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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irit/e—cr—life

면절 面折

by e-bluespirit 2013. 10. 12.











< 면절(面折) >    

친구를 공경하거나 임금을 공경함에는 
면절을 해야 한다. 
잘못하면 야단쳐야 한다.

야단을 치지 못하고 술만 얻어먹고 
감투만 얻어 쓰면 
정말 바른 정사는 해나갈 수 없을 것이다. 

(씨알의 메아리 다석 어록. 131쪽)


< 풀이 >
사람을 만날 때는 누구든 공경하는 마음으로 만나야 한다. 함석헌 선생이 무교회 신앙 동지인 송두용 선생을 만날 때면 70 이 넘은 나이에도 서로 큰 절을 하고 “선생님 그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하며 정중하게 인사하고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러나 서로 문제를 느꼈을 때는 면전에서 꾸짖는 사이였다고 한다. 친구 사이에도 정중하면서 엄격해야 정말 친구가 되고 친구 노릇을 할 수 있다. 아첨하며 얼굴을 비비대기만 하면 참된 친구가 될 수 없다. 

옛날에는 임금과 신하 사이에도 면절을 해야 참된 신하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임금을 아무리 공경하더라도 임금이 잘못된 길로 갈 때는 충신은 목숨을 걸고 임금을 야단쳐서 바로 잡아야 한다. 그렇지만 아무나 임금을 야단칠 수 없다. 임금 앞에서 임금을 야단칠 수 있는 신하의 자격은 무엇일까? 나라와 임금을 위해 목숨을 내놓은 사람, 사심과 당파심을 철저히 버린 사람이다. 제 욕심과 당파심에서 임금을 야단치는 신하는 역적이다. 조금이라도 사사로운 생각에 사로잡히거나 우쭐하는 마음에서 친구를 꾸짖는 사람은 어느 누구의 친구도 될 자격이 없는 인간이다. -박재순 




사람의 생각이 싹튼 자리

왜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가 되었을까? 원시 인류발달사에관한 텔레비전 프로그램(National Geographic)을 보다가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남의 상처와 질병을 보살피고 돌보게 됨으로써 사람의 수명은 크게 늘어났고, 남을 헤아리고 보살피느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적을 공격할 수 있는 무기가 몸에 없는 사람은 생각하고 말로 지혜를 나누고 서로 힘을 모아서 적을 막고 위기를 극복해 왔다. 말로 소통하고 서로 도움으로써 인류는 오늘의 문명을 쌓았다. 사람이 잔인하고 이기적인 듯이 보여도 몸의 속에 역사의 바닥에는 서로 살림의 힘과 지혜가 숨어 있지않을까?

남을 헤아리고 보살피는데서 생각이 싹텄다면, 생각의 뿌리는 더불어 삶이고 생각의 꽃과 열매는 서로 살림이다. 생각은 평화를 낳자는 것이다. -박재순







<몸의 부활>  

(자유와 정의를 위해) 죽는 그들은 그 몸이 죽겠지만 그들을 죽이고 남는 너와 나는 정신이 죽어버립니다. 몸이 죽는 사람은 죽으면서도 정신을 차리면 새 몸으로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신이 죽어버리면 영원히 전체가 망해버립니다. 예수는 죽었지만 부활했습니다. 베드로로, 요한으로, 바울로, 억만 신자로 부활했습니다. 

살아 있는 인간은 그 몸을 부활하려는 생명에 몸으로 제공할 의무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자유와 정의를 위해 죽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부활하려 날아 나오는 영을 내 속에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그도 살고, 나도 살고, 전체가 삽니다. 그러나 보고 있는 우리의 정신이 죽어 그 영을 받아들일 줄 모르면 이 나라는 살 길이 없습니다. “밤 숨을 끊지 마라”,  함석헌전집 8권 141~142쪽.


< 풀이 >
예수의 부활은 예수의 죽은 시체가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니다. 예수의 몸 생명은 죽고 얼 생명은 죽음을 넘어서 다른 사람들의 몸과 삶 속에 살아난 것이다. 자유와 정의를 위해 죽은 사람은 몸이 죽겠지만 정신은 죽지 않고 살아난다. 의인을 죽인 사람이나 의인의 죽음을 외면한 사람의 몸은 살겠지만 정신은 죽는다. 몸은 살아도 정신이 죽으면 결국 죽는 것이다. 개체는 살아도 전체는 죽음의 운명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몸은 죽어도 정신이 살면 그 정신은 다른 사람의 몸을 통해서 살아서 전체 생명을 살려갈 수 있다. 

