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someone who practices strongly,
even walking, eating, drinking tea, meeting friends,
peeling a ripe persimmon, using the toilet,
walking through the busy market,
feeling the sudden autumn wind on one's face,
watching a passing car on the busy city street -
all of these moments are our practice,
or 'man haeng'.
현각스님의 글 중에서...
<만행·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출간한 파란눈의 현각스님
숭산 스님이 하버드에서 달마 토크 를 진행할 때의 일이다. 박사 과정의 금발 미인이 물었다. “홧 이즈 러브 (What is love)?” 숭산 스님이 되물 었다. “아이 애스크 유, 홧 이즈 라 부(I ask you, what is love)?” 당황 한 여학생은 아무말도 못했다. 큰스 님은 말했다. “디스 이즈 라부(This is love).” 여학생이 여전히 알아 듣 지 못하자 스님은 다음과 같이 덧붙 였다. “유 애스크 미, 아이 애스크 유, 디스 이즈 라부(You ask me, I ask you, this is love)”
-도올 김용 옥의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 중
서울 수유리 화계사에 가려면 한국신 학대 앞을 거쳐야 한다. ‘예수님을 사랑합니다’란 플래카드를 지나면 멀리 일주문이 나타난다. 96년 일단 의 기독교인들이 ‘파란 눈의 사탄’ 을 몰아낸다며 화계사에 3번 불을 놓 았을 때 국제선원의 외국인 스님들은 당장 짐을 싸서 한국을 떠나려고 했 다. 이렇게 닫힌 나라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충격에 빠진 스님들이 불탄 법당을 쓸고 있을 때 한국신학 대 김경재 목사가 찾아왔다. 김 목사 는 대신 사죄하며 불교 강의를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작년 겨울 남원 실상사에 갔더니 ‘성탄절을 축하합니다’란 현수막이 걸려 있더군요. 최근엔 기도의 일환 으로 108배를 하는 수녀님도 보았습 니다. 몇 년 전 계룡산 신원사 동안 거(冬安居) 때는 한국과 이탈리아 수 녀님들이 참가하셨죠. 열린 마음을 가진 분들이 늘고 있습니다.”
서울 수유리 화계사 현각 스님이 35 세의 고백록 〈만행·하버드에서 화 계사까지〉(열림원·전2권)를 펴냈다. 가부좌 틀고 5분도 못앉아 있던 미국 청년이 부모와 여자를 버리고 삼각산 기슭에 선방을 마련하기까지 인생 편 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미국 뉴저 지 태생인 현각 스님의 꿈은 원래 가 톨릭 신부였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부모는 현각 스님에게 수도자의 길을 권했다. 형 제자매들이 아이비리그를 나와 성공 한 여피족으로 월 가를 누비고 있을 때 현각 스님은 예일대와 독일 프라 이부르크대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쇼 펜하우어, 키에르케고르, 에머슨…. 쇼펜하우어의 내재적 초월주의는 가 톨릭의 속박에서 벗어나라고 가르쳤 다.
“유럽에서 돌아온 뒤 뉴욕의 법률회 사에 취직했습니다. 절망의 밑바닥을 헤매던 어느날 브루클린 다리에 몸을 던지려고 했죠. 한겨울이었는데 흑인 거지가 돈을 달라고 하더군요. 주머 니를 몽땅 털어주었더니 왜 그러냐고 묻습디다. 사는 게 재미없다고 대답 하자 오늘이 당신 생일이라며 축가를 불러주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때 흑 인 거지가 관세음보살 아니었나 싶습 니다.”
89년 하버드 신학대학원에 입학한 현 각 스님은 세계 4대 생불로 꼽히는 숭산 스님의 강연을 듣게 된다. 최소 한의 언어로 최대한의 의미를 전하는 작달막한 동양인은 미국인 신학도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현각 스님은 곧 바로 젠 센터에 등록, 수행 생활을 시작했다. 하버드에서 계속 신학을 공부한다는 것이 무의미했다. 스님은 대학원을 휴학하고 비행기표를 끊었 다.
