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그림을 처음 대하게 되면 우선 무엇을 어떻게 보아 나가야 할 지 막막해 진다는 고백을 자주 접하게 된다. 그러나 지레 겁먹지 말고 천천히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고 한 옛말을 상기하면서 그림을 살펴보라. 그림에는 대개 그 작품을 제작하게 되는 목적이 있게 마련인데 이 목적을 파악하면 그 그림은 이미 당신의 수중에 들어온 셈이다. 흔히 사극을 보면 임금의 총애를 받고 있는 여인을 해코지하기 위해 그 여인의 초상을 그려 놓고 바늘로 찌른다거나 칼로 찌르는 행위를 반복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는 서인도 제도에 퍼져 있는 부두(Voodoo)신앙에도 나타나듯이 옛날에는 어떤 대상을 그려 놓고 가해하면 그 대상은 죽거나 병이 난다고 믿었고 따라서 과거 원시시대의 그림은 이렇게 주술적인 목적에 의해서 그려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기가 불순하여 동굴에서 지내는 날은 날이 맑아지면 나설 사냥에서 들소를 잡기 위해 동굴 벽에 그려 놓고 그곳을 향해 창을 던지거나 돌을 던지면서 사냥에서의 성공을 기원했다. 따라서 주술적인 목적에 의해 그려진 그림은 사물의 유사성보다는 상징성에 더 중점을 둔다. 시간이 흘러 주술이 종교로 대체되면서 종교적인 그림들이 등장을 하기 시작한다. 이는 로마 시대 후반부터 기독교가 국교로 공인되기 이전부터의 일이다. 그러나 국교로 정작 공인을 받았을 때도 신도들 대부분은 까막눈이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상황에서 글을 안다는 사치에 속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글을 대신할 목적으로 그림이 사용되었다. 즉 성경에 나오는 내용을 그림으로 그려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어서 그려진 것이 종교화의 실상이다. 교황 대 니콜라우스의 말대로 "그림은 글을 모르는 사람에게 책을 대신할 수 있는 것" 이었다. 결국 글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림을 봄으로써 성령의 은혜로움을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서면서 그림은 매우 장식적이고 우화적인 내용으로 도덕적인 교훈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전의 종교적 의미에서 그려진 그림들과는 달리 직접적이기보다는 간접적인 방법을 택하고 있으며 기법 적으로도 상당히 세련되고 능숙한 필치를 보인다. 내용상으로는 그리스 로마신화를 바탕으로 하며 그 내용을 의인화라고 하는 복잡하고 애매한 과정을 거쳐 풍자화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러한 그림은 글자를 모르는 문맹자들을 위한 그림이 아니라 어느 정도 풍부한 지식과 교양을 갖춘 사람들의 흥미를 돋우어 그 의미를 찾게 하려는 목적이 숨겨져 있다. 그리고 이러한 그림은 당시 원근법이나 축약법 그리고 재료의 발달로 이룩된 미술의 최고선을 포함하며 요즘 우리가 외국의 유명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볼 수 있는 작품들의 주종을 이룬다. 그러나 당시의 그림을 대 할 때 우리가 난해하다는 생각이 들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들의 문화적 배경을 이루고 있는 구약이나 그리스, 로마신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때문이다. 따라서 그림을 보기 위해서는 때로는 많은 교양이 필요하기도 한다. 물론 그림을 감상한다는 것은 총체적인 문화인, 교양인으로 거듭나기 위한 자기 수련의 한 방법이기 때문에 그림한점을 이해한다는 것은 감상자의 교양 정도의 총량을 의미한다.
그런데 현대로 들어오면서 추상회화라는 일반적인 교양 수준으로는 쉽게 접근이 되지않는 작품들이 등장하면서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
이러한 추상 회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그림을 보아 왔던 방법과는 또 다른 방법과 교양을 필요로 한다. 이제 추상화가 등장하면서 그곳에서는 사냥감인 들소도, 경배의 대상인 그리스도도, 복잡한 의인화의 과정도 찾아볼 수 없다. 단지 그림을 그린 작가의 주관만이 존재할 다름이다. 이러한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늘의 시대상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물론 미술 언어의 일반적인 문법에 대해서도 이해가 필수적이긴 하지만.
예를 들어 2차 세계대전 후 등장하는 추상 표현주의 미술은 실존주의와 전쟁의 상흔 특히 살육의 현장에서 보고 느꼈던 참혹한 현실이 작품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작가의 창작 활동과 육체적 에너지 그 자체를 극명하게 드러내 보이려는 살아 있음의 확인이 전부인 경우도 있는 것이다. 또 경우에 따라서는 음악과 관련된 불가시한 세계를 가시화하기도, 또는 미술이라는 조형 언어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전제로 하고 있기도 한 까닭에 쉽게 그 의도를 짐작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그러나 추상미술도 인간이 창조한 것임으로 인간이 이해하지도 할 것은 전혀 없다. 그것도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로서 말이다. 그리고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도 처음 만나는 사람은 서먹서먹하기 마련이다.
