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lue/e—art—exhibit

Night, Night, SweAt Dream! / "자학기계"

by e-bluespirit 2004. 3. 10.

박성연 렌티큘러 설치展

 

Night, Night, SweAt Dream!

 

머리긁는여자 / lenticular / 지름56cm / 2004

 

2004. 3. 25(목) ▶ 4. 4(일)

브레인 팩토리 Brain Factory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 1-6  /  Tel. 725-9520

기획자 : 오숙진 ( cp. 019-203-0548 )

관람시간 : 오전 11시 - 오후 6시, 월요일 휴관

 

브레인 팩토리의 2004년도 세 번째 전시인 이번 전시에서는 박성연 작가의 디지털 이미지 및 우리에게는 그리 익숙하지 않은 매체인 렌티큘러 작업을 선보인다.

작업을 통해 작가는 자신이 늘 고통스럽게 체험하는 악몽과도 같은 상황 설정을 통해 가부장적 시스템 내부에서 발생하는 억압된 스트레스를 주관적이며 은유적인 발상으로 풀어나가는 다분히 심리적이며 위트 넘치는 작품을 선보인다.

박성연의 렌티큘러(lenticular) - 시각적 코라(khora)의 균열된 틈 사이에서 맴돌기

 

박성연은 ‘본다’는 것에 관심이 있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시각예술인 미술을 전공한 작가로서 ‘본다’는 것에 예민하다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본다’는 것에 대한 박성연의 관심은 우리의 눈으로 이루어지는 시각적 인식의 메커니즘에 대한 의문에서부터 출발하여, 시각적 인식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우리의 자아 인식과 정체성 형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그 구획된 일련의 틀에 도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박성연의 작업은 오랫동안 우리를 지배해 온 이러한 시각체계에 대한 딴지걸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시각매체로 작업하는 작가로서 누구보다도 ‘본다’는 것에 예민하지 않을 수 없는 박성연은 눈을 통해서 인식하는 현실과 그러한 눈을 통해서 판단하는 비현실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르네상스 이래 수세기 동안 인간을 지배해온 시각적 인식체계와 이성적 사유의 역사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박성연의 작업은 ‘본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와 그것이 구축하는 사유체계, 그리고 그 안에서 작업하는 시각예술가로서의 자신의 위치에 대한 물음으로 가득 차 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스캔한 이미지와 도로반사경의 왜곡된 이미지는 우리가 정확하게 보았다고 믿어온 것과 옳다고 믿어 온 것에 대한 의문과 회의로 가득 차 있다.

 

 아마도 박성연은 정확하게 보아야 하며, 정확하게 재현해야하는 시각예술가로서, 또한 정확하게 생활하고, 정확하게 기능해야 하는 현대인으로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갖고 있는 듯 하다.

거울에서 반사되어 온 이미지가 항상 그러한 의문을 제기하는 기점이 되어왔다면, 이번에 시도하고 있는 렌티큘러(lenticular) 이미지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묻고, 눈으로 본 것을 정확한 것으로 인식하는 우리의 시각적 인식체계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 위한 매우 적합한 수단이 된다.

 

평소 카메라를 즐겨 쓰는 작가의 입장에서, 단안(單眼)으로 재현된 정확한 현실의 이미지가 오히려 낯선 체험을 가져왔다면, 두 눈으로 외부세계를 ‘보는’ 우리의 두 눈의 간격, 그 시차(視差)를 이용한 렌티큘러 이미지는 우리의 시각적 인식체계의 허점을 드러내기 위한 매체로서 힘을 발휘한다.

우리는 두 눈으로 외부세계를 보고, 두 눈의 시차(視差)가 제공하는 깊이감과 입체감에 대한 정보와 함께 그것을 인식한다. 그러나 우리의 인식체계는 단안 카메라 렌즈를 통해서 구획된 과학적 이미지에 대한 신뢰로 침윤되어 있다.

 

박성연의 렌티큘러 이미지는 그러한 단일시점 원근법의 시각체계에 대한 교정을 요구한다.

수세기 동안 우리의 시각적 인식체계를 지배해 온 단일시점 원근법은 단일성과 유일성을 의미하고, 그것은 다시 불변성과 통일성으로 귀착된다.

인간은 빛과 이성의 존재이며, 근대적 인간의 시각중심주의적 사고는 우리의 인식체계를 확고하게 지배해 왔다.

 

허우적대는남자 / lenticular / 55*22cm / 2004

 

‘빛’을 통한 ‘시각’의 인식은 근대적 인간주체의 이성중심주의, 태양중심주의로 이어지고 그것을 통해 관념철학의 전통이 확고하게 자리 잡는다.

