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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e—cultivate—culture

마라나 혹은 애매모호함 - 박상순과 세 권의 책

by e-bluespirit 2004. 3. 6.
글 / 마라나 (lynchbab@hanmail.net)

마지막으로 그이 이야기를 해야겠다. 마지막이란 말에 명석하고 몽매한 독자들(이 있다면)은 눈치를 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달라질 건 아무 것도 없고, 마땅히 죽어야 되는 인간(들)이 죽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진작부터 그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물론, 또 다시 명석하고 몽매한 독자들은 그이 이야기를 나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 그런 적이 있었지. 하지만 그땐 그이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야, 라고 변명을 하고 싶지만 이제 독자들도 없고 나도 없으니 말해 소용없다. 그러니까 내가 하려던 이야기는 그이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나는 하려던 이야기에서 가능한 한 멀리 달아날 생각이다. 늦었지만 그이의 이름은 박상순이다.

박상순과 마라나


박상순은 시인이다. 그림도 그린다. 시와 그림을 가지고 동시에 작업하기도 한다. 박상순은 두 권의 시집을 냈다. 첫 번째 시집은 절판이 된지 오래고, 두 번째 시집은 아직 서점을 떠돌고 있으나 아무도 사지 않으며 세 번째 시집은 언제 나올지 모른다. 그의 시집보다 그가 그린 표지그림의 책들이 더 많이 팔리고 있다. 지금도 여러분의 책상 구석에는 그의 그림이 담긴 책이 한 권쯤은 놓여 있을 것이다.

박상순보다 시를 잘 쓰는 사람은 너무나 많다. 시집을 내지 못한 내 주변의 친구들도 그 보다는 월등히 잘 쓴다. 그러나 그 누구도 박상순처럼 시를 쓰지 못한다. 아니 있을지도 모른다. 있을 것이다. 박상순의 시는 아이의 낙서, 그림, 토사물을 닮았다. 그러나 박상순은 이것이 시라고 말하고 아이는 자신이 표현한 것들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런 연유로 박상순보다 아이가 더 시인에 가깝다. 그렇지만 또, 모든 아이가 시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박상순 같은 아이만 시인이 되는 것이다.

박상순의 시는 ‘내가 없고 내가 있고’의 싸움의 연속이다. 그것은 아이의 거울놀이이고 거울을 빼앗으려는 어른들의 횡포에 대한 지극히 아이다운 반항이다. 아이에겐 거울 놀이할 권리가 있다. 거울을 빼앗긴 아이가 많을수록 그 사회는 음험하며 정치적이다. 결국 아이의 거울놀이조차 정치화된다. 거울놀이는 조작되고 아이는 성장한다. 그러나 거울놀이가 정치적으로 조작되었다고 아는 순간 이미 아이는 아이가 아니다. 그리고 그 순간 거울은 아무 것도 비추지 못하는 하나의 견고한 벽이 된다. 박상순에게 거울은 마라나가 되기도 하고 자네트가 되기도 하고 농구대가 되기도 한다. 사물들은 거울 속에 들어 있는 동시에 그것이 거울을 비추는 또 다른 거울이다. 그러니까 시도 거울이다. 아이의 거울놀이다.

언젠가부터 오후 2시에서 3시 사이에 마라나는 누웠다./ 시간에 눕고 먹구름 속에 눕고 봄빛과 가을빛에 누웠다./ 나는 그녀를 통해 사라지는 세계를 본다. 사라져 가는 세/ 계의 폭풍에 취해 그녀가, 흰 천 위에 나뒹굴 때// 나는 피를 뽑는다.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1]〉에서

박상순과 키스 헤링


《네 정신에 새로운 창을 열어라》(민음사) 라는 책(?)이 있다. 제목만큼 무게도 만만치 않고 가격도 그렇다. 책장에 비스듬히 세워 고이 모셔두고 있는 그 책을 나는 심심할 때마다 본다. 말 그대로 읽지 않고 거기에 들어 있는 때깔 좋은 사진과 그림들을 보는 것이다. 오래된 사진첩을 보는 것처럼 그러면 까닭 없이 우울해지거나 유쾌해진다. 우울과 유쾌의 창이 열린다.

그 책을 산 건 순전히 박상순의 글 때문이었다. 박상순은 키스 헤링에 대해 쓰고 있다. 키스 헤링은 미국의 ‘코믹 팝 아티스트’다. 지금은 달력이나 팬시상품으로도 유명하지만 살아생전 그는 지하철이나 벽에 그림을 그리고 아이들을 위해 조형물을 만들었다. 그는 33살에 에이즈로 사망했다. 그의 그림은 신촌 현대백화점 지하도 계단 벽에 붙어 있기도 하다. 나는 가끔 그것을 멍하니 쳐다보는 사람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것을 좋아한다.