하물며 처음 보는 미술작품의 경우 그 서먹서먹한 정도는 더하면 더했지 덜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자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친해지듯이 처음 만나는 미술품이 나에게 쉽게 마음을 열어줄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곤란하다. 우선 낮을 익히고 서로 찬해지면서 시간을 가지고 그림과 우정을 쌓아나가는 방법이야말로 그림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첩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미술, 그 본질의 상식
미술관이나 전시장을 찾을 때면 형형색색의 많은 그림들이 우리를 맞는다. 그러나 이 그림들이 이루어지고 우리에게 그림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어떤 형식이 필요하다. 그리고 요즘에 들어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그림이라는 상식과는 동떨어진 것(?)들이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기도 하고 이것이 과연 미술일까 하는 의문이 생길 정도로 파격미를 자랑하는 것도 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어디까지가 작품이고 어디부터가 전시장인지 구분이 모호해 질 때도 있다. 그러나 미술이라는 일차적인 형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덕목이 있다. 우리에게 흔히 그림이라 불리는 미술의 대표적인 갈래인 회화Painting는 원래 2차원의 평면에 점이나 선 또는 면이라는 미술의 1차적 언어를 구사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표현의 결과물을 의미한다. 그것은 종이 위에 연필이나 콘테 혹은 목탄으로 그려진 선묘화(線描畵)이거나 예전에 벽화를 그릴 때 주로 사용되던 프레스코기법 Fresque -회벽이 축축하게 아직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수채 안료로 그림을 그린 후 회벽이 마르면서 고착되는 기법으로 르네상스 시절 벽화를 그리는 데 많이 사용되었다. -이나 템페라화 Tempera -달걀 노른자와 아교를 섞은 불투명 안료를 사용하는 회화 기법의 하나로 유화와 달리 부드러운 색의 흐름을 내기 곤란하며 약간 딱딱한 느낌이 든다. 중세 페널화에서 널리 쓰였다. -또는 캔버스에 유화 재료로 그리건 그림을 그리는 재료는 시대에 따라 여러 가지 종류가 쓰이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그 부침이 잦지만 미술품이 일차적인 형식을 갖추기 위해서는 재료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렇게 미술에 쓰이는 재료를 지지체(支持體)라고 부른다.
그러나 캔버스에 유화물감이 칠해 져 있다면 당연히 회화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것을 반드시 예술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재료가 물질 이상의 정신적인 표현을 동반할 때만이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점은 캔버스와 유화구에 한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미술과 모든 미술 재료에 당연히 적용되는 원칙이다.
문학에서는 원고지와 필기도구가 재료가 되고 있다.
그리고 어떤 문학작품이 이 재료를 사용하여 시나 소설이 되고 그것이 인쇄가 되면 책으로 발행된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가 커피를 쏟거나 잉크가 엎질러져 얼룩이 졌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지만 이 얼룩은 책의 글자를 읽을 수 없도록 해 버리지 않는 한 책의 내용을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다만 책을 읽는데 다소 불편을 초래할 따름이다. 그러나 미술 작품에 이런 사태가 발생하면 그 성질과 내용은 확연히 달라질 수 있다.
문학과 비교하여 미술 작품에 어떤 형태나 색채를 띠게 되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문학작품 이상의 변화를 주게 된다.
그것은 작품을 보는 데 눈에 거슬리기도 하고 반대로 그 작품을 보다 돋보이게 할 수도 있다. 미술 작품에 있어서는 우연이라도 어떠한 형태나 색채가 더해지면 그것은 단순한 가산이 아니라 화면 전체에 작용하고 또 다른 작품을 생산해 낸다. 한국화나 흰 캔버스에 아크릴계 안료로 그린 회화로서 원래의 백지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색이 변화했을 때도 원래의 색채를 생각하면서도 현실로 드러나 있는 화면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감상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즉 변화한 그대로라는 테두리 안에서 또 다른 내용을 담아낸다는 전제 아래 가능한 것이다.
이것을 물리학의 개념을 빌린다면 부분의 가감에 의해 끊이지 않고 변화하는 전체성의 이론을 말한 게슈타르트의 심리학을 통해 보면 명확해 진다.
"자석의 힘이나 전기의 경우 하나의 쇳조각을 붙여 올렸을 때 단지 하나의 쇠 조각이 들어 올려 진 것이 아니라 그 전체의 구조가 변화한다."는 것이며 "그 내부는 상호 의존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즉 미술이란 예술의 갈래에서 화면은 형태나 색채의 모든 요소가 모두 유기적인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상호 관련성은 긴밀하며 치밀하고 예술성이 뛰어난 회화에서는 절대로 서로 이완되지 않은 상태에서 상호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상호의존적인 관계에서 하나의 작품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문학에도 적용된다.
그렇지만 이미 살펴 본 것처럼 문학은 관념으로써의 예술이니 만큼 얼룩은 이물에 지나지 않고 복수화가 가능한 것이다.
다른 한편 미술이 얼룩이나 이 물질에 의해 화면이 변하고 마는 것은 그것이 하나의 생명체로 존재하고 게다가 유일무이한 일회적인 존재라는 점에서 문학이나 여타의 예술과는 변별성을 갖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미술을 오브제 다르 Object d'art 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미술 작품이 수집의 대상이 되고 그리고 유일하게 예술의 장르 중 환금성을 가질 수 있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미술품의 독특한 성격 때문에 가끔은 투기의 대상이 되거나 치부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이런 탓에 미술품이 간혹 오해의 대상이 되기도 하며 의혹의 눈초리를 받기도 하는 숙명적인 운명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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