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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국미술이 걸어온 길 - 최열

by e-bluespirit 2004. 4. 2.


근현대 한국미술이 걸어온 길

서구미술이식-서구의 모방에서 아시아미술의 중심으로

동북아시아는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면서 서구의 진출과 그로 말미암은 생산양식의 변화 및 서구형 자본주의의 길을 걸어왔다. 더불어 지역권내 일본의 한반도와 대륙 침략 및 지배가 이뤄졌고 일본은 그 세력을 바탕으로 미국을 상대로 하는 전쟁을 일으켰으며 끝내 패배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의 패배는 조선과 중국을 해방시켰지만 동시에 미국과 소련의 동북아시아 진출로 말미암아 두 나라의 분단을 현실화 시켰다. 미국은 일본, 대만, 남한에 군대를 주둔시켜 국가의 모든 분야에 영향력을 행사했고, 소련은 철군하였지만 중국, 북한의 사회주의 정권을 지지 후원했다. 그 뒤 1950년대 이후 세계냉전체제의 긴장구도를 동북아시아에 뿌리내리는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문화예술의 변동은 필연이었다. 서구화 과정을 가장 빨리 겪은 일본에서 서구미술이 이식, 정착되었고 자신들이 겪은 경험을 동북아시아 식민지인 조선에 강제했다.조선에 대한 일본의 강제는 자강사상을 지닌 개화파 세력에 의해 재촉되었다. 자강사상노선은 여러 세력에 영향을 끼쳤는데 미술분야의 초기 일본 유학생들 대부분이 그 영향권 안에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대한제국의 고종황제가 서구문명에 깊은 관심과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동도서기론을 지니고 있었던 듯 하거니와 첫 미술유학생인 고희동(高羲東)만 하더라도 국가의 파견명령에 의한 유학이었다.


서구미술의 이식

서구미술에 대한 조선인들의 우호적인 태도는 17세기 이래 숱한 기록에 의해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인들이 서구미술 작품을 관찰하고서 서술한 기록들은 우호적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20세기 초 황실의 판단으로 유학을 떠난 고희동만이 아니라 민간 유학생인 김관호(金觀鎬), 김찬영(金瓚永), 나혜석(羅蕙錫)의 유학도 개인의 열정만이 아니라 사회의 분위기와 시대의 상황에서 비롯한 것이었으며 이후 서구미술 유학을 결심한 많은 유학생들이 적극성을 보여주었다.

특히 20세기 화단의 보금자리를 만들어 숱한 제자를 길러냈던 안중식(安中植)의 태도는 매우 인상깊다. 안중식은 문하에 찾아온 고희동을 거두었었으며 그 뒤 서양미술을 배우러 유학을 떠났다가 돌아온 고희동을 서화협회 창립 당시 발기인의 한사람으로 끌어들였을 뿐만 아니라 총무의 직책을 맡기기까지 했던 것이다. 다시말해 당시 화단의 좌장인 안중식이 서양미술을 배우고 돌아온 이른바 서양화가를 서화협회의 중심에 포진시킨 것이다. 이러한 우호적 태도는 이후 조선화단을 수묵채색화와 유채화 분야가 공존하게 만들었던 출발점이었다.



서구미술의 이식(계속)

안중식은 수묵채색화가였지만 서양의 제도법을 배우기 위해 관비유학생으로 중국 유학을 다녀왔다. 또한 오세창(吳世昌)과 더불어 개화당의 일원으로 활동한데서 보듯 당시 자강사상 노선을 견지하였고 수제자 이도영(李道榮)과 함께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활동을 지속했던 것이다. 더우기 안중식은 황제의 초상화를 주관하는 어용화가로 활동할 만큼 당대 화단의 정상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러한 안중식이 서구미술 이식에 관해 우호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당대 수묵채색화가들이 같은 태도를 취하게끔 영향력을 행사했을 터이다. 따라서 뒷날 안중식이 전국 단위의 미술가 연합단체인 서화협회가 출범할 때 서양회화를 배워온 고희동을 발기인으로 포함시키고 나아가 총무로 임명했을 때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던 것이겠다.