“90년 가을 처음 서울을 찾았을 때 도시를 뒤덮고 있는 새빨간 십자가에 깜짝 놀랐습니다. ‘여기가 불교의 나라 한국 맞아. 필리핀인데 스튜어 디스가 잘못 말한 거 아냐.’ 김포공 항 도착을 알리는 방송이 흘러나올 때 무척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로부터 10년, 베토벤과 말러를 좋 아했던 ‘하버드 스튜던트’ 폴 뮌젠 은 정선의 진경산수와 황병기의 가야 금을 좋아하는 현각 스님으로 바뀌었 다. 미국에 머무를 때면 한국식당을 찾아가 된장찌개와 돌솥비빔밥으로 향수를 달랠 정도다. 출가 당시(92년) 스님을 이해하지 못했던 부모님들도 법문집을 읽게 됐다. 그러나 〈뉴욕 타임스〉 등에서 조계종 분규 기사를 보곤 “네가 있는 한국이 이런 나라 냐”고 물을 땐 정말 할 말이 없어진 다고 스님은 말한다.
“김 목사는 그을린 불상을 바라보며 불교는 큰 마음이고 기독교는 작은 마음이니 이해하라고 했습니다. 그러 나 본디 마음은 하나입니다. 크고 작 은 것을 나누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 다. 저는 부처가 아니라 예수 때문에 출가했는지 모릅니다. 예수는 ‘누구 든지 나를 따르는 자는 부모와 아내, 자녀와 형제를 버리고 오라’고 했습 니다. 마음을 고요히 갖고 깨달으십 시오. 바로 당신이 신이라는 것을(Be still and know that I am god). 이는 구약에 나오는 하느님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윤승아 기자(a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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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보헤미안의 독서일기"에서 현각 스님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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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각스님 -- 卍行,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 --------------------------------------------------------------------- <열림원 간>
먼저, 이 책을 읽게 된 배경은 이렇다. 작년 가을인가 우연히 케이비에스 일요스페셜인가에서 한 외국인 스님을 만났다. 서양인으로써 한국에와서 불 교를 배우고 있는 한 스님에 대한 다큐멘터리였는데 그때의 인상이란 참으로 강렬한 것이었다. 꼭 한번 만나보고 싶을 정도로. 다른 것은 다 둘째치고 논 밭 사이를 걸어 만행중인 스님의 모습에 가슴이 싸해졌었다.
책의 내용은 이렇다. 책은 1.2권으로 돼 있는데 1권은 현각이 출가하기까 지의 배경이 쓰여져 있고 2권은 불교에 귀의하여 깨달음을 얻어가는 과정에 관한 기록이다.
현각은 미국 중산층의 전통적 천주교도 집안에서 태어났다. 책의 전반부는 신부가 되려고 마음먹던 현각이 성경에 관한 어려가지 의문들에 괴로워하며 그 해답을 찾아나서는 것으로 시작된다. 성경의 여러가지 모순들에 부딪히며 그 답을 얻기 위해 성당과 부모들께 늘상 질문을 던지지만 어느 누구도 완벽 한 진리의 답을 주기 보다는 무조껀적인 믿음만을 강조한다. 책을 읽다보면 현각이 품는 의문들이 가장 기초적이고 사소한 의문들임을 알 수 있다. 왜, 타인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교회는 온갖 전쟁의 선봉에 서 있는가. 사탄도 악 마도 다 신이 만들었는데 왜 신은 전지전능하다면서 그같은 것을 만들어 인류를 학대하는가. 등등등. 예수와 하나님 안에서 진리를 발견하지 못한 현각은 여러가지 서양 철학에 심취한다. 철학 안에서 진리를 발견하기위해서 였다. 하지만 이 역시 허사였다. 그 어떤 세상의 학문도 종교도 진리에 명확한 답을 주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우연히 하버드에서 한국의 숭산스님 강의를 듣게되고 그동안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진리를 발견했다는 기쁨으로 부모와 사랑했던 여인을 떠나 수도자가 된다는 이야기이다.