그러한 과정에서 여성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몸의 물질적 가변성은 배제된다. 빛과 이성중심주의의 역사에서 알 수 없는, 즉 볼 수 없는 영역은 빛으로 밝혀지지 않으면 삭제되어야 하는 부분이다.

 

박성연의 작업은 본다는 것은 곧 인식하는 것이며, 그것은 곧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연속과정에 대한 단절이며, 균열이다.

박성연의 렌티큘러 이미지 앞에서 관람자는 위치를 옮길 때 마다 달라지는 영상에서 기묘한 시각적 교란을 체험하고, 그것은 곧 평상시 믿어오던 확신에 대한 혼란으로 이어진다.

수용자의 시점과 움직임에 따라 달라지는 렌티큘러 이미지는 단일한 사진 이미지와 주어지는 시각적인 정보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비디오 이미지에 비해, 이것과 저것을 오가는 체험을 만들어 낸다.

그것은 곧 단일시점 원근법에 대한 지속적인 교란인 셈이다.

기존의 이미지가 우리의 두 눈의 존재를 거부하며, 두 눈으로 하나 보기를 가장했다면, 박성연의 렌티큘러 이미지는 우리의 두 눈의 실체를 확인시키는 작업이다.

그것은 두 눈으로 여럿을 보는 과정이다.

 

렌티큘러는 하나의 면에 여러 개의 사진을 균일하게 잘라 재배열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하나이면서 여럿인 이미지인 것이다.

그것은 현실과 교차하는 비현실이면서, 비현실이기에는 현실에 근거한 이미지가 되는 것이다.

단일한 평면 위의 연속동작이며, 정지된 화면 위의 동영상이라는 렌티큘러 기법을 통해 박성연은 현실 속의 꿈, 꿈속의 현실을 보여주고자 한다.

박성연의 렌티큘러 이미지들은 거듭하여 국수를 뱉어내는 여자의 모습,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남자의 모습 등 강박적인 이미지들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여자는 국수를 다 뱉어 낼 수도 없고, 남자는 물에 빠지지도 헤엄쳐 나오지도 못한다. 그저 시지프스처럼 반복하여 지속할 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미지, 우리가 본 것으로 구축해온 이미지가 발휘하는 힘은 정지되어 있지도 않으면서, 흘러가지도 않는 답답증으로 반복되는 박성연의 렌티큘러 이미지 앞에서 무력해진다.

이것과 저것, 꿈과 현실을 오가는 박성연의 이미지는 현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꿈속의 이미지처럼 낯설고 잊어버리기에는 너무도 선명한 이미지로 반복된다.

강요된 현실과 구축된 지식, 그것을 바탕으로 한 자신의 모습에 대한 낯설고 기이한 재확인의 과정이 박성연의 렌티큘러 작업이다.  

 

서구 관념철학, 빛의 철학의 시조격인 플라톤은 이성적 언어작용으로 규명할 수 없는 잉여의 부분을 코라(khora)로 지칭하고 있다.

코라란 로고스의 논리를 거부하면서, 즉 지적으로 알 수 없고 감각으로 인지할 수도 없으면서 로고스로부터 분리될 수는 없는 것이다.

박성연의 작업은 분명하게 보이고, 그렇게 보인다고 믿고 있는 우리의 시각적 사유에 대한 끊임없는 불일치의 과정을 노출하는 것이다.

마치 빛과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잉여의 부분으로 남겨진 코라(khora)처럼, 그것은 우리의 시각 작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이성적, 논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으며, 언어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언어 밖의 세계, 비현실적인 꿈속의 세계처럼 거듭하여 반복될 뿐이다.

 

권영진 (미술사)

 

 

 

 

수경 개인전

 

"자학기계"

 

 

2004년 3월 1일 ▶ 3월 31일

복합문화놀이공간 "몽환"

관람시간_05:00pm~02:00am

서울 서대문구 창천동 52-30번지 Tel. 02_325_6218

 

약도보기

 

재미와 가벼움으로 대중과 소통하는 작업을 해온 수경 작가의 이번 전시는 <자학기계>이다. 등장하는 소재들을 한지에 그려 넣어 붙이는 작업을 통해 관객들은 마치 스티커처럼 이동할 수 있는 자유로운 상상의 공간을 만들어 내게 되고 관객 스스로 다양한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게 된다. 발의 냄새를 맡는 남자, 사나운 개의 이빨을 향해 뻗은 손, 선인장을 밟기 직전의 발 등 비일상적인 표현들은 그러한 상상의 공간 안에서 자유롭게 유희되고 고통은 배설된다. 그럼으로써 관객은 시원함을 느끼게 된다. 특히나 이번 전시는 차와 음료를 즐길 수 있는 공간에서 열림으로써 작가의 작품들을 한층 가볍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수경 개인전 <자학기계-킬킬킬, Kill, Kill, Kill>

