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누구나 경험하였음직한 일이지만 나 자신도 몇 해 동안의 피난살이를 하다가 환도한다고 서울역에 내렸을 때, 한편 반갑기는 하면서도 어딘지 허전함을 느꼈다. 모두가 초토가 되어서 형편없이 되었건만 그런 대로 길만은 깨끗하고 시원하여 부산서는 느끼지 못했던 무엇을 느꼈다. 그 때부터 나는 길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길을 걸어가면서 길에 대한 것을 생각해 보곤 하게 되었다.
1 4후퇴 때에 나 자신의 경험으로서는, 노량진에서 영등포 쪽으로 갈 적에 벌써 국도는 다닐 수 없게 되어 이리저리 샛골목으로 거북하게 겨우겨우 걸었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다. 길이라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것인가 하는 생각을 그때에도 하였지만, 환도 후에 길을, 더구나 가로수 우거진 길을 마음놓고 걸을 때마다 좋은 길의 고마움을 새삼스럽게 느끼곤 하였다.
중학 시절에 박물 채집(博物採集)을 하러 높은 산에 올라갔다가 어디어디를 돌아다니는 통에 그만 길을 잃어버리고 산꼭대기에 왔다갔다 헤매다가 해가 질 무렵, 혹시 이 방향이나 아닌가 하고 내려가기 시작했으나 아무리 내려가도 길이 나오질 않았다. 무턱대고 얼마쯤 내려가니 수목이 울창해지고, 넝쿨 뻗은 풀만 우거져서 동서조차 분간하기 힘들 지경이라 어떻게 하나 하고 어린 마음에 겁도 났고 매우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어떤 때는 절벽과 같은 곳을 내려가기도 곤란해서 등에 진 것을 내어 던지고 미끄러져 뒹굴어 보기도 하면서, 그럭저럭 하는 동안에 날이 어둡기 시작하였다. 겨우 숯(목탄)구이 한 흔적 같은 것을 보고서야 약간 안심이 되었다. 또 좀더 내려가다가 쇠똥이 놓여진 것을 발견하고는 어떻게 기쁜지 인제는 살았다 하는 생각이 났고, 또다시 가다가 조그마한 길을 찾아 들어 기운을 얻어 줄달음치다시피 동리 인가(人家) 있는 곳으로 내려갔던 일이 있다.
길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여러 가지 의미에 있어서 재미있음 직하다. 집에 가만히 앉아서도 대문 밖의 길을 생각할 때, 매일같이 다니는 길이지만 그것은 내가 다니는 길인 동시에 남도 다니는 길이므로 대문 밖의 길은 나만이 길이 아니다. 누구나 다닐 수 있는 길이지만 누구의 길이라고 하기는 매우 힘든 것이다. 어떻게 말하면 누구의 길도 될 수 있는 동시에 누구의 길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것이 길이 가진 특이한 성격이라 하겠다. 길이라고 하는 것은 조그마한 소로(小路)라고 할지라도 그 하나로서만 고립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길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가령 목동이 깊은 산중에 가서 나무를 하여 풀을 베기 위해서 수풀을 헤치고 가라 때에는 길이라고 할 수 없는 발자국을 낼 따름이지마는, 그것은 해가 저물기 전에 자기 집으로 찾아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가는 길인 것이다. 그리고 산간 벽촌(僻村)의 담장도 없는 오막살이의 싸리문을 통하는 작은 길 그것은 장터로 통하는 길일 것이요, 장터로 통하는 길은 읍으로, 읍으로 통하는 길은 서울로, 서울로 통하는 길은 급기야 전 세계로 통하는 길일 것이다. 내가 다니는 이 조그마한 길은 결국은 전 세계로 통하고야 만다는 거기에 재미있는 뜻이 있다고 하겠다.
길 중에는 평탄한 길도 있고, 험난한 길도 있으나 그것이 한 번 열리면 세계와 통한다. 그 길을 통하여 포학한 무력이 침범해 들어오기도 하고, 문화 친선의 사절이 가기도 한다. 일찍이 왜병(倭兵)은 명 나라로 가는 길을 빌리는 데 칭탁(稱託)하여 근역(槿域) 침범을 자행하였고, 우리 나라 고승들은 천축 서역(天竺西域)에 불도(佛道)를 구(求)하기 위해 까마득한 천산(天山)의 험로를 넘었던 것이다.