그러므로 전체를 살리려는 사람, 영원한 생명을 살려는 사람은 정의를 위해 죽는 사람의 부활하려는 영을 제 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죽은 의인의 영을 몸으로 받아들여야 의인도 살고 나도 살고 전체가 산다. 우리의 정신이 살아 있으면 죽은 의인의 영을 외면하지 않는다. 우리의 정신이 죽어 의인의 영을 받아들일 줄 모르면 이 나라는 살 길이 없다. 지난 역사를 돌이켜 보면 전체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바친 의인과 의인의 영을 받아들인 사람들에 의해서 이 나라가 지탱되고 이어온 것을 알 수 있다. -박재순





 
어린이에게 배울 것

나이 들수록 얼굴이 굳어지는데
어린이처럼 잘 웃었으면 좋겠다.
삶에 지쳐 주눅든 얼굴이 아니라
삶의 기쁨이 솟아 나는 얼굴
생기가 넘치면 좋겠다.

언제부터인가 마음이 굳어져서
울음을 잃어버리고 사는데
어린이처럼 잘 울었으면 좋겠다.
슬퍼서 울어야 할 때도
실없이 웃는 못난이가 아니라
가슴이 저며 올 때는 흐느껴 울고
세상일이 안타깝고 분할 때는
온 몸이 울리고 하늘과 땅이 울리게
울었으면 좋겠다.

어린이는 더불어 사는 이
엄마, 아빠 없이 못 살고
친구 없이도 못 산다.
'너' 없으면 '나'도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는 이다.
어린이는 '얼-인-이', '얼을 인 이' 아닌가?
늘 어버이를 생각하고
하늘을 향해, 내일을 향해 
열려 있는 이 아닌가?

-박재순





 

세포 탄생의 비밀: 서로 살림과 함께 삶

생명체는 뛰어난 상생의 능력을 지녔다. 37억년전 생명체가 처음 생겼을 때, 수소를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는 박테리아들이 주로 활동했다. 그러다 산소를 에너지원으로 활동하는 강력한 호기성 박테리아들이 생겨나서 수소에 의지하는 혐기성 박테리아들을 잡아먹었다. 

혐기성 박테리아들은 몰살 위기에서 집단적으로 뭉쳐서 점막을 둘러쓰고 하나의 세포가 되었다. 세포핵이라는 유전자 정보를 지닌 데이터 뱅크가 되었다. 이 세포핵들이 강력한 호기성 박테리아들을 받아들여서 공생하게 되었다. 세포 속으로 들어온 호기성 박테리아들은 미토콘드리아들로서 세포핵의 주위에서 세포핵의 지시와 명령에 따라서 세포를 위해 강력한 활동을 한다. 생명의 놀라운 공생, 창조의 활동을 본다.

우리 몸의 세포와 조직들은 얼마나 놀랍게 상생의 삶을 펼치고 있는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예수 안에서 욕심과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상생의 생명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구원이고 보람이며 기쁨이 아닐까? 자기 안에 갇혀서 자기도 남도 해치는 어리석고 악한 삶에서 벗어나 달린 것이다.

생태계 위기와 사회 양극화로 공동체가 파괴되고 정신은 황폐하고 무기력해졌다. 지나친 생존경쟁으로 사회적 갈등과 대결의 골이 깊다. 오늘 우리 사회가 구원받는 길은 무엇일까? 가난한 민중이 함께 모여 협동하는 공동체를 만들고 그 공동체 속으로 반민중적인 특권층을 끌어들여 상생평화의 사회를 만들 수는 없을까? 태고의 박테리아들이 생명세포를 만들어낸 것처럼! -박재순






