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마라나 (lynchbab@hanmail.net)
박상순과 마라나
박상순은 시인이다. 그림도 그린다. 시와 그림을 가지고 동시에 작업하기도 한다. 박상순은 두 권의 시집을 냈다. 첫 번째 시집은 절판이 된지 오래고, 두 번째 시집은 아직 서점을 떠돌고 있으나 아무도 사지 않으며 세 번째 시집은 언제 나올지 모른다. 그의 시집보다 그가 그린 표지그림의 책들이 더 많이 팔리고 있다. 지금도 여러분의 책상 구석에는 그의 그림이 담긴 책이 한 권쯤은 놓여 있을 것이다.
박상순보다 시를 잘 쓰는 사람은 너무나 많다. 시집을 내지 못한 내 주변의 친구들도 그 보다는 월등히 잘 쓴다. 그러나 그 누구도 박상순처럼 시를 쓰지 못한다. 아니 있을지도 모른다. 있을 것이다. 박상순의 시는 아이의 낙서, 그림, 토사물을 닮았다. 그러나 박상순은 이것이 시라고 말하고 아이는 자신이 표현한 것들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런 연유로 박상순보다 아이가 더 시인에 가깝다. 그렇지만 또, 모든 아이가 시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박상순 같은 아이만 시인이 되는 것이다.
언젠가부터 오후 2시에서 3시 사이에 마라나는 누웠다./ 시간에 눕고 먹구름 속에 눕고 봄빛과 가을빛에 누웠다./ 나는 그녀를 통해 사라지는 세계를 본다. 사라져 가는 세/ 계의 폭풍에 취해 그녀가, 흰 천 위에 나뒹굴 때// 나는 피를 뽑는다.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1]〉에서
박상순과 키스 헤링
《네 정신에 새로운 창을 열어라》(민음사) 라는 책(?)이 있다. 제목만큼 무게도 만만치 않고 가격도 그렇다. 책장에 비스듬히 세워 고이 모셔두고 있는 그 책을 나는 심심할 때마다 본다. 말 그대로 읽지 않고 거기에 들어 있는 때깔 좋은 사진과 그림들을 보는 것이다. 오래된 사진첩을 보는 것처럼 그러면 까닭 없이 우울해지거나 유쾌해진다. 우울과 유쾌의 창이 열린다.
그 책을 산 건 순전히 박상순의 글 때문이었다. 박상순은 키스 헤링에 대해 쓰고 있다. 키스 헤링은 미국의 ‘코믹 팝 아티스트’다. 지금은 달력이나 팬시상품으로도 유명하지만 살아생전 그는 지하철이나 벽에 그림을 그리고 아이들을 위해 조형물을 만들었다. 그는 33살에 에이즈로 사망했다. 그의 그림은 신촌 현대백화점 지하도 계단 벽에 붙어 있기도 하다. 나는 가끔 그것을 멍하니 쳐다보는 사람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것을 좋아한다.
“병원 앞 풀밭에 놓인 그의 조각 작품 아래로 아이들이 기어간다. wkwkwk 나는 걷는다. 뉴욕의 거리를, 다시 돌아온 이승의 거리를 걷는다. 그의 삶은 정말 신나고 흥겨웠을까. 그는 괜찮은 화가였을까. ++예술, 삶보다도 소중한 장난 +++그러나 나는 매일 다시 태어나서 다시 죽음으로 향하는 유령일 뿐이다. 의미와 무의미가 만든 환각의 공원 한편에 놓인 철제 의자에 지친 몸을 누이고 잠깐 동안 그에 대하여 곱씹어 본들 무엇하랴. 지금 이 순간에도 거리에서 광장에서 지하실에서 어린이 병동에서, 그는 달린다. 놀이하는 그는 달린다. (54쪽)
박상순과 카프카
카프카의 책은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으며 그의 이름은 하나의 기호가 된지 오래다. 누구나 카프카를 읽고 싶어한다. 그러나 누구나 읽고 싶어하는 만큼 누구도 그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설사 그가 걸었던 골목, 그가 썼던 모자를 써 보아도 모를 것이다. 우리는 카프카의 ‘카’가 왜 ‘프’를 거쳐 다시 ‘카’가 되는지 연구하지 않았다. 시작한 곳에서 떠나 다시 시작한 곳으로 돌아오는 이름, 당신은 카프카다.
카프카의 짧은 글들에서는 어둠 속에서 버스럭거리는 종이 소리가 난다. 아포리즘이란 분명한 어조 속에 불확실성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박상순의 그림 역시 분명한 형태, 기호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그 속에는 뭔가 꿈틀거리고, 가려져 있는 것만 같다. 카프카는 언어 속으로, 박상순은 그림(자) 속으로 도피를 했는지도 모른다. 그들만의 방, 그 찬란하도록 어두운 방이 부럽다. 세계는 하나의 방을 주목함으로부터 시작되지 않는가.
“굳이 집 밖으로 나갈 필요는 없다. 네 책상에 머물러 귀를 기울여라. 귀 기울일 것도 없이 그저 기다려라. 기다릴 것도 없이, 완전히 조용히 그리고 홀로 있으라. 세상이 자청해서 너에게 본색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세상은 달리 어쩔 수가 없다. 그것은 황홀함에 취해 네 앞에서 몸을 뒤틀 것이다.”(191쪽)
ect marana
명석하고 몽매한 독자들(이 정말 있다면)이여, 여기까지가 제 이야기의 전부입니다. 그동안+++ 정말로 +++그러니까 +++ 저는 +++ 죄송할 +++이런 +++ 결론적으로 말해 = 여기, 맥주 한 잔 더 주시겠어요?
2004. 02. 13.
자료제공 / 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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