책 내용은 대강 이런 것이고, 글을 좀 더 객관적으로 들여다보자. 현각의 여정은 전형적인 그리스도 교인의 개종 과정이다. 생각없이 종교를 믿거나, 부모를 따라서, 혹은 무조껀적인 믿음에 강요되어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참 바보라 생각한다. 그런 맹목적 믿음은 공산주의나 파시즘과 다를게 무엇 있겠는가. 현각은 자신이 믿는 그 리스도교에 계속해서 질문을 던진다. 그때마다 관계된 인물들은 귀신들렸음으로 몰아 부치거나 무조껀 믿음을 가지라고 강요한다. 요즘 교회 일각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형적인 형태이다. 또한 '나 이외의 다른 신을 가지지 말라'는 십계명의 잘못된 해석은 오늘날 얼마나 많은 피를 부르고 있는가. 세상을 사랑으로 다스리라고 만든 종교가 수많은 전쟁으로 피를 부르고 있다. 자신이 만든 종교로 인해 세상이 이렇듯 혼란스럽게 빠지리란 것을 예견하지 못한 예수의 잘못은 크다. 생각해 보면 의외로 간단하다. 예수가 하나님 이외의 신을 부정한 이유는 당시 로마인들에게 핍박받으며 여러가지 신을 섬기고있던 유태인들을 단결시키기 위해서 했던 필연적인 말이었을 게다. 예수 생시에 행했던 가르침의 대부분은 훗날 제자들의 순전한 기억력에 의해 다시 쓰여졌다. 게중에는 계시를 얻어 완벽한 자동속기가 된 것도 있겠으나 대부분 훗날 재구성한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요즘 교회는 어떠한가, 성경의 한자 한 자를 믿줄 그으며 저마다 다른 교리를 주장하고 멋대로 해석하여 각기다른 종파를 만들어 가는 모습들이 가히 가관이다. 더구나 웃긴 일은 그 신도들이다. 어찌하여 성경은 각기 제멋대로 해석한 뿐인 자신들의 종파만이 유일한 대안처럼 떠들며 다른 종파나 다른 종교를 비방해 대는지 참 한심한 일이다. 여기서 예수님과 하느님의 가르침은 따르돼 교회들의 주관화된 가르침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현각의 깨달음은 옳은 것이었다.
참된 종교인은 지하철에서 피켓들고 소란을 피우지 않는다. 그럴 시간에 땀흘려 노동을 하고 그 노동의 대가로 어려운 이웃을 돌볼 것이다. 참된 종교인은 자신들의 가르침만을 가지고 안하무인이 되지 않는다. 이웃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진정한 가르침은 종교적인 벽이 있을 수 없다. 진리는 하나인 것이다. 종교는 각기 다른 길, 다른 방편일 뿐, 산 정상에서 결국 길은 하나로 만나진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존재를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단지 그 수많은 세월을 거치며 성경의 내용이 그대로 이어져 내려왔다고 생 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사막에서 발견된 2000년 전 양피지에 쓰여진 성경과 오늘날의 성경은 많이 다르다. 아비뇽의 이슈, 종교 개혁 같은 역사적 사건 속에서 성경은 통치자들의 입맛대로변질되었을 가능성은 다분하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이브가 뱀의 꼬임에 넘어가 무화과를 딸 것을 미리 몰랐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것은 단지 하나의 신화일 뿐이다. 미리 알았다면 사람을 사랑하는 신은 뱀 따위를 창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간이 무슨 신들의 게임도 아니고 불지옥으로 멸망시킨다는 엄포는 코메디에 가깝다. 교회는 이같은 의문들에 그것은 신이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었기 때문이다라는 해괴한 설명을 하고 있는데 이것도 코메디다. 수많은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죽여가면서 신은 이와같은 일에 분명 책임을 저야 한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자, 나의 이와 같은 생각이나 교회의 이런 가르침들, 현재를 사는 사람들의 생각 자체가 얼마나 우스운 상상들인가. 성경의 상당 부분은 신화일 뿐이며 예수의 가르침은 유태인들 사이에서 시작된 민족적 종교임을 알아야 한다. 그것들이 교회의 세력들이 커지면서 역사적으로 이용되고 변질된 것이다. 오늘날 이와 같은 사실들을 망각한 채 오도되어 자행되고 가르침되고 있는 하나님의 가르침은 얼마나 잘못된 일인가. 성경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고 가르치는 행위는빨리 사라져야 한다. 글자 그대로 해석된 성경의 천동설은 얼마나 과학의 발전을 저해하며 암처럼 인류를 망쳐왔는지를 생각하자. 하나님의 말씀을 제멋대로 해석하고 교회를 사업의 수단으로 삼고 있는 그리스도교 이름을 내건 이들의 90% 이상은 언젠가 그들이 조장한 피의 대가를 치를 날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불지옥과 심판은 바로 그들 그리 스도교도들이다.