길을 어떻게 내는가 하는 것도 그리 단순한 일이 아니겠지만 세계의 중요한 통로의 주인 노릇을 하는 어떤 힘이 나타날 적에 그것이 그 당시의 세상을 좌우하게 되는 것 같다. 쌍방의 의사가 서로 잘 합의가 되어 있지 못할 때에 한쪽 의사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함부로 길을 내는 것을 우리는 침략이라고 할 수 있다. 대개 역사상에서 보더라도 강대한 국가가 약소한 민족에 대해서 취하는 강압적 태도가 마치 길을 독차지하듯이 그 세력을 휘두르는 데서 생겼던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할 적마다 나는 알렉산더 대왕을 연상한다. 마케도니아에서 일어나서 희랍을 무찌르고 소아시아로 건너와서 인도까지 내어 밀었다는 그것이 무엇인지 길과 관련되어 생각된다.
그런데 도저히 해결할 가망이 없는 곤란한 문제를 아포리아(aporia)라고 한다. 이 아포리아라는 말은 본래 길을 가다가 강이 막혀서 나룻배 같은 것도 없는 경우에 건너갈 방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였던 것인데, 그것이 나중에 '난제(難題)'의 의미로 된 것 같다. 어쨌든 물과 관련이 있었던 것이요, 이처럼 사람의 힘은 물을 건너지 못할 것으로 보이지만 시대가 지나면서 물이 다시금 땅의 길보다 오히려 자유 자재로운 길로 변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길이라 하면 우선 육로를 생각하기 쉽고, 강이나 바닷가 가로막혔을 때에는 그야말로 길이 막힌 것도 같으나, 이것을 이용할 줄만 안다면 오히려 그 시대가 더 우리의 상호관계를 긴밀하게 하여 주는 것 같다. 그래서 일찍이 중국만 하더라도 운하가 많이 발달되지 않았던가. 조그마한 강에 비해서 큰 바다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것 같으나, 큰 바다가 한 번 물길이라는 길로 변할 적에 여기에 육로와는 달리 새로운 세계가 전개된다.
본래 구라파 세계의 출발은 지중해를 기반으로 수로(水路)로서 열려질 때에 하나의 긴밀한 관계를 가진 구라파 세계가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세계가 일찍이 찬란한 문화를 전개시킨 것도 어떻게 보면 이 물결이 담당하였던 몫이 컸던 때문이리라.
로마 시대를 뒤이어 르네상스의 문화가 전개된 것도 내가 보기에는 이 물길이 큰 몫을 해 주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으리라고 본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이 좀더 과학의 발달과 아울러 큰 대양이 물길로 변할 때, 대서양 태평양 인도양할 것 없이 그것이 서로 통하게 되어 여기에 세계가 좀더 달라졌던 것이다.
아테네가 지중해 물길의 주인 노릇을 하면서 고대 희랍의 찬란한 문화를 남기었고, 이탈리아가 또한 지중해 물길의 주인 노릇을 하면서 르네상스의 훌륭한 문화를 형성했다고 볼 수 있다. 그 후에 특히 영국이, 세계에 한때 군림할 수 있었다는 것은 물길의 주인 노릇을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길의 본래의 성격은 누구의 것이라고 할 성질이 것이 아니고 누구나 다녀도 좋은 것이지만, 거기에는 항상 어떤 세력을 중심으로 하여 그 길이 대개 방사선 모양으로 되어서 어떤 초점을 향해서 자꾸 모여드는 것이 아닌가. 세계의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었다 하거니와 한때의 영국 국기가 펄럭거리지 않는 땅이 없다는 말을 하게끔 되었던 것도 런던이 마치 세계의 중심 구실을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 사람이 어찌어찌 하여 한때 야심을 품게 되었던 것도 동양에서 물길의 중심 세력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만한 배짱이라도 부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육로나 수로만이 문제가 되는 때가 아니고 하늘의 길이 문제가 되는 것 같다. 항공(航空), 이것이 어떻게 열리는가에 따라서 이제야말로 그것에 의해서 세계의 제패(制覇)를 앞으로 다투게 될 것 같다. 장차 하늘 길의 주인은 누구일 것인가. 3차 대전이 일어날는지 어떨는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항공로를 자기 수중에 넣는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몫을 담당하게 될 줄 안다.
따라서 육로 수로 항공로가 변함으로써, 즉 길의 성격이 변함으로써 세계의 성격이 변하는 것이다. 세계가 나날이 좁혀 들어서, 어느 한편에서 일어난 일이 다른 곳에 반드시 영향을 주게 되었고, 변방에서 일어난 사건이라 하여 치지도외(置之度外)하여도 무방하였던 옛날과는 다른 정세가 오늘날 생겨나고 있지 않는가. 동양의 세계, 구라파의 세계가 오늘날에 있어서는 과학의 발달과 아울러 자꾸만 하나의 세계로 되어 가는 것 같다.