이처럼 서양미술에 대한 저항은커녕 우호적인 감싸기야말로 서양미술 이식사에서 새롭게 눈길을 주어야 할 대목이다.



고희동 <부채를 든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915

기존의 연구자들은 서양미술 이식과정이 마치 고난의 연속이었던 것처럼 묘사해 왔다. 터무니없는 왜곡은 아니지만 그 고난의 실체는 초기 서양화가들이 주장했던 것과는 상당히 다르다.

초기 서양화가들은 자신들이 서양미술을 이식함에 있어 많은 고통을 겪었다는 증언을 남겼다. 이를테면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보니 모델도 없고, 유채화 판로도 없으며, 유채화에 대한 인식이 없어서 활동이 불가능할 정도였다고 썼다. 나아가 사회로부터 냉대라 할만큼 아예 무시 당하여 유채화를 계속할지 심한 회의를 느낄 정도였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거꾸로였다. 고희동의 유학은 국가의 후원 아래 일본에서 귀빈대우를 받으며 떠났던 길이었고 귀국하자 곧장 화단의 중심부에 진입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고희동은 선각자의 고난을 한몸에 안고 있었던듯이 왜곡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귀국한 뒤 열렬한 조명을 받으며 영광스런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던 몇몇 유학생 출신 화가들도 웬일인지 선지자의 고난을 겪은 것처럼 회고하였다.

그들 초기 서양화가들의 회고나 증언은 하나같은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첫째, 자신들이 겪은 힘겨움이 매우 컸다는 점 둘째, 자신들은 신문화운동을 펼친 개척자였다는 점 셋째, 자신이 활동하기 이전은 물론 자신이 활동하기 시작한 바로 그 시대의 미술계를 지나치게 폄하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사실의 과장과 왜곡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다. 첫째, 미술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겪는 고난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자연스런 과정일 뿐임에도 매우 특수한 고통으로 내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과장이 지나친 것이라 하겠고 둘째, 당시 서양화가들이 수묵채색화가들에 비해 미술계에서 성장할 수 있는 기회의 측면만 보더라도 서양화가들이 훨씬 유리한 조건이었는데 이런 점에는 애써 눈감고 냉대를 받았다는 점만을 극대화하였으니 사실의 왜곡은 물론 투정의 기운까지 엿보이는 것이다. 셋째, 서양화가들이 당시 미술계를 지나치게 폄하하는 이유는 신문명, 신문화의 기수라는 자부심에 물들어 자신을 선구자, 개척자로 올려놓고자 했던 의도의 산물이라 할 것이다.



안중식<백악춘효도>

따라서 유학생 출신 미술인들이 남긴 증언이나 회고를 연구자료로 삼으려면 먼저 그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여야 한다. 따라서 그것을 역사의 자료로 사용하려는 연구자는 사실에서 엄격하고 또한 당시 여러 가지 사실들과의 관계를 세심하게 따져 판단해야 한다. 다시말해 증언이나 회고는 간접 자료이고 또한 개인의 주관에 따르는 것이므로 엄격한 자료비판 과정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연구자들이 그같은 과정을 생략해 왔다.

아니 더욱 심각한 문제는 증언과 회고에 담겨있는 내용과 의도를 연구자가 더욱 더 키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멀쩡한 화단을 두고서 느닺없이 계몽하지 않으면 곧 몰락하거나 아예 이미 황폐해질대로 해졌다고 탄식하는 증언 따위를 신앙처럼 떠받들었던 것이다. 그들의 눈에 따르면 당시는 야만의 시대였다. 연구자들은 19세기말, 20세기초 조선화단이 조직, 단체, 전람회에 무지하였고 또한 창작은 커녕 중국그림 모방 일색이었다고 규정해 왔다. 이러한 규정은 고희동의 회고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단지 고희동의 회고를 증거로 채택한 것을 넘어 더욱 큰 문제는 연구자 스스로 19세기말 20세기초 화단이 몰락과 폐허에 허덕이고 있다고 확신한다는 데 있다. 고희동의 관점을 고스란히 수용하여 자신의 관점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연구자의 그와같은 관점은 초기 서양화가들이 조선에서 너무나 큰 고난을 겪어 왔을 뿐만 아니라 선구자요 개척자였다고 미화하는 데 상당한 구실을 했다. 그러나 그러한 관점은 거꾸로 당대 조선화단이 거의 구제불능의 빈사상태였음을 강조하는 데 커다란 구실을 했다. 연구자들은 조선 화단이 이미 자생력, 자기갱생능력을 잃어버렸다고 확신을 하고 있었으므로 당연히 외부의 힘이라할 서구미술의 이식만이 유일한 희망이라고 판단했다.