불교를 만나면서 현각은 우선 자신이 품고 있던 여려가지 의문들에 대한 해답이 한갖 보잘것없던 동양 사상 속에 숨어 있는 것에 놀란다. 성양에서는 근세까지 믿고 있던 천동설이 불경에선 이미 2000년 전에 당연히 지동설로 설명 돼 있는 것에 놀란다. 자신의 종교를 믿으라고 강요하지도 않으며 다른 진리를 배척하고 스스로를 우상화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자기 자신을 낮추라 는 말들에 놀란다. 그 배경에는 숭산스님이라는 큰스님이 존재한다. 요즘 일부 눈먼 중들이 난리를 치고 있기는 하나 불교의 사상에서 의문을 찾아보기란 여려운 일이다. 마침내 현각은 보장된 장미빛 미래를 던져버리고 스스로 깨달음을 찾아 한국땅에서 고행을 시작한다.
-- 자기 자신을 찾아 떠나는 길, 만행. 그 숭고한 깨달음의 길로.
그렇다고 이 책이 완벽한가? 아니다. 현각의 종교를 바라보고 비교하는 눈은 실로 정확하다. 아니, 비단 현각뿐만이 아니라 지각있는 사람들이라면 이쯤의 분명한 진리의 자잘못은 볼수 있을 것이다. 현각은 개종을 했다고 해서 그리스도를 버린 것이 아니다. 그는 아직도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읽는다. 타인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만이 최고라는 가르침은 얼마나 잘못된 일인가. 현각은 글의 곳곳에서 깨달은자의 전 형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몇 가지는 불만이다.
우선은 현각의 지나친 엘리트의식이다. 글 전체에서 수천번은 더 등장하는 말이 '최고'라는 말이다. 현각의 부모 형제는 말할것도 없고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이 최고의 엘리트에 최고의 미남에 아름다운 여인이며, 등장하는 학교도 최고의 명문에 엘리트들 뿐이다. 이런 것들은 읽으면서 독자들에게 상당한 거부감을 준다. 현각 스님이 깨달음을 얻어 구도를 떠나면서 많은 것을 버렸지만 아직은 집어 던져야할 것이 남아 있음이다. 선의 기본 세계는 명예도 최고도 없는 아무것도 없는 무아의 경지라고 들었다. 그 무아의 안에서 자신을 들여다 보는 것이다. 자신을 보기위해서는 이러한 껍질들을 먼저 벗어던져야 한다. 현각은 말할것도 없이 최고의 잘생긴 외모에 최고의 학교인 하버드를 나왔고 역시 최고의 선법통을 잇고 있는 숭산 스님의 수제자임을 강조한다. 진정한 깨달음을 구하는 자라면 이 최고의 법통 따위가 도대체 무에 소용이 있겠는가. 이런 자부심은 하루 빨리 벗어던져야 할 것들이다. 최고의 법통과 시대가 말하는 최고의 고승 밑에서 출가하지 않아도 개천바닥에서도 깨달음을 얻고 해탈할 수 있는것이 불교의 가르침이 아닌가.하지만 이런 거부감도 독자 분들은 너그럽게 이해하며 바라보아 주어야 하겠다. 왜냐하면 이 글은 전기문의 성격이 짙다. 만 약 현각이 밑밑한 가정에서 태어나 밑밑한 삶을 살다가 불교에 귀의 했다면 도대체 세상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과 다를게 뭐 있겠는가. 현각의 삶을 구체화시키고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앞부분의 자랑과 자만에 가까운 설명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낮추라는 근본적 가르침을 따라 개정판에서는 조금 이러한 최고 엘리트 의식이 절제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무려나 이 책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다. 많은 계층의 다양한 사람들이 글을 읽을 것이다. 기왕에 비싼 돈들여 사 읽은 책이니 그냥 던져버리지 말야야 겠다. 이 책을 읽고 폭넓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적어 보겠다.
