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석 유영모를 다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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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석과 제자들
다석(多夕) 유영모(柳永模, 1890~1981)는 인도의 간디와 견줄만한 `큰 사상가` 로 평가 받는다. 그러나 평생 나서기를 꺼려하며 수도(修道)와 교육에만 힘쓴 `은둔자` 로 산 탓에 그의 사상은 지금껏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오히려 함석헌.김교신의 스승으로 더 알려져 있다.
다석은 서른여덟살이던 1928년부터 YMCA 연경반(硏經班)을 지도하며 가르침에 나섰다. 35년간 지속된 이 강좌를 통해 다석은 기독교와 불교.유교.노장사상 등 동서고금의 종교와 철학을 아우르는 독특한 사유체계를 이룩한다. 그를 한국 종교다원주의의 시발점으로 보는 이유다. 지난 13일은 그가 탄생한 지 1백11주년이자, 그의 제자 함석헌의 탄생 1백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를 계기로 중앙일보는 다석의 사상과 족적을 재조명하고, 다석이 후대에 미친 영향을 재평가하는 시리즈를 다섯 차례에 걸쳐 싣는다.
다석의 가르침에 깊은 영향을 받은 1세대 제자들은 네댓명 정도다. 나이로는 11년 차이지만 3월 13일 생일이 같은 씨알 함석헌(1901~1989)이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다. 다석은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 교장으로 있을 때 함석헌을 처음 만났다. 1922년 다석의 나이 서른 두살 때로 함석헌은 이 학교 3학년 편입생이었다. 다석이 보기에 이 때 함석헌은 비범한 데가 있었던 모양이다. 함석헌은 당시 회고담에 "내가 이번에 오산에 왔던 것은 함 자네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였던가 봐" 라고 했다고 적었다. 함석헌에 대한 다석의 지극한 관심이 드러나는 일화다. 다석이 오산학교를 그만두고 떠날 때 역까지 가방을 들고 배웅했던 것도 함석헌이었다. 이 때 헤어졌던 두 사람은 해방이후 함석헌이 월남(47년)하면서 서울에서 재회했다. 함석헌은 다석의 제자 중 가장 유명한 사람임에 틀림없지만 다석이 가장 아낀 제자는 따로 있었다. 김교신(1901~1945)이었다. 김교신은 일제시대 양정고등보통학교(지금의 양정고)교사로 있으면서 『성서조선(聖書朝鮮)』 등을 간행한 무교회주의자였다. 김교신은 함석헌과 동경(東京)고등사범학교 동기동창이다. 다석은 『성서조선』에 기고하면서 김교신을 알게 됐다. 그는 김교신의 사람 됨됨이에 매료돼 평소 가장 신뢰할 만한 제자로 생각했다. 다석은 "사람은 죽었다 살아나야 진정한 삶을 깨닫는다" 며 56년 4월 26일 자신의 상징적 죽음의 의식을 갖는데, 이 날짜를 잡은 것도 김교신이 죽은 날(4월 25일)을 의식해 그 다음날로 택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김교신을 배려하는 마음이 컸다.
다석의 애제자 중 아직 살아서 맹렬히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 사람은 김흥호(82)와 박영호(67)다. 20대에 다석을 만난 김흥호는 지금도 다석을 닮고자 하루 일식(一食)을 실천하고 있는 `산 다석` 같은 사람이다.다석이란 호는 그가 하루에 한끼 저녁만 먹는다는 뜻이다. 이화여대 교수 및 교목실장을 지낸 그는 지금도 매주 이화여대 교회 주일학교에서 다석의 가르침(동양고전과 성경)을 가르치고 있다. 벌써 30년째. 수강생 중에 현직 대학교수들도 많다. 다석사상연구회를 이끌고 있는 박영호는 1세대 중 막내다. 59년부터 81년까지 20여년간 다석을 가장 가깝게 모신 사람으로 `마침보람(졸업증)` 까지 받았다. `농사를 짓고 살아야 한다` 는 가르침을 받들어 경기도 의왕시에서 농사를 지으며 다석의 사상을 집성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
10년전 성천문화재단을 설립해 다석 사상을 전수하는데 힘쓰고 있는 류달영도 직접 다석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이밖에도 다석으로부터 가르침의 세례를 받은 사람은 수다하다. 대한적십자사 서영훈 총재, 숭실대 안병욱 교수를 비롯해 김홍근 등 다석사상연구회의 멤버들, 사상적 재조명 작업에 앞장서고 있는 외국어대 이기상.가톨릭대 정양모 교수 등도 넓게 보아 제자들이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소중한 제자들은 그 가르침을 귀담아 들고자 지금도 배움터를 찾고 있는 `씨알(민중)` 들이다. 13일 1백11주기 기념식은 그런 씨알들이 모여 뜻을 기리는 정말로 조촐한 행사였다.