이렇게 보면 자신의 행적을 신문명, 신문화의 선구자라고 확신했던 고희동그리고 뒷날 고희동의 관점을 이어받은 연구자들이 서로 다른 사람임엔 틀림 없으나 관점과 태도에서 보자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동일한 사람이라고 말해도 틀리지 않을 터이다. 20세기 내내 증언자와 연구자 서로를 신미술운동자로 동일시하는 착각에 빠졌던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서구미술의 이식 (계속)

당시 서구문명을 이식하던 움직임을 뒷날 연구자들은 신문화운동이라 불렀다. 연구자들은 신문화야말로 황폐한 기존 문화계에 신선한 충격을 가해 생존의 기력을 회복시켰다고 거침없이 말하곤 했다. 신문화란 일본을 통해 수입한 서구문화였다. 많은 연구자들이 우리 민족 문화를 구원할 유일한 가능성은 바로 그 서구문화 밖에 없다고 믿었다. 기존의 고유문화는 낡은 것이므로 새로운 문화인 서구문화로 대체해야 된다고 하면서 서구문화 수입은 민족자강의 신성한 과업이라고 주장했다.

  누구건 서구문화 수입을 비판하지 않았다. 서구문명 이식은 많은 이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실제로 당시 언론은 서구문화 이식 행위를 중심으로 움직였다. 언론매체에 참가함으로써 서구문화 접촉 경력을 지닌 자강론자인 오세창이 그러했듯이 당시 숱한 지식인들은 모두 서구문화를 신흥문명, 신문화라고 불렀고 고유문화를 고문화, 고미술로 불렀던 것이다.

  미술분야에서만 보더라도 초기 이식 화가들인 고희동, 김관호, 김찬영, 나혜석에 대해 언론을 비롯한 지식인들이 보여준 뜨거운 관심과 호응은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사회적인 것이었다. 이미 탈아입구(脫亞入歐) 다시말해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를 향해 질주하는 일본의 지배 아래 있던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서구문명을 받아들인 일제의 강제력과 서구문명을 수입해 민족의 힘을 기르자는 자강론자들의 추진력이 조화를 이룬 서양문화 이식은 하나의 시대적 추세였던 것이다.
 

고유미술의 지속

  그런 상황에서도 고유미술은 위축되거나 후퇴하지 않았다. 안중식이 경묵당을 열고 제자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이래 배출한 수묵채색화 작가들은 20세기 거장들로 성장했다. 이들을 가로막는 세력이나 어떤 제도도 없었다. 더구나 수묵채색화가들은 스스로를 혁신해 나갔고 시대를 거스르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았다. 그와같은 변화와 성장이 서구미술에서 자양분을 얻었다는 점을 증명하고자 하는 노력도 없지 않지만 이념이나 양식에서 특별히 그 영향을 받았다고 할만큼 압도적인 것은 아니었다. 일본미술의 영향은 더욱이 아니었다.

  고유미술은 서구미술의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되어 있었다. 오히려 서구미술의 사실묘사를 받아들이라는 요구가 상당했다. 이를테면 1920년 변영로(卞榮魯)는 <동양화론>이란 글에서 고유미술이 새로운 시대의 문명과 담을 쌓고 봉건시대의 음풍농월에 흠뻑 빠져 있다는 비난을 아낌 없이 퍼부어댈 정도였다. 하지만 사실묘사와 같은 서구미술의 방법이 고유미술의 운명을 가름할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었다. 더구나 수묵채색화에서 서구미술의 방법이 새로운 방향일 수도 없었다. 다시말해 사실묘사나 시대정신의 반영 따위는 고유미술이 걸어온 오랜 전통 속에서 이미 경험했던 것에 지나지 않았다. 정선의 진경산수, 김홍도의 풍속화에서 보듯 18세기에 보여준 사실정신은 한 시대의 절정에 까지 이르렀던 터였다.