키스 헤링은 최소의 선으로 인간을 요약하고 사물을 요약한다. 기호화되기 직전의 인간들이 명랑하게 움직이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인간과 사물의 이목구비는 형태 속에 숨어 있으나 그 어느 그림보다 표정이 풍부하다. 헤링의 마지막 일기의 마지막 단어는 ‘웃음’(smile) 이었다고 한다. 박상순은 오래 전 뉴욕에서 헤링을 우연히 만난(사실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사건과 헤링에 대한 단상을 소설처럼 편지처럼 꿈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기호를 남발하며 쓰고 있다. 박상순은 헤링과 놀고 싶어한다. 헤링의 그림 속 아이가 되고 싶어한다. 박상순에게 헤링은 또 다른 마라나이자 거울이다.

“병원 앞 풀밭에 놓인 그의 조각 작품 아래로 아이들이 기어간다. wkwkwk 나는 걷는다. 뉴욕의 거리를, 다시 돌아온 이승의 거리를 걷는다. 그의 삶은 정말 신나고 흥겨웠을까. 그는 괜찮은 화가였을까. ++예술, 삶보다도 소중한 장난 +++그러나 나는 매일 다시 태어나서 다시 죽음으로 향하는 유령일 뿐이다. 의미와 무의미가 만든 환각의 공원 한편에 놓인 철제 의자에 지친 몸을 누이고 잠깐 동안 그에 대하여 곱씹어 본들 무엇하랴. 지금 이 순간에도 거리에서 광장에서 지하실에서 어린이 병동에서, 그는 달린다. 놀이하는 그는 달린다. (54쪽)

박상순과 카프카

카프카의 책은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으며 그의 이름은 하나의 기호가 된지 오래다. 누구나 카프카를 읽고 싶어한다. 그러나 누구나 읽고 싶어하는 만큼 누구도 그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설사 그가 걸었던 골목, 그가 썼던 모자를 써 보아도 모를 것이다. 우리는 카프카의 ‘카’가 왜 ‘프’를 거쳐 다시 ‘카’가 되는지 연구하지 않았다. 시작한 곳에서 떠나 다시 시작한 곳으로 돌아오는 이름, 당신은 카프카다.

카프카의 아포리즘(혹은 일기장의 낙서)인 《악은 인간을 유혹할 수는 있지만 인간이 될 수는 없다》(이주동 옮김 박상순 그림, 솔)를 통해 박상순은 그의 난해하고도 단순한 그림을 보여주고 있다. 그림자 인간들은 카프카의 고독과 공포, 죄를 적절하게 드러내준다. 카프카는 그림자유령처럼 우리의 영혼 속을 떠돌고 우리의 글 속에 출몰한다. 우리는 어두운 방안에 숨어, 누워 사지가 절단되는 꿈을 꾼다. 그것은 전부 카프카의 그림자를 밟고 난 뒤부터다.

카프카의 짧은 글들에서는 어둠 속에서 버스럭거리는 종이 소리가 난다. 아포리즘이란 분명한 어조 속에 불확실성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박상순의 그림 역시 분명한 형태, 기호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그 속에는 뭔가 꿈틀거리고, 가려져 있는 것만 같다. 카프카는 언어 속으로, 박상순은 그림(자) 속으로 도피를 했는지도 모른다. 그들만의 방, 그 찬란하도록 어두운 방이 부럽다. 세계는 하나의 방을 주목함으로부터 시작되지 않는가.

“굳이 집 밖으로 나갈 필요는 없다. 네 책상에 머물러 귀를 기울여라. 귀 기울일 것도 없이 그저 기다려라. 기다릴 것도 없이, 완전히 조용히 그리고 홀로 있으라. 세상이 자청해서 너에게 본색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세상은 달리 어쩔 수가 없다. 그것은 황홀함에 취해 네 앞에서 몸을 뒤틀 것이다.”(191쪽)

ect marana

명석하고 몽매한 독자들(이 정말 있다면)이여, 여기까지가 제 이야기의 전부입니다. 그동안+++ 정말로 +++그러니까 +++ 저는 +++ 죄송할 +++이런 +++ 결론적으로 말해 = 여기, 맥주 한 잔 더 주시겠어요?

2004. 02. 13.
자료제공 / 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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