2. 그들의 실천궁행
지난 19일 오후 2시 경기도 벽제의 웃골(上谷)에 있는 신앙과 사랑의 공동체 동광원(東光園)` 에서는 조촐한 추모행사가 열렸다. 이 공동체를 있게 한 `맨발의 성자` 이현필(1913~64) 선생의 37주기를 기념하는 자리였다. 이현필은 일생 거지나 병자와 함께 살다 병으로 숨져 `한국의 성 프란체스코` 로 불린다. 이 자리에는 박공순(71) 할머니(흔히 수녀로 불린다) 등 여덟명의 이곳 식구와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목회자들, 그리고 `풀무원` 의 창업자인 원경선씨, 서경원 전 국회의원 등 50여명이 참석했다. 이현필의 애제자로 그의 생활철학인 순결.청빈.순명(順命)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총각` 김준호(76)씨의 모습도 보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토착신앙 공동체인 동광원은 50여년 전 스승 이세종의 뜻을 받들어 이현필이 만들었다. 고생을 복으로 알고 살며 봉사를 실천하는 노동 수도(修道)단체다. 이현필의 뜻을 따라 이런 삶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현재 전국적으로 50여명에 이른다. 이같은 실천적 사랑의 중심인물, 즉 정신적 지주가 다석 유영모다. 다석은 해방 직후인 1948년 이현필을 만나 서로 감화를 주고받는 선후배이자 동료가 됐다. 다석은 1년에 한두번씩은 전국에 산재해 있는 동광원을 돌며 설교를 하곤 했다. 벽제의 동광원도 예외는 아니어서 지금 있는 할머니 중에도 그때를 기억하는 이가 많다. 박공순씨의 회고다. " `철학박사님` 이어서 말씀이 어려웠지요. 그래도 열심히 설교를 듣고 나면 나중에 그 말씀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어요. 말씀이 힘찼는데, 특히 문자 한자 가지고 뜻풀이를 많이 해주셨습니다.
" 당시 수녀들은 다석을 `진달래 할아버지` 라 불렀다. 다석은 `아름답게 피기보다 지는 데 보람을 두는 꽃 같다` 며 진달래를 유독 좋아했는데, 이현필은 다석의 그 `진달래 정신` 이야말로 수녀들이 본받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석은 이들의 묵묵한 실천을 독려하는 뜻에서 가산도 쾌척했다. 서울 구기동의 집을 판 돈으로 광주시 동광원 본원(지금의 귀일원)에 있는 `진달래교회` 를 짓는 비용과 1만평의 터를 마련해 준 사람이 다석이었다. 다석과 이현필의 맥은 오북환(93.장로).김준호씨를 비롯해 김준(75).김정호(71.전 목포대 교수)씨 등으로 퍼져나갔다. 특히 박정희 정권 시절 새마을지도자연수원 원장을 지내는 등 실질적인 책임자였던 김준(전 전남대 교수)은다석으로부터 `농촌으로 돌아가야 한다` 는 정신을 배웠다. 이 때문에 원시 새마을운동의 사상적 원류를다석에서 찾는 사람도 있다. 이같은 사회적 실천 못지 않게 다석은 `인간됨` , 즉 도(道)를 향한 금욕수행에서도 본보기를 보였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그의 금욕정신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 사람이 김흥호(82.전 이화여대 교수)씨다. 김씨는 "그저 선생을 흉내낼 뿐" 이라고 겸손해 하지만 그 지극한 정진은 산란한 현대인들에게 경종이 될 만하다.