우리가 보통 말하면 생각하여 온 기왕(旣往)의 길이라는 길이 제일 먼저 문제가 되는데, 두 갈래 길이라든가 막다른 골목 같은 길은 흔히 사람이 살아가는 인생 행로와 관련을 시켜서 생각하는 일도 있으나, 여기서는 보통 생각하는 길 그것이 세계성(世界性)과 매우 관련이 있다는 것만 주의하고 싶다. 길이 막힐 때 하나밖에 있을 수 없는 조국까지도 두 개의 세계로 나뉘는 것을 우리는 얼마나 분통(憤痛)하게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2 우리는 보통 위에서 이야기한 걸어 다니는 길, 타고 다니는 길을 길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외에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와 나 아닌 사람과 서로 통하는 또 하나의 전혀 다른 길이 있는 것 같다. 내가 이 세상에서 나 혼자만 살 수 있고 또 그래서 다른 생각과 아무 상관없이 살 수 있다면 모르되, 나는 절대로 남과의 관련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이상, 마음과 마음이 서로 통할 수 있는 길이 생기지 않을까 생각된다. 걸어다니며 타고 다니는 길밖에 서로 의사를 유통하는 길, 즉 말(언어)이라는 길이 있다.
길과 말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상하게 생각될는지 모르나 말이란, 사람과 사람이 서로 의사를 소통하는 길인 줄 안다. 《신약성경》<요한 복음> 첫머리에 '태초에 Logos가 있었으니'라 했는데 이 Logos를 번역할 때 '태초에 말이 있었으니'라고 하기도 하고, 또 '태초에 도(道)가 있었으니'라고도 한 것을 보았다. 그리하여 '태초에 Logos가 있었으니'는 '태초에 길이 있었으니'라 해도 좋을 것이다. 걸어 다니는 말이 못 된다는 뜻이 아니라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길[道]자는 가령 '불감도(不敢道)'할 것 같으면 감히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길 도(道)자는 말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본래 Logos는 말과 길 두 개의 듯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사람은 말로써 통하지 않으면 곤란할 줄 안다. 소위 말없이도 통하는 수가 없지 않지만, 그러나 말이 있기 때문에 더욱 편리하므로 사람에 있어서 말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로 통하는 길이 말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는 외국 사람하고 말이 통하지 않을 적에 매우 거북한 처지를 가끔 당하게 된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하느님께 통할 때에도 말로 통한다. 기도를 드릴 때에도 말로써 한다.
물론 속으로 믿음이 앞서야 하겠지만, 우리가 예배당에 가보아도, 그리고 종교 의식을 생각해 보아도 말을 통해서 하느님과 서로 교섭을 한다고 할까, 자기의 뜻을 전하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느님에서까지 우리는 말로써 통한다. 하느님과 나의 길이 말에 의해서 통한다는 것을 짐작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는 자기 혼자서 생각할 때도 말로써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말없이 생각할 수 있는가는 매우 의문이다. 숫자적 기호(記號)만 가지고도 넉넉히 생각할 수 있다고 할는지 모르나, 먼저 그 기호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말을 가지고야 비로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말이 발달되었다는 것은 사고 방식이 그렇게 발달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이 흐리멍덩하다는 것은 생각 자체가 흐리멍덩하다는 것이다. 그 나라의 사고 방식이 얼마나 발달되었나 하는 것은 그 나라의 언어를 볼 때에 알 수 있다. 현대 과학 철학의 새로운 경향의 하나로 언어 구조를 치밀하게 분석하며 종래의 형이상학(形而上學)을 비판하고 있는데, 이것은 일리 있는 일이라고 하겠다.
우리는 말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우리가 무엇을 생각할 때 말이 얼마나 중요한 몫을 하는가를 간과할 수 없다. 가령 영작문(英作文)을 지을 때에 우리말로 생각을 해 가지고 영어로 번역해 놓으면 이것이 신통하지 않다고 한다. 아무래도 소위 한국식 영어로서 어색한 영어, 외국 사람이 알아보기 힘든 것이 되고 만다고 한다. 그러지 말고 맨 처음 생각부터 영어로 해서 지어야만 미끈한 영어가 되어 서양 사람도 알아보기 쉬운 글이 된다고 하는데, 이것은 당연한 일 같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 사람의 생각은 한국말로 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영어를 잘하려면 잠꼬대까지도 영어로 하게끔 열중하여야 된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그럼 직한 말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주의하여야 될 점도 있지 않을까.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가 독립을 염원하고 자립을 갈망하면서 하필 생각하는 것의 독립, 사상적인 자립(自立)만을 소홀히 하여 좋을 리가 만무할 것이다. 남의 흉내만 내면서 어떻게 자립 독립이 될까 싶다. 그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의 말을 좀더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될 것 같다.