만약 글을 읽은 당신이 그리스도교인이라면 그동안 당신들의 교회에서 세뇌된 대로 '뭐 이런 사탄이 다 있어' 하며 책을 던져버릴 것이다. 하지만 눈을 감고 좀 더 깊게 생각해 보시자. 사탄 운운 한다면 그러는 당신이 바로 어리석고 눈멀은 엉터리 교육에 세뇌된 가슴 아픈 사탄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진리를 찾는 일에 자신들의 종교만이 선이고 나머지는 사탄이라는 가르침을 예수님은 하지 않았다, 그것은 당신들의 종파에서 당신들의 우두머리들이 제멋대로 교회를 확장하며 떠들고 주장하는 주장일 뿐이다. 하나님의 근본 가르침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만 옳고 타 종교의 가르침은 사탄이라는 가리침을 아직도 눈멀어 믿고 끄덕이며 박수치고 노래하고 있다면 당신은 가장 위대한 역사의 코메디 현장에 있는 것임을 명심하자.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가르침은 오만잡신을 믿던 유대인을 통합하기위해 만들어진 어쩔 수 없는 하나님의 방편이었을 뿐이다. '태극기 아래에 한 민족이여 단결하자'라고 일제 치하에 외쳤던 독립운동가를 생각하면 된다. 태극기 말고도 국기는 수없이 많다. 태극기가 오로지 유일한 지구의 국기라고 믿는 가르침은 하나님 조차도 가슴아파하실 일이다. 그 전에 네 이웃을사랑하라는 가르침에 눈을 떠 보자.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좆는다면 피를 부르는 종교 전쟁은 더이상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그렇다고 현각처럼 개종할 필요는 없다. 당신들의 교회와 테두리와 유명한 목사와 큰 교회를 좆는 엉터리 믿음을 버려야 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엉터리 설교를 버려야 한다. 개신교든 천주교든 나아가 침례교든 감리교든 여호아의 증인이든, 장로교든 다 같은 하나님의 종교이다. 자기 세력을 확장하 고 신도 모으는 일에 급급한, 타 종교를 비방하는 그런 목회자가 당신의 교회에 있다면 그가 바로 계시록에 나오는 말세의 사탄이다. 그런 믿음을 좆는 당신이 참으로 가슴 아프다. 조용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이웃을 위해 봉사하라. 아주 가끔 주변에서 거의 청교도적인 청빈한 삶을실천하는 그리스도교인들을 본다. 그러나 그런 이들의 입에서 불교는 사탄이다 라는 말을 들으면 가슴이 무너진다. 그들의 잘못이 아닌 것이다. 그들 교회에서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인데 참으로 마음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좀 더 큰 가르침이어야 한다. 하물며 사탄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불교 신자라면 더 많은 생각을 해야 할 것이다. 작금 사찰과 종파들은 부패할 대로 부패했다. 유명한 절, 유명한 스님을 좆은 믿음 형태는 하루빨리 버려야 한다. 자신의 내부를돌아보고 스스로의 삶 속에서 선을 실천해가는 것이 진정한 석가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일일게다. 기독교도 들의 일방적인 공격(사찰 파괴나 방화)에 민감하게 맞밭아 싸우면 안 된다. 그러면 똑같은 그들과 다를 바가 없다. 좀 더 넓은 깨달음의 마음으로 당할 수 있는데까지 당해주자. 분개하지도 말자. 그들은 그들 스스로 잘못된 믿음을 행한 대가를 치룰 것이다. 그들 스스로 깨달아 스스로 멈추게 하는 것이 진정한 자비의 실천이 아닐까.
만행을 읽으며 짚고 넘어가야할 사람이 숭산 스님이다. 법정 스님과 마찬가지로 이 시대 진정한 가르침을 주고 계시는 불교계의 스승이 숭산 스님이다. 명예와 돈을 좆는다면 그건 이미 스님이 아니다. 홀홀 단신 미국으로 건너가 이제는 러시아와 아프리카까지 한국 선불교의 가르침을 설파하고 계신 숭산 스님의 위대한 가르침은, 단지 개인의 욕심이 앞섰다면 불가능한 일이 었을 거다. 진정으로 세상에 가르침을 전하고 중생들을 구제한다는 마음이 있었기에 그같은 역사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런 차원에서 숭산 스님이 썼다는 '선의 나침반'은 꼭 읽어볼 만한 책일 것이다.