 오마이뉴스 김조영혜(0shine) 기자

손가락 사이를 오가는 컴퍼스, 찔리기 위한 놀이를 즐기는 손가락들. 보기만 해도 지독한 냄새가 풍겨지는 신발을 향해 킁킁거리는 코. 찔리면 족히 한달은 고생할 만한 날카로운 가시가 돋힌 선인장에 들이민 발.

작가 수경의 개인전 <자학기계-킬킬킬, Kill, Kill, Kill>은 일상 속의 자학을 '킬킬'거리며 비웃는다. 찔리고, 뜯기고, 물리는 엽기 발랄한 그녀의 작품 앞에서 관객은 "킬킬" 웃음을 날리지만, 그 웃음 뒤에선 억눌려왔던 무의식의 자학성이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민다. 관객은 놀이로써의 '자학'을 대면하며, 내면에 숨겨 놓았던 자신의 자학성을 배설하고 유희한다.

 

 

작가 수경의 세 번째 개인전인 <자학기계-킬킬킬, Kill, Kill, Kill>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짝사랑하던 여자의 발 냄새를 맡거나 스스로 간지럼을 태우며 화를 낸다. 육체적인 괴롭힘을 통해 정신적 쾌감을 얻는, 자학의 본성들이 작품을 통해 재현된다. 하드 코어 포르노에서나 등장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자학'이라는 주제가 '일상'을 소재로 함으로써 '재미와 가벼움'으로 관객에게 다가서고 있는 것.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이 '이동성'을 담보하고 있다는 것도 작품의 일상화를 추구하는 수경의 작품 세계를 보여준다. 한지에 그려진 작품들을 오려내 스티커처럼 벽이나 판넬에 붙여 놓은 것은 관객에게 자유로운 상상의 공간을 선사하고 있다.

  특히 <차돌박이의 자학>은 전시 공간의 '빨간' 벽지를 염두에 두고 그린 것으로 벽지를 '싱싱한 차돌박이 고기'로 인식한 배고픈 젓가락질을 '자학'의 행위로 해석하고 있다. 얼핏 "픽" 웃음이 나는 일상의 소재들이 작품으로 생산된 것이다.

 

 

수경의 이번 작품들은 지난해 열린 두번째 개인전 <얘기들>과 마찬가지로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한국화를 전공한 작가로서는 색다른 작품 세계를 보여주는 그녀의 최근 작품에서는 만화적 요소를 찾아낼 수 있다.

단순화한 드로잉과 강한 색채 대비로 마치 한컷 만화를 연상시키는 그녀의 작품들은 작품 전면에 '이야기'를 배치함으로써 만화적 요소를 더욱 가미하고 있다.

"내 그림이 만화책이나 드라마처럼 대중들에게 무리없이 읽혀지기를 바란다"는 수경은 기존 화단의 흐름에서는 드문 스토리성 강한 회화를 선보이고 있다. 수경의 작품들은 그림을 그림만으로 보게 하지 않고, 글을 배치함으로써 작가의 의대도로 읽히게 하는 일종의 장치를 두고 있는 셈이다.

활발한 작품 활동을 보이고 있는 수경은 오는 5월, <가수 앵앵이 양의 삶과 죽음>이라는 주제로 '앵앵이'라는 가수의 일생을 조명할 예정이다. 그녀는 '앵앵이'란 이름은 "가장 조악하고 천박한 말이 없을까 하다가 생각해 냈다"라며 "가상인 여가수의 일생을 통해 남성중심적인 사회의 속성을 꼬집을 것"이라고 말했다.

수경의 두번째 개인전 <자학기계-킬킬킬, Kill, Kill, Kill>은 3월 한달간 신촌의 복합문화놀이공간 몽환에서 전시된다.

 

http://www.tnrod.com (수경작가의 홈페이지)

 

 

 

'Blue > e—art—exhibit' 카테고리의 다른 글

Keith Haring in the subway  (0) 2004.03.16
Path-통로 / 김소연 개인전  (0) 2004.03.14
[스크랩] 백두대간  (0) 2004.02.21
David Hockney  (0) 2004.01.31
Ralph Gibson  (0) 2004.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