  서구미술 이식기에 고유미술이 가야할 길이 참으로 서구미술로 흉내내기였을까. 누군가는 사실묘사를, 누군가는 현실비판을 꾀하라는 요구를 했지만 그러한 요구는 참된 대안일 수 없었다. 실제로 많은 수묵채색화가들이 그같은 요구를 무시하였으며 나름의 개성을 발휘하는 가운데 식민지 조국이 품고 있는 시대정신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추궁해 나갔다. 서구미술이 고유미술에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나아가 동도서기(東道西器) 노선에 입각한 미술론도 제출되지 않았거니와 이를테면 누구도 수묵채색화의 도구와 재료를 포기라는 식의 주장을 펼치지 않았다. 오히려 1930년대 조선학운동의 전개와 더불어 조선향토색 장려 시책에 힘입어 외부의 영향을 추종하는 일본화풍 추종 경향에 대한 비판이 거셌을 뿐이었다. 고유미술이 서구미술을 추종한다는 지적이나 그러한 현상을 걱정하는 일이 전혀 없었음은 이 시대에 서구미술 이식이 고유미술에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했다는 사실을 거꾸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고유미술을 포기하고 신흥미술을 전면화하자는 주장은 식민지로 떨어진 민족에게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식민지 시대 때 일부 화가에 의해 조선미전에서 사군자 분야를 제외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자 격렬한 비판과 반대운동이 세차게 일어났다. 오히려 상고주의 (尙古主義) 또는 아시아주의를 펼쳤던 이들 특히 김용준(金瑢俊)과 이태준(李泰俊)은 서예와 사군자에서 현대 미학의 핵심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소리를 높였다. 시간이 흐르면서는 서양회화를 동양회화로 변화시키자는 주장까지 나올 정도였다. 사정이 이러하니 동도서기 따위의 절충론은 발도 붙이지 못했다.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고유미술이 나아갈 길은 서구미술 흉내내기가 아니라 바로 그 새로운 시대정신을 추궁하고 시대의 미의식을 탐구하는 데서 찾아야 했다. 따라서 서구미술 이식기에 그러한 추궁과 탐구는 민족의 고유한 형식과 내용을 수호하고자 하는 쪽에서 먼저 일어났다. 그것은 식민지 시대 민족 정신의 강렬한 충동이기도 했다. 이제 그 과정을 살펴 보기로 하자.

 

 

 

고유미술의 지속(계속)

서화미술회 강습소 학생들 가운데 누구도 서구미술의 방법을 채택하지 않았다. 연구자들이 즐겨 예를 드는 안중식과 그 후예들에게서 보이는 서구미술 영향의 흔적이라는 것도 일본회화의 절충파 양식을 모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상범(李象範), 변관식(卞寬植), 노수현(盧壽鉉), 김은호(金殷鎬)가 모두 그러하거니와 하지만 그것마저도 초기의 절충 과정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 과정을 잠깐 거쳐 그들은 금세 독자한 자신의 이념과 미학을 구축해 나갔다. 다만 김은호만이 일본화의 이념과 양식을 자기화시키는 과정에 제법 빠져들었다. 이들은 지극히 제한된 수준의 영향권 안에 자리하고 있는 미술인들이지만 다음에 살펴 볼 미술인들은 그야말로 비타협적인 자주성을 확고히 지켜나간 이들이다.   