세계적으로 교회 십자가에 야광네온을 단 교회는 우리나라 교회가 전무하다고 한다. 같은 종파의 교회 조차도 자신이 짓고 있는 교회의 옆에 있는 교회보다는 더 높게 십자가를 올리고 크게 지으려고 하는 게 한국 교회다. 교회가 크고 웅장하고 신도가 많고 그럴수록 성령이 가깝다는 믿음, 그런 역사를 할수록 하나님과 가깝게 된다는 목회자들의 그릇된 생각, 단지 필설로 표 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아플 뿐이다. 달동네에 수입 대리석으로 높이 높이 십자가를 올리기 보다는 그들보다 낮은 높이와 울타리로 한국 교회는 돌아가야 한다. 목회자들아, 초발심으로 돌아가자. 그럴수록 천국은 멀다.
교회의 가장 큰 잘못된 가르침은 천국사상이다. [하나님을 믿고 천국에 가자]는 이 말이 얼마나 어불성설인가. 그럼 천국이 없다면 개판으로 살겠다는 말인가. 천국에 가자고 이웃을 개종시키고 천국에 가자고 착한 일을 하자니? 초동 교육 이상을 받고도 이런 믿음으로 교회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기도 시간에 자신의 한심한 믿음을 되돌아 볼 필요가 있겠다. 천국과 지옥은 절대로 따로 있지 않다. 악한 영혼들이 모인다면 그곳이 곧 지옥이고 선한 영혼들이 모인다면 그곳이 천국일 게다. 우리 인간은 자신의 몸을 가꾸기 위해 운동을 하고 식사 조절을 하고 성형을 하며 화장을 한다. 종교란 영적 성숙을 위한 운동이요 식사 조절이며 화장이다. 우리는(인간의 영혼은) 전원해탈(선한 깨달음의 경지)이라는 종착역을 향해 가는 기차를 탄 무리들이다. 석가나 예수는 저 종착역에 먼저 도착한 사람들일 뿐이다. 결국은 모든 영혼이 이르게 되는데 그 지름길이 깨달음을 빨리 하는, 다시 말해 영혼의 진화화과정-- 영적 성숙인 것이다. 인간은 수없이 죽고 남을 반복하며 영혼이진 화해 가는 것이다. 죽고 남은 기차를 타고 종착역을 향해 가는 과정이다. 영적 성숙의 과정을 가르치는 한 것이 석가과 예수님의 사상이다. 그것의 가장 근본이 되는 과정은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이다. 자신을 향한 기도, 자신 이 천국에 가기위해 믿는, 그렇게 가르치는 자들은 죄다 거짓 선지자들이다. 이웃을 위해 기도하고 이웃을 위해 봉사하며 가난한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삶 속에서 자연스레 영적인 성숙이 오고, 그 영적인 성숙은 종착역(천국) 을 향해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의 영혼을 질러가게 하는 것이다.
물론,마치 자신이 뭐라도 되는 양, 이런 말들을 뇌까리는 내 자신 역시 인간이기에 삶이 옳곧지만은 않다. 하지만 가슴 속 하고픈 말들이 가득해서 본의 아니게 일부뿐인 잘못된 종교인들을 싸잡아 전체까지 욕보인 꼴이 되었다.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자. 모두가 잘되자고 옳은 취지로 예까지 질러 온 말들이다. 단지 조금 오버하거나 비껴가기는 하였겠다.
-- 그렇다면 나는 무엇때문에 긴 시간을 투자하여 보상 없는 이런글을 예 까지 끌고 왔겠는가?
그리하여 생각난다. 파란 눈에 꺼중한 큰 키. 우리들의 탁발승 현각--- 남루한 옷차림에 산을 오르고 강을 건너 우리들의 산야를 질러 질러 깨달음을 찾아 자신의 내면 속으로 걷고 걷는 그 아름다운 만행길, 그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뒷모습이…….
2000년 1월 3일 길 떠나는 보헤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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