 < 10월 씨순길, 화석정과 임진강길 >


일시 : 2013년 10월5일(토) 10:00

공덕역 출발(10:30) - 문산역(11:25) - 점심(11:30~12:30) - 율곡2리(13:20) - 화석정(13:40) - 장산전망대(15:00) - 황금벌판 논뚝길 - 임진강역(17:00) - 파주 생각의 집(18:30) 


1. 오늘의 씨순길

화창한 날씨입니다. 하늘은 높고 푸릅니다. 나무그늘 아래 서늘하고 상쾌한 가을기운이 온몸을 휘 감지만 황금벌판을 걸으며 온몸으로 받는 투명한 햇빛은 제법 순례자의 땀을 흐르게 합니다. 짙푸른 하늘, 황금빛 벌판, 검푸른 숲, 순례를 마치고 파주 “생각의 집”으로 향하는 길에 만난 불타는 듯 붉은 노을, 원색의 자연을 만나며 일이관지(一以貫之)하시는 하느님께 찬미가 절로 나옵니다. 


2. 화석정에서

화석정은 율곡의 유적지입니다. 율곡리는 율곡선생의 선조들이 대대로 살던 터전으로 율곡이라는 호(號)도 동리 이름에서 따온 것입니다. 그러나 율곡이 태어난 곳은 외가댁 신사임당의 고향 강릉 오죽헌입니다. 율곡이 화석정은 짓고 선조의 몽진 길에 임진강나루를 건너는 물길을 밝히기 위하여 화석정을 태웠다고 일부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만 사실 화석정은 율곡의 5대조 이명신이 지었으며 율곡이 돌아가신 해가 임진란 10년 전이니 불태운 이도 다른 사람입니다. (보내드린 안내 글의 해당 부분을 정정합니다.) 


3. 장산리 전망대에서

장산리 전망대에서 가까이 임진강의 유일한 섬 초평도의 평화로운 풍경과 멀리 그러나 청명한 날씨 덕에 뚜렷한 스카이라인의 개성 송악산과 개성공단 등 북녘의 땅과 하늘을 조망하고 한적한 아스팔트길 시원한 소나무 그늘 아래 앉았습니다. 그리고 “생각이란 무엇인가?” 생각하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뇌과학에서 인간의 의사결정은 95% 무의식에서 일어나며 평소 무의식이 설정치(default)로 뇌를 지배하며 의식은 필요할 때 제한적으로 작용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많은 생각을 하며 사는 것 같지만 사실 아무런 생각 없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평소 우리 의식은 주체적 이성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의 결정을 합리화하는 종속적인 기능을 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생각하는 씨알이 되어야 합니다. 


4.장산리 마을휴게소에서 

해마(海馬)는 수컷이 출산합니다. 수컷은 육아주머니를 가지고 있는데 암컷이 그곳에 산란합니다. 수컷은 난자를 받아 육아주머니에서 키워 출산합니다. 우리 머리(腦)에도 해마가 있습니다. 5cm 정도 길이로 측두엽 양쪽에 2개 있습니다. 좌측 해마는 최근의 일, 우측 해마는 태어난 이후의 모든 일의 기억과 관련 있습니다. 

우리는 기억과 망각의 상반된 기능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기억이 없다면 학습, 사고(事故), 추론도 불가합니다. 기억이 없다면 역사도 없고 미래의 설계도 없습니다.  또한 망각이 없다면 과거의 고통스런 경험이나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고 용서나 관용도 없으며 새로운 변화에 적응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겐 잊어서는 안 될 “뼈에 새겨진 역사”가 있고 말끔히 잊어야할 갈등과 증오와 동족상잔(相殘)의 깊은 상처가 있습니다.


5. 파주 생각의 집에서

순례가 끝나고 대부분의 회원은 파주 “생각의 집”으로 갔습니다. 생각의 집에는 동광원에서 오신 귀한 손님이 계셨습니다. 잠시 후 그 분들이 떠난 뒤 자연스레 무소유와 선행과 금욕의 성자 이세종과 이현필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두 거목에 대한 한국 기독교 사상사(思想史)적인 평가가 없는 일을 개탄하며 또 탐욕과 물질만능의 현실 속에서 동광원의 고결한 믿음의 맥(信脈)이 끊이지나 않을까 걱정도 하였습니다. 