안중식의 제자 가운데 서화미술회 강습소 제1회 졸업생 오일영(吳一英)은 세기말 세기초 고전 형식파의 전통을 계승한 화가였다. 거의 복고주의자라고 불러 틀림이 없는 오일영은 이미 시대를 거스르고 있었지만 맑고 아름다운 화폭이 조화로움과 안정감으로 가득차 있었으니 상실의 조국에 고전의 추억을 노래했던 것이다. 오일영은 당대 화단의 배후 오세창의 조카였다. 오세창은 옛 회화와 서예, 금석문의 수집과 연구에 생애 후반을 모두 바쳤으며 그 과정에서 스스로 서예 창작을 해 나갔는데 그야말로 완전한 고전의 세계를 열어갔다. 마찬가지로 의병 출신의 김진우(金振宇)는 창칼준법으로 그린 대나무 그림을, 채용신(蔡龍臣)은 스승이자 의병장 최익현의 초상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을 사진찍듯 화폭에 새겨나갔다. 이들은 모두 식민지 시대 조선화단의 정체성을 드높인 화가들이었고 또한 새로운 고전 형식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19세기말, 20세기초 고전형식파를 계승하여 분야별로 숙성시킨 절정의 거장들이었다. 식민지 시대 새로운 고전형식주의자들은 그러나 스스로를 단련해 나갔을 뿐 결코 서구미술을 수용한 세대들을 비난하거나 배척하지 않았다.

 스스로 시대의 미감을 자신의 조형에 반영하기 위해 형식의 혁신을 심각하게 추진하였으며 앞선 시대의 어떤 산수화, 어떤 서예, 어떤 사군자, 어떤 초상화와도 비교할 수 없는 신선함과 쾌적함을 아로새겼다. 균형과 조화의 양식에도 불구하고 무거움과 가벼움을 동시에 실현한 이들 식민지 시대 신고전형식파는 서구미술의 드센 유입에도 불구하고 민족 고유미술의 유장함을 튼실히 보여주는 거대한 갈래라 하겠다.

그러나 이들은 20세기 내내 미술사학자들에 의해 완전히 배제 당해왔다. 오세창의 서예, 김진우의 사군자는 모두 미술사의 주변에 편성되어 있었다. 오일영은 아득히 잊혀진 작가로 사라져 버렸다. 심지어 채용신의 경우는 화단에서조차 이탈해 있었으므로 근대미술사에서 그 이름조차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다행히 21세기에 들어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채용신전이 열려 일단 작품세계의 전모를 집약해 놓았다.
오세창이 지은 불후의 노작 <<근역서화징>> 국역이 완료되었고 오세창전이 열렸으며 김진우도 대규모 전람회가 열려 재평가의 기회를 마련해 놓았으니 21세기야말로 식민지 시대 새로운 고전형식주의자들이 부활하는 때인듯 하다.

 

 

 


아시아중심5 (근현대 한국미술이 걸어온 길)

서구미술 이식과 수용의 과정

조선에 서구미술의 이식은 자강사상을 지닌 세력에 의해 주도되었고 매우 빠른 속도로 다음 세대들인 김용준과 오지호(吳之湖), 김주경(金周經)에 의해 자기화의 수순을 밟았다. 이들은 녹향회와 관련을 맺었는데 아세아주의를 주장하면서 동양정신을 이념으로 내세웠다. 이러한 이념은 조선심(朝鮮心), 조선 정조(情調)를 강력히 주장하여 1930년을 앞뒤로 하는 이른바 조선향토색 화풍의 핵심이었다.

