달음의 지혜로운 道의 생활을 전개하는 조사선의 汚染없는 수행과 깨달음은 어떻게 체득해야 하는가? 조사선의 수행과 실천구조를 語錄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조사선의 기본 정신은 자각된 근원적인 平常,已,(本來已,)으로 일상생활을 일체의 경계에 浬尊昱되거나걸림 없이 지혜롭게 살아가는 생활종교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조사선에서 말하는 禪이란 다름 아닌 平常,已,으로 일상생활을 자유롭고 지혜롭게 살아가는고 전부를 말한다. 말하자면 禪은 平常心이 바로 다름 아닌 道」인 그 생활이며, 이 깨달음의 平常心으로부처의 경지를 전개하는 「卽心是佛」의 세계를 구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일체의 경계에 끄달림이 없고 차별심, 분별심, 번뇌가 없는 本來心 즉 汚當葯없는 자각된 平常,已,으로 무애자재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체득해야 이러한 「平常心是道」와 「卽,已,是矛衆」의 선의 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범부의 차별 심과 분별심으로 얼룩진 汚染된 衆生毛,으로는 결코 이러한 平常心으로 일상생활의 종교를 전개할 수가 없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들 자신을 번뇌의 소용돌이 속에 몰아 넣는 헛된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좌선을 통해서 각자가 본래심으로 되돌아가 참된 자아를 깨닫고 지혜롭게 창조적인 삶의 시간으로 활용하게 하자.

 

 

 

http://jeonggak.dongguk.edu/

http://jeonggak.dongguk.edu/doryang/doryang.asp

http://jeonggak.dongguk.edu/dr/dr_49/990749.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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