이세종은 한국의 호세아 또는 성 프란체스코로 불립니다. 그의 부인은 가출외도를 반복하였지만 그는 언제나 부인을 오누이처럼 보살폈고 또 돌아올 때 마다 따뜻이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부인은 이세종이 숨질 때 비로소 그는 성자였노라 고백하였습니다. 소크라테스나 톨스토이는 부인에게 악처라는 낙인만 받게 했을 뿐 이세종과 같이 부인의 고백이나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동서양 성인열전을 읽을 때마다 청렴 고결한 그들의 삶은 우리로 하여금 찬탄과 공경의 마음을 갖게 합니다. 그러나 한편 절망감과 자괴감을 갖기도 합니다. 우리 일반 씨알 생활인은 그렇게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에 대하여 절망하거나 자괴할 필요는 없다고 고쳐 생각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가난과 결혼”하거나 “가난을 목표” 로 금욕과 절제만의 삶을 살 수 없는 일이며 또 모든 사람이 오로지 그런 삶만을 추구하며 살아서도 안 되기 때문입니다. 

선박에 비유한다면 그 분들과 같은 성인의 빛나는 영성은 방향타와 같아 선박을 바른 방향으로 인도하지만 선박이 성공적인 항해를 하려면 추진력을 내는 엔진도 있어야 하고 화물을 안전하게 적재할 수 있는 선창도 있어야 합니다. 

엔진과 선창은 씨알 일반인의 영성입니다. 선박의 목적은 선창에 화물을 싣고 나르는 일입니다. 선창에 화물을 채운 후에는 선박을 항진시킬 힘을 내는 엔진이 있어야 합니다. 선창은 일반인의 사사로운 일상 영역이며 엔진은 나라나 사회나 직장에서의 공공 영역입니다.

‘국가‘ 또는 세계라는 공동체가 성공적인 항해를 하려면 다양하고 건강한 다원적인 영성이 필요합니다. 유영모와 함석헌 이세종 이현펼 그 밖 많은 동서고금 수도자의 영성도 필요하고 우리와 같은 일반 생활인의 영성도 필요합니다. “성공에 우쭐하거나 교만하지 않고 실패에 주눅 들거나 좌절하지 않는” 내면의 힘을 갖게 하는 영성이 우리 생활인에게 필요합니다. 

얼마 전 법정에서  “늙으면 죽어야 돼!”하며 나이든 피고에게 막말하였던 판사가 이번엔 “여자가 말이 왜 많아!” 하여 말썽 되었습니다. 판사는 관(官)이며 피고는 민(民)입니다. 과거에는 관민(官民)이 남녀(男女)가 수직이었지만 지금은 민관(民官) 녀남(女男)의 수평관계로 바뀌었습니다. 

사회구조도 피라미드에서 매트릭스로 변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목표지향적인 남성적 리더십이 사회를 이끌었지만 지금은 관계지향적인 여성적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아내를 소유하지 않고 수평의 동반자로 오누이로 함께 산 성자 이세종(1889~1942)은 씨알의 삶을 살다 갔습니다. 부지런하고 성실한 머슴살이로 남부럽지 않은 살림을 일구고 가난한 집안의 어린 처녀를 아내로 맞았지만 그의 수도자적인 삶은 아내로 하여금 출가외도를 반복하게 했습니다.  

용서가 없다면 사랑이 아닙니다. 그는 부인을 용서하고 또 용서했습니다. 아내의 외도를 참지 못해도 자기 누이라면 그 어떤 허물이라도 다 덮는 것이 일반인들의 인지상정(人之常情)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오누이가 된다면 서로 용서 못할 잘못이 세상에 없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오누이가 된다면 이세종과 같은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세종의 삶을 통해 보니 우리는 다석이 51세에 해혼(解婚)한 뜻을 알 듯 합니다.

6. 마무리

걸으며 또는 앉아서 씨순길 회원들이 나눈 이야기를 가급적 많이 담으려다 보니 장황해 졌습니다. 그러면서도 많은 화두가 빠졌습니다. 아무래도 개인인 보고자(報告者)의 기억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씨알재단의 홈페이지, 공동체 카페, 메일이나 문자 기타 SNS를 통하여 이야기를 이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씨순길 회원 모두에게 감사와 존경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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