  조선향토색은 한편 일제의 대동아주의 관점에서 보자면 동북아시아의 주변부 지방색 가운데 하나였다. 일본색을 중심으로 삼고 보면 조선의 향토색은 일본 제국이 장려해야 할 하나의 주변색이었다. 실제로 일제는 조선향토색을 강조했고 또 조선미술전람회 심사 기준으로 삼기도 했다. 또한 아세아주의 미학의 핵심은 심미주의, 신비주의였는데 그 정신적 경향성으로 말미암아 초현실주의와 같은 양식의 가능성을 내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거의가 인상파 양식에 머무름으로써 조선의 자연풍토를 묘사하거나 또는 골동품 따위를 소재로 삼는 수준에 그치고 말았다. 특히 심미주의 미학이 조선향토색이건, 아세아주의 미학이건, 인상파 양식이건 간에 가리지 않고 중심을 장악함에 따라 다양하고 풍부한 이념과 양식의 가능성을 차단시키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김복진(金復鎭)과 윤희순(尹喜淳) 그리고 김용준과 이태준은 조선향토색의 소재주의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김복진과 윤희순은 그에 대한 대안으로 민족과 계급의 관점을 유지하면서 현실과 시대정신의 긴장을 헤아리는 사실주의 정신과 양식을 내놓았다. 김용준과 이태준은 조선의 마음, 조선정조의 외형이 아니라 내면적인 것을 추구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대안은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 김용준과 이태준의 주장은 조선스러운 것의 특징을 '고담(枯談)한 맛, 한아(閑雅)한 맛, 소규모의 깨끗한 맛'이라고 주장했는데 이같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규정은 실제로 가능한 것이 아니어서 김용준의 말마따나 '정신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결코 의식해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뒷날 자연 생장(生長)적으로 작품을 통해 비추어질 것'일 뿐이었다. 또한 김복진과 윤희순의 대안은 사실주의 또는 비판적 사실주의와 같이 부정적인 것들을 고발하고 긍정적인 것들을 강조하는 것이었지만 일제의 폭력정책과 현실적인 경찰력이 엄존하고 있는 이상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특히 눈길을 주어야 할 것은 일제의 정책에 대항하는 사실주의를 선택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화단에 널리 퍼져있었다는 사실이다. 식민지 조선에서 사실주의, 비판적 사실주의가 거의 가능하지 못하다는 사실은 이미 1920년대 후반 김복진이 주도했고 1930년 무렵 정하보(鄭河普)가 앞장섰던 프로미술운동의 무참한 실패에서 증명된 바 있다. 프롤레타리아미술운동에 대한 일제의 폭력과 물리력을 동반한 탄압은 표독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것은 프로미술운동의 중단이 아니다. 그같이 살벌한 탄압으로 말미암아 어떤 미술가도 소박한 수준에서조차 사실주의 이념과 양식을 금기시 하는 분위기를 철저히 확산시켜 놓았다는 데 있다. 프로미술운동과 무관한 작가들인 정현웅, 김만형이 조선미전을 통해 각각 은밀한 방식으로 비판적인 주제의식을 담은 소박한 사실주의 작품을 발표했지만 금세 발견되어 총독부가 철거해버린 일이 그러한 사례이다.

  이처럼 일제의 미학적 이데올로기 공작은 앞서 말한 바의 주변부 지방색 장려와 사실주의 이념과 양식에 대한 철저한 통제라는 두 갈래로 이뤄졌다. 당근과 째찍 병행과 같은 억압과 통제 속에서 조선인 미술가들이 갈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였다. 바로 조선 고전이었다. 프로미술운동으로 6년의 투옥을 마치고 출옥한 김복진이 오세창의 전각(篆刻)과 김정희의 글씨를 조소예술에 들어가는 원리라는 주장에 도달했고 또한 스스로 불상 제작을 통해 조형 감각의 현대성과 고전성을 조화시키는 위대한 업적을 이룩했던 것이다.

나아가 윤희순은 <19회 선전 개평>이란 글에서 동양회화의 유심(唯心) 또는 정신주의를 강조하면서 서양화 기법을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을 거쳐 정신적인 동양인의 혼으로 그것을 융합함하여 장래의 신미술을 이룩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이와같은 김복진과 윤희순의 노선은 고전 또는 전통으로의 회귀 또는 복고주의라고 평가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냉혹한 현실에서 선택한 하나의 길이었다. 통제의 현실에서 현실, 시대, 민족, 계급 따위를 미학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길은 근본주의자의 공격과 전투가 아니었다고 판단했던 것일 게다. 그리고 선택한 길은 피억압 대중집단인 민족 구성원의 공통 미의식을 포함하는 고전과 전통의 길이었던 것이다. 그 길을 선택한 윤희순은 <<조선미술사연구>>를 통해 미술사학의 한 봉우리를 이룩해 냈으며 김복진은 가장 현대적인 조형감각을 구현한 불상을 창작하는데 성공함으로써 계승과 혁신의 미학적 성취를 이룩한 20세기 최고의 조소예술가로 남았다.

