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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e—art—museum

自 然 , 藝 術 , 美 에 對 한 斷 想 (2)

by e-bluespirit 2004. 2. 13.

 

 

 

 

石 丁  南 宮  勳

 

예술과 미

 

예술과 미 사이에는 어떤 것이 목적이고 수단인지 분명하지 않다. 우리는 자신의 예술 속에 미를 찾기 위하여 때때로 선인의 명작을 흠모하거나 그로부터 영양분을 흡수한다. 그래서 전통형식은 소중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선인들이 이룩한 미를 찾다 보면 예술은 망각하기 쉬워진다. 그러므로 위대한 예술가 일수록 자연의 성찰을 통하여 선인의 작품들과 해후한다. 그보다 더 진실하게 선인들을 만나는 방법은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선인이나 후인이나 똑 같은 자연 앞에서 적나라한 모습을 서로 마주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미란 무엇인가? 자연의 생명을 찾아 표출하는 길이다. 자연이 숨쉬고 성장하고 소멸하는 과정 속에서 생명의 비밀을 찾아서 그것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예술의 미인 것이다. 따라서 회화는 화폭이라는 피상적 공간을 창안하여 선과 색에 의하여 자연을 표현한다.

이러한 기법상의 용어를 용필, 용묵, 설색이라고 동양화에서는 말한다. 언뜻 보아 동양화는 모두가 자연의 재현 같지만 재현만도 아니며 재현 그 자체의 의미가 있지않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묘사하고 재현할 때 대상에 대한 친밀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신뢰감이라고 할 것이다. 여기서 대상과 자기 사이에 유기적인 유대감이 생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대상의 재현을 통하여 대상을 죽어있는 물체로 만들지 않고 살아있는 생명체로 만드는 일이다. 대상의 생명파악이며 이른바 "기운생동" 의 요체를 표출하는 일이다. 따라서 동양화에 있어서 산수의 "재현"은 산수의 "표현"(expression) 이라는 어휘가 더욱 적절한 용어라고 볼 것이다.

그러므로 일반인이 서양화에서 말하는 재현의 뜻과 본질적으로 다른 점을 오해하는 것은 흔히 자연의 의미를 잘못 이해한 까닭이다. 선 대의 유명한 동양화를 놓고 서양의 사실화와 비교하여 보라. 같은 자연이라도 햇빛 속에 드러난 풍경과 안개 속에 드러난 산수의 이미지가 어떻게 다르며, 일정한 시선의 한계로 묶여진 유한 공간과 여백을 살리는 무한공간의 확충이 어떻게 다른가를 음미해 보라.

눈에 보이지 않는 자연의 형태를 표현하려고 바람, 안개, 물소리, 아지랑이 등을 넣으면서 그 보이지 않은 시간의 리듬을 얼마나 찾고 있는지 살펴보면 알 것이다. 동양화는 선을 표현함에 있어서 연필이나 펜, 목탄의 용구를 쓰지 않는다. 그것은 일정한 굵기의 선밖에 나타내지 않으나, 끝이 뾰족한 붓은 선의 굵기와 강약과 농도를 자유자재로 표현한다. 가령 사군자중의 난초를 그리는데 붓질이 두 번 가지 않고 몇 번의 필수만으로 난초를 완성하지만 그것을 연필로 그린다고 생각해 보라. 동양화가 노리는 미의 효과를 거들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동양화는 용 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마치 서예가 한 획과 한 획의 연결로서 서자의 미를 이루듯이, 동양화의 미 역시 서화공법의 원리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꼭 필요한 선을 찾아 필수를 황금처럼 아낀다는 옛말은 항상 교훈인 것이며, 필세에 강약의 리듬과 생명을 부여한다는 것은 대상의 생명파악과 연결한다는 논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같은 동양화라도 선이 예쁘고 곱기만 하면 힘이 없고, 필수가 많은 것은 생명의 맥박이 없고, 군더더기 살이 많이 불어난 꼴과 같다. 같은 용필이라도 대상의 중추가 되는 골법을 중요시하는 까닭은 바로 생명 미를 찾아 다니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필의 골법만을 강조하다 보면 대상의 형체만이 남고 부드러운 생명의 기가 사라지기 쉽다.

생명은 강한 것과 부드러운 것의 결합이다. 음양이 상보하여야 만물의 조화로운 생성이 생긴다. 따라서 용필보다도 용묵에 의하여 대상의 살을 붙이고 부드러운 기를 조성한다.

용묵은 붓에 의지하지만 대상이 차지하는 면적에 대한 농담의 부여이기 때문에 사실상 붓의 기능이 약화된다. 농담의 정도에 의하여 어떤 것은 살찌고, 야위고, 강하고, 약하고, 멀고, 가깝고, 습윤하고, 건조하면서 시간의 변화나 유연한 분위기를 한껏 살리는 것이 용묵법 이다.

어떤 사람은 용필에 능하지만 용묵이 약하고, 용묵이 장이지만 용필이 단 한 사람이 있다. 그러나 기법의 순서가 다를 따름이지 용필, 용묵은 안팎의 관계로서 실제로 따로 떼어 생각 할 수 없는 일이다.

설색은 용필의 보조적인 기능을 한다. 그 기능이 용 묵과 같지만 밀접하지 않다. 오히려 설 색이 없는 백묘화나 수묵화가 참다운 동양적 회화 미를 간직한다고 전통적으로 믿고있다. 중국이 채색을 배운 것은 서역으로부터 불교화의 영향이며 대개 인물, 화조, 벽화, 장식 등 호사한 취미의 분위기에 어울려 사용하였다. 그러나 자연의 생성변화, 오묘한 자연의 신비를 표출하는데 아무래도 양성적인 색채보다 음성적인 수묵이 적합하다.

수묵을 위주로 한 남종화가 금벽휘영한 북종화의 기법을 깔본 것은 색채가 갖는 경박성과 정신적인 차원이 낮은 직인 화가들의 작품 속에 많았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설 색은 어디까지나 수묵이 못하는 보조적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색상의 다양성과 깊이를 몰랐던 한계점이라 하겠으며, 서양화가 르네상스 이후에 이룩한 업적과 비교할 수 없는 빈약성을 드러내는 것이지만,

근본적으로 자연의 대상에 접근하는 세계관의 차이라고 볼 것이다. 여기에 동양화의 또 다른 길목이 열려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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