나 자신이 우리의 말에 대한 소양(素養)이 얕음을 부끄러이 생각한다. 우리의 사상은 우리의 말이라는 길을 통하여 깊어지며 특색도 구비하게 될 것이요, 또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차차로 강하여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길을 제약하는 힘을 가진 세력이 그 당시 세계를 제패하는 것 같다고 말하였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 당시에 어떤 나랏말이 쓰여지는가에 따라서 세계는 그 힘의 세계가 되는 것 같다. 일제의 압력 밑에 살던 당시를 잠깐 회상해 보자. 그 사람들이 얼마나 그들의 말을 가지고 누르려고 했던가. 그리하여 심지어는 우리의 말을 없애 버리려고까지 하지 않았던가. 오늘날 구라파 어느 시골, 어느 도시에 가더라도 이 세계의 한쪽에서는 러시아어를 배우기에 바쁜 사람들이 있지나 않을까. 어떤 말이 많이 쓰여진다는 것이 간단한 일 같지 않다. 그것은 아까 말한 바와 같이 길을 일방적으로 한쪽에서는 올 수 있으나 다른 한쪽에서는 갈 수 없는 길이 있는 것과 같아지기 때문이다.
일제 시대에 연락선(聯絡船)을 타 본 사람은 누구나 경험하였을 것이다. 일본 사람들은 '게다'짝을 끌면서도 잘 오고 가는데 우리는 한 번 가려고 해도 별별 아니꼬운 노릇을 참아야 했고, 무척 힘이 들었던 것이다. 통로는 있건만, 그 통로가 오기도 가기도 좋을 길이어야 옳은 길 구실을 할 것인데, 보이지 않는 가운데에 어떤 제약(制約)하고 있는 힘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말도 또한 그러리라. 이쪽에서도 저쪽 말을 쓰고 저쪽에서도 이쪽 말을 써야 됨직한 말인데 으레 저쪽 말을 하는 것이 옳다고 되어 있는 것이다.
이 말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형태에 있어서 비슷한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 영화를 보더라도 그렇다. 신문이나 포스터에 영화 광고가 굉장히 많다. 거기서 주는 어떤 힘이라는 것이 매우 크다고 본다. 그것은 앞서 말한 길하고는 약간 다르겠지만 그것을 보는 길이라고나 할까. 여하간 많은 영향을 받게 되고 거기에 나타난 것을 가지고 그것이 마치 그들이 생활의 전체라고 억측을 하는 경우도 있을 줄 안다. 방송을 통해서 글을 통해서도 전해지고 있다. 그리하여 말이 끝에까지 오게 되면 길의 성격이 좀 달라지는 것 같다.
무력으로 정복하여 도리어 글의 힘에 의해서 정복을 당하는 수가 있다. 한 예로 만주족(滿洲族) 한족(漢族)을 무찌르고 내려와서 힘으로는 이겼으나 한족으로부터 늘 문화를 받았다. 문화에 있어서는 오히려 정복을 당하고 만 셈이다. 그래서 이 말로써 하지 않더라도 글로써 정복을 당한다는 것은 매우 주의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일본 사람이 우리 강토에 발을 디뎠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때에 문화면으로는 정복을 당하고, 문화적 유산을 훔쳐 가서 자기네의 새로운 문화에 많이 이용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줄 안다.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 오늘날까지 우리 나라에서도 찾기 힘든 귀중한 문헌이 일본에 건너가서 출판된 것을 가끔 보게 된다.
이와 같이 이 말과 글이라는 두 길은 서로 비슷한 점도 있으나 성격이 좀 다른 것이라고 하겠다. 솔직하게 말하면 우리 나라에서 한글을 언문(諺文)이라고 하여 숭상하지 않고, 한문(漢文)을 진짜 글이라고 해서 중국글을 숭상한 것은 글에 의해서 사대주의 사상이 여실히 드러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무력에 의한 침략이 있을 때에 이것을 방어하는 것이 국방의 의무라고 한다면 그것과 마찬가지로 무조건 하고 들어오는 말이나 글을 숭상하고 자기의 것을 잊어버리는 사대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가 요구되리라고 생각된다. 말이나 글이 일방적으로 나가서 저쪽 의사를 무시하고 자기네 마음대로 그의 길을 사용하는 것을 우리는 탄압이라고 하여도 좋을 줄 안다.
본래 method(방법)라는 말은 meta라는 말하고 hodos라는 말이 붙은 것이라고 하는데, meta는 따라간다는 뜻이 있다. method, 즉 방법은 길을 따라간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방법을 연구해 낸다는 것은 따라 걸어갈 길을 새로 튼다는 것이다. 난제(難題)를 해결한다는 것은 막힌 길을 뚫는다는 뜻이다. 본래 서양말에도 road라든가 way라는 말 가운데에는 길이라는 뜻이 있는 동시에 방법이라는 뜻도 있는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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