다석은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네가지 독소, 즉 탐욕과 치정(癡情).진에(瞋□.지식욕).허위(虛僞)를 끊기 위해서는 하루 한끼 먹고(一食), 정욕을 참고(一言), 바로 앉으며(一坐), 거짓이 없어야 한다(一仁)고 말했다. 다석은 인간의 하루살이 일생은 이처럼 늘 같아야 한다는 뜻에서 오늘을 `오! 늘` 이라 풀이했다. 김흥호는 다석의 `오!늘`이라 풀이했다. 김홍호는 다석의 오!늘사상` 을 생활 속에서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3. 종교 다원주의
다석 유영모는 기독교에서 출발해 동양의 유.불.선 삼교를 깊게 공부한 사람이다. 때문에 그의 종교관은 다원주의를 지향한다. 그는 성경에 밑줄을 긋고,점을 찍고, 주(註)를 붙이며 정독하면서 한 구절 한 구절 속이 시원하게 뚫려야 비로소 수긍했을 정도로 해석에 철저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해석학적 반성의 과정을 거친 것이다. 이를 통해 그가 도달한 결론은 `기독교를 동양적으로 체득해야 한다` 는 것이었다. 다석은 십자가에서 유교의 핵심인 효(孝)사상의 극치를 보고, 기독교를 부자유친(父子有親)의 완성태라고 생각했다. 그는 십자가의 보혈(寶血)을 믿기만 하면 은혜를 얻는다는 공짜 구원을 사절하고, 동양적인 도(道)의 실천 없이는 한국에 기독교가 뿌리내릴 수 없다고 확신했다.
다석은 신약(新約)을 읽으면서 예수가 가르친 진리의 핵심을 이해하기 위해 자연스레 구약(舊約)을 함께 보았다. 그러나 동양인인 그는 유대인들의 구약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그는 사서삼경, 불경, 노자.장자를 읽은 뒤 예수의 복음을 보고 비로소 하느님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다. "내가 마음에 모시는 스승은 예수이다. 어느 새해 아침에 스승에게 세배 드리러 갔더니 예수님이 공자.부다.노자.소크라테스 등 선배들과 즐거이 덕담을 나누고 계셨다. 가서 스승께 절을 하고 그냥 나올 수가 없어서 친구분들께도 모두 절을 올렸다. " 그는 이렇게도 말했다. "내가 성경만 먹고사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유교나 불교 경전도 먹는다. 사람이 구차하니까 제대로 먹지 못해서 여기저기서 빌어먹고 있다. 그래서 희랍의 것이나 인도의 것이나 다 먹고 다니는데 그렇다고 해서 내 `맷감량` (위장의 소화능력)으로 소화가 안 되는 것도 아니어서 내 건강이 상한 적은 거의 없다. "
지난 20여년 동안 신학의 새로운 관심사는 단연 종교다원주의다. 이는 기독교가 타종교들보다 질적으로 우월하다거나 예수가 다른 성현들보다 탁월하다는 식의 생각을 뛰어넘어, 구원자는 교회도 예수도 아니고 오직 하느님 한분뿐이라는 개방적 종교관이다. 하느님 홀로 구원자이기 때문에 예수는 구원의 여러 중계자 중의 한분이며, 세계의 지각 있는 종교들은 모두 하느님의 구원을 다양하게 표현하고 전달한다고 보는 신(神) 중심의 종교관이다. 일찍이 가톨릭계의 대표적인 신학자인 정양모 신부(성공회대 교수)는 다석의 사상에서 이런 면모를 발견했다. 그는 「다석 유영모 선생의 신앙」이란 논문에서 "놀랍게도 다석 선생은 22세인 1912년에 이미 비정통 신앙으로 종교다원주의적 입장을 취했으니, 오늘날의 종교다원주의자들보다 실로 70여년을 앞선 셈이다. 앞으로 다석 사상 연구가 진척되어 널리 알려지면 세계 신학계가 놀랄 날이 반드시 오리라고 확신한다" 고 말했다. 강남대 신학과 심일섭 교수도 "아마 21세기가 다 가도록 한국 신학계가 유영모의 경지를 뛰어넘기는 힘들 것" 이라고 말했다.
4. 우리것으로 사유하기
다석 류영모는 우리 말로 사유한 세계적인 사상가다. 다석은 유럽이라는 절대중심에서 벗어나 지구 위의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더불어 살아갈 삶의 원칙을 찾는데 일생을 바쳤다. 지금은 온갖 이념과 세계 종교가 뒤섞여 공존해야 하는 다원주의 시대를 살아갈 새로운 삶의 문법을 필요로 하는 시점이다. 다석은 바로 그 해법을 찾아 평생 유(儒).불(佛).선(仙) 3교와 그리스도교 사상을 아우르는 통합적인 사상을 찾아내려고 애쓴 `지구촌 시대` 의 사상가다. 다석은 이러한 세계철학적인 문제를 풀어갈 해결의 실마리를 바로 한국인의 영성적 심성, 자연친화적 생활방식,통합적 사유의 얼개, 우리말의 상생적 문법 속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다석에 의하면 말을 보이게 하면 글이고, 글을 들리게 하면 말이다. 말은 하느님의 `마루뜻` (宗旨)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고, 글은 하느님을 `그리는 뜻` (思慕)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말 속에서, 말을 건네오는 하느님의 소리를 귀기울여 듣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래야만 좋은 문학, 좋은 철학이 나올 수 있다. 지금같이 남에게서 얻어온 것, 즉 외국어를 갖고서는 우리의 사상을 키워나갈 수 없다. 다석은 "글자 한 자에 철학개론 한 권이 들어 있고 말 한마디에 영원한 진리가 숨겨져 있다" 고 생각했다.