  하지만 김복진이 처음부터 고유의 조소예술을 추구했던 것은 아니다. 김복진은 동경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하여 서구조소를 배웠고 또 그것을 민들레 꽃씨처럼 식민지 조선에 퍼뜨려놓았다.  그러던 그가 감옥에서 민족 고전과 전통에 눈떴던 것이니 서구미술 이식의 실패가 아니라 서구미술 이식과 자기화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서구 조소예술을 이식해온 김복진이 그 조형감각으로 민족의 고전 유산인 불상 양식에 접근하여 불상의 새 양식을 이룩해 놓은 것은 동도서기 또는 서도동기의 성취였으며 살아있는 예라고 하겠다. (계속)

 

 

 


아시아중심6 (근현대 한국미술이 걸어온 길)

 

 

서구미술 이식과 수용의 과정 (계속)

1930년대 후반에 이르러 일본화단을 무대로 활동한 김환기(金煥基), 유영국(劉永國), 문학수(文學洙), 조우식(趙宇植)은 추상미술 및 초현실주의 경향을 선택했다. 이 경향은 일본화단에서 전위미술운동이었고 조선인 유학생들이 바로 그 운동의 물결에 합류했던 것이다.

이들의 선택은 개인의 취향이기도 했을 터이지만 중일전쟁 및 태평양전쟁 후방인 일본과 조선에서 일제 군국주의 정권이 펼치는 전제주의 정치 및 파시즘에 대응하는 시대적 요청에의 응답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응답이 기껏 두려움과 힘겨움으로 가득찬 내면의 의식을 폭로하는 것이었고 더불어 전설과 신비의 상징에 의존하는 낭만적인 민족의 감상이었다는 점에서 가치와 동시에 한계까지 아우르는 것이었다.

전시체제 파시즘에 대한 저항이라는 전위미술운동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이들 1930년대 후반, 1940년대 전반기의 모더니스트들에게 적절한 것인지는 훨씬 깊은 헤아림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앞서 말한 몇몇은 물론 이쾌대(李快大), 길진섭(吉鎭燮), 이중섭(李仲燮), 김병기(金秉騏), 이규상(李揆祥)과 같은 아방가르드들은 정작 식민지 조국에서는 별다른 활동도 없었고 또한 영향력도 거의 행사하지 못했다. 단지 몇차례의 전시에 작품을 출품했었을 뿐이다.

오히려 이들에 대한 오지호와 김주경의 비판이 격렬하게 터져나왔는데 전위미술에 대해 '예술감정을 본위로 하지 않는 이지(理智)파의 망동(妄動)' 또는 '이지의 작위(作爲)'일뿐이라고 공격을 가했다. 이에 대해 김환기는 추상미술이란 현대생활의 표현형식임을 강력히 옹호하였다. 이와같은 대립은 공격하는 쪽이나 방어하는 쪽 모두 서구미술을 이식해온 미술인들이라는 점에서 차원이 다른 대립의 구도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특히 대립은 서구미술 이식사에서 지적 긴장과 그 밀도를 높여주는 바가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들 전위미술가들의 귀결점이다. 김환기와 이쾌대, 이중섭이 모두 고전 또는 조선적인 것으로 회귀했다. 심지어 가장 실험적인 전위미술가였던 조우식이 1940년 <고전과 가치>란 글에서 서구 추상미술이란 실제로 십수세기 이전부터 우리 선조들이 힘차게 탐구해온 행적일 뿐이므로 조선 고전미술이 서구 추상미술에 앞선 것이며 따라서 조선의 고전을 사랑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기조차 했던 것이다.

바로 이같은 점에서 뒷날 박문원(朴文遠)은 이 시기의 전위미술가들에 대해 그들의 본질이란 현실 도피의 퇴폐적인 예술지상주의이며 동시에 조선적인 것을 추구하고 수호하려는 정신이라고 규정하는 가운데 바로 그 점이야말로 전시체제를 거부하는 태도였고 또한 식민지미술에 대해 적극적 반항이었다고 평가했다.

서구미술 이식을 거쳐 거의가 조선적인 것으로 회귀하고 있음을 보면, 결국 수용의 자기화 과정은 항상 조선성을 계기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최열의 "아시아중심"에서는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돌아보며 21세기 한국미술을 길을 전망해봅니다.
이 글은 총 21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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