다석은 우리말 속에 녹아들어 있는 천지인(天地人) 합일의 세계관에 주목한다. 다석의 우리말을 바탕으로 한 이러한 사색이 돋보이는 곳은 무엇보다도 그의 인간에 대한 정의이다. 우리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아무 생각 없이 서양인들이 우리에게 심어준 대답인 `이성적 동물` 을 되뇌인다. 이러한 정의에 반대하여 독일의 현대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인간을 `세계 안에 있음(세계-내-존재)`이라 규정했다. 그러나 다석은 인간을 사이에 던져져, 사이를 살아가고 있는 `사이-존재(사이에-있음)` 로 본다. 즉 `하늘-땅-사이` (天地間)에서, `사람-사이` (人間)에서, `빔-사이` (空間)에서, `때-사이` (時間)에서 그 사이를 이으며 사이를 나누며 살고 있는 `사이-존재` 로 보았다.
다석은 `사이에 있는` 인간을 그 사이에 따라 네 가지 차원으로 구별하여 다룰 수 있다고 본다. `빔-사이`를 차지하고 있는 몸으로서의 `몸나`는 나의 전부가 아니다.`사람-사이`를 오고가는 마음으로서의 `맘나` 도 나의 전부가 아니다. 시간 속에 살며 `때-사이`를 잇고 있는 역사적 주체로서의 `제나`도 나의 전부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하늘과 땅 사이를 잇고 있는`얼나` 로서의 나야말로 `참나` 다. 인간을 이렇게 `사이-존재` 로 본 한국인의 생활 세계를 보이게 보이지 않게 규정해온 한국인의 삶의 심층 문법은 한마디로 `살림살이` 이다. 우리말의 살림살이에는 살리는, 다시 말해 죽지 않도록 감싸주고 보살피는 삶의 방식을 가장 중요한 생활 자세로 본 우리 선인들의 삶의 철학이 배어 있다. 온 지구인이 다석과 더불어 `우주적 살림살이` 의 정신으로 지구 살림살이에 동참한다면 새천년 인류의 평화로운 `더불어 삶` 은 가능하다.
5·끝 다석과 함석헌…
다석 유영모와 제자인 함석헌을 잇는 상징적인 가교(架橋)는 씨알사상이다. 그러나 씨알사상의 씨가 다석에게서 싹을 틔웠음에도 불구하고 제자가 너무 승(勝)한 나머지 세상 사람들에게는 ‘씨알사상=함석헌’으로 각인돼 있다. 함석헌의 호가 씨알인데다 그가 농사를 짓던 천안의 농장(씨알농장)과 잡지(씨알의 소리)의 이름에도 씨알이란 단어가 빠지지 않고 등장하기 때문이다.우선 씨알의 뜻에 대한 함석헌의 회고와 풀이를 들어보자.“오늘 씨알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그것에 대해 좀 설명을 부득이 해야겠습니다.… 씨알이란 흔히 쓰는 말로 하면 백성이란 말인데 요새 말로 민중이요 영어로 하면 피플(People)입니다.이를 순 우리말로 해 보자는 것입니다.”(『씨알의 소리』 1980년 5 ·6월 합병호)
이러면서 함석헌은 그 유래를 이렇게 설명했다.“그런데 그것도 내가 시작한 것도 아니고 유영모 선생님이 옛날 유교 경전 중의 대학(大學)이라는 책을 풀이해 가르쳐주시면서 ‘대학지도 (大學之道),재명명덕(在明明德),재친민(在親民),재지어지선(在止於至善)’에서 재친민의 민을 번역하다가 민이란 뜻의 순수한 우리말이 없으니까 뭐라 할까 ‘씨알’이면 좋을까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함석헌은 1957년 천안에서 농장을 할 때나 70년 잡지를 낼 때도 이를 그대로 썼다.그러나 지금와서 씨알이라는 말이 누구에서 비롯됐냐를 따지는 일은 그 본질을 훼손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씨알사상의 출발점은 하나였으되 그에 대한 입장에서 두 사람은 일정한 차이를 보이는 등 나름의 독자성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다석의 씨알사상이 종교적 차원의 형이상학적인 명제였다면,함석헌의 그것은 보다 현실참여적인 실천적 명제였다. 다석의 씨알사상에 대한 제자 박영호의 풀이다. “다석의 씨알은 형이상학적으로는 하느님의 아들인 ‘얼의 나’(얼나)를,형이하학적으로는 평민이나 민초(民草)를 말한다. 정신적으로는 지극히 높은 하느님과 하나되고 육체적으로는 지극히 낮은 땅과 하나 됨을 이른다. 바로 자유의 진리정신과 평등의 서민정신이 하나를 이룬 것이다.” 그 사상의 원형을 예수와 석가,노자에게서 찾은 다석은 ‘영원한 생명(씨알)’을 깨닫는 게 인생의 목표여야 한다고 설파했다. 반면 함석헌의 씨알사상은 실천적 행동을 통해 민주주의가 이상적으로 구현되는 게 목적이라 했다. 그런 점에서 현실학문이었던 공맹(孔孟)철학의 입장과 비교될 수 있다.
한신대 신학과의 김경재 교수는 “다석이 전체와 객체의 동일성에 주목했다면 함석헌은 여기에 진화론과 기독교 사상을 가미해 보다 역동적인 생명철학을 구축했다”고 분석했다.따라서 김교수는 “함석헌의 씨알사상은 극단적 개인주의와 집단적 전체주의(세계화)가 대립하는 지금 어떻게 둘의 공존과 통합을 이룰 것인가에 대한 실천적인 해답을 제시한다”고 말했다.그러나 분명한 것은 일반 사람들이 유영모나 함석헌을 잘 모른다는 사실이다. 두 사람의 사상에 정통한 몇몇 전문가들은 ‘세계적’ 운운하지만 대중에겐 낯설기 그지없다.서강대 철학과 정인재 교수는 “우리사회가 급격히 근대화하면서 사상계에서 소외된 부분이 바로 유명모와 함석헌이었다”며 “동서양을 아우르는 포괄적 사상이 요청되는되는 오늘날 두 사람이 남긴 선구적 업적은 빠른 시일내에 반드시 재조명돼야 한다”고 밝혔다.
사단법인 함석헌 기념사업회 ssialsori.net |
http://www.ssialsori.net/data/dasuk/dasuk-aboute.htm
다석 유영모, 한국 기독교 일깨운 ‘지도자들의 스승’
[한겨레 2007-03-06 05: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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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국기독교 120년 숨은 영성가를 찾아서 ⑦다석 유영모
노자·불경 통달 뒤 더 큰 신앙 40년간 하루 한끼만 먹는 고행
함석헌·이현필·김흥호 등 제자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다석 유영모(1890~1981)는 손꼽히는 ‘기인’이다. 160㎝의 단구의 몸으로 서울 구기동에서 농사를 짓고 벌을 치며 전깃불도 없이 살던 다석은 쉰둘이 되자 간디처럼 아내와 해혼(부부 성관계를 그만둠)을 선언한 뒤 늘 무릎을 꿇고 앉고, 하루에 한 끼만 먹고, 널빤지에서 잠을 자면서 철저히 고행했다.
4일 다석의 제자 김흥호(88·전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 목사를 찾아 이화여대로 갔다. ‘기독교 도인’으로 꼽히는 김 목사는 매주 일요일 오전 9시 서울 신촌 이화여대 학내 교회에서 성경 강의를 하고 있다. 스물아홉에 종로의 서울기독교청년회(YMCA)에서 다석의 강의를 듣고 그를 스승으로 모신 그는 지금까지 불경, 노자 등을 강의했고, 45년 넘게 하루 한 끼만 먹는다. 그는 “30살을 넘길 수 없다고 할 만큼 병약하던 내가 이 나이 먹도록 죽지 않고 병 없이 산 것은 일일 일식 덕분”이라며 미소 지었다.
그의 스승 다석은 서울에서 맏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서당에 다니며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배웠다. 다석이 처음 교회에 나간 것은 열다섯 살 때였다. 다석은 정식 학교로는 요즘 중학교 2학년밖에 마치지 않았지만 사물의 이치를 통찰하는 데 일찍부터 천재적이었다. 짧은 ‘가방 끈’으로 평북 정주 오산학교에서 스무 살부터 2년간 교사를 했던 그를 10년 뒤 오산학교 설립자 남강 이승훈이 교장으로 초빙한 것도 다석의 탁월성을 간파한 때문이었다.
향교를 교실로 사용했던 오산학교는 다석이 스물에 부임하기 전까지 기독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유교적 학풍이었다. 그런 오산학교에 기독교의 씨앗을 심은 이가 바로 다석이었다. 약관 다석의 기독교 강의를 40대의 남강이 경청했고, 마침내 오산학교를 기독교 사학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때까지 다석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흘린 보혈로써 속죄 받는다는 십자가 신앙’에 충실했다. 그러나 스물둘에 두살 아래 동생 영묵이 죽고, 도쿄에서 1년 동안 유학하는 사이 다양한 학문 세계를 접하고 강연을 들으면서 관점이 근본적으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단재 신채호의 권유로 노자와 불경을 섭렵했고, 춘원 이광수가 가져다준 톨스토이를 읽으면서 동서양을 넘어선 진리의 세계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당시 ‘조선의 3대 천재’로 꼽히던 다석은 2000년 동안 형성된 교리와 신학은 물론 ‘기독교’라는 종교의 틀조차 벗어버린 눈으로 성경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그때 다석은 사도신경에 입각한 교의신학을 벗고 순수한 ‘예수의 가르침의 정수’로 귀환하고자 했다.
동서양의 경전을 꿰뚫어보며 수도를 쉬지 않은 다석은 마침내 쉰둘에 육체와 욕망에 붙잡혀 살아온 제나(몸과 마음을 나로 믿는 개체)가 아니라 우주에 가득 찬 허공과 하나님의 참 얼이 바로 자신임을 깨달았다. 그 뒤 다석은 예수를 ‘참 하나님’이 아니라 ‘참 사람’으로 보았다. 예수 혼자만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얼의 씨를 키워 로고스의 성령이 참나라는 것을 깨달아 아는 사람은 누구나 얼의 씨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 사람이 이를 깨달으면 이 세상 그대로가 하늘나라이며, 몸이 죽고 안 죽고에 상관 없이 영생한다는 것이었다.
다석은 스님들보다 불경에 달통하고, 도교인보다 노자 장자에 도통했지만, 개종하지 않았다. 동서양을 모두 회통한 뒤에도 다석은 예수를 자신이 본받을 궁극의 선생이자 가장 큰 스승으로 모셨다.
그는 세속적 성공과 욕망을 실현하려는 세속심을 부추기고 야합하는 그런 기독교인이 아니라 죽어버린 성령을 깨워 참사람으로 거듭나게 한 호랑이였다. 그가 3·1운동 기독교 대표 남강과 오산학교를 깨우지 않았다면, 불과 인구 1% 정도의 비율에 불과하던 ‘외래 종교’ 기독(개신)교가 3·1운동을 주도함으로써 단시일에 ‘한국인의 종교’가 되기는 어려웠다. 또 상당수 기독교인들이 일제 땐 신사참배와 친일로 민족을 배신하고, 광복 뒤엔 친독재로 민초를 배신했을 때 그가 길러낸 ‘민주화의 대부’ 함석헌 등이 있어서 한국 기독교는 그나마 시대의 역사적 소명에 가장 잘 부응한 종교로 떳떳해졌다. 광주의 ‘맨발의 성자’ 이현필과 동광원 수도자들은 매년 며칠씩 다석을 초청한 사경회에서 집중적으로 설교를 들었다. 동광원은 잃어버린 한국 기독교의 영성을 회복시켜줄 등불로 주목받고 있다. 〈성서조선〉을 통해 조선 민중의 정신을 깨운 김교신과 유달영, 박영호, 주규식, 안병무, 서영훈 등도 그를 받들었다. 다석은 한국인과 ‘한국 기독교’를 깨운 최대의 숨은 공로자였다. 그는 지도자가 아니라 ‘지도자의 스승’이었다.
김흥호는 “다석이 일일 일식을 하고, 널빤지에서 잔 것은 절대자를 직접 체험한 쉰두 살부터였다”며 “그것은 고행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대로’ 혹은 ‘깨달은 그대로’ 살아가는 ‘정행’(바른 행동)이었다”고 말했다.
글·사진 조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http://news.empas.com/show.tsp/cp_hn/cul04/20070306n14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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