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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e—live—Library

성에 - 김형경

by e-bluespirit 2007. 8. 19.









아 쉽 고

허 망 하 고

박 탈 당 한

것 들

 

 

이 세상에는 섣불리 맞닥뜨려서는 안 된다고 알려진 크고 작은 금기들이 존재하는데 그중에는 요리사의 손톱, 작가의 맨얼굴, 옛사랑의 현재 모습 같은 것들도 있다.

 

그것들이 일상과 무관한 영역에서 서로 뒤섞이고 충돌하면서 여전히 화학 작용을 일으키고 있었다.

 

 

보 이 지  않 는

존 재 와

관 련 된 일

 

 

연희는 그날의 눈보라가 검은 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진 흰 투망 같은 것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그 말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위력은 연희를 세중에게 결속시키는 거칠고 질긴 밧줄의 기능이었다.

 

 

마 음 은

어 디 에 도

정 착 하 지

않 았 다

 

 

여기는 겨울에 눈이 한 삼십 센티미터 쯤 쌓인다.

 

산촌에 눈이 오니 돌길이 묻혔어라

시비를 열지 마라 날 찾을 이 뉘 있으리

밤중만 일편 명월이 긔 벗인가 하노라.

 

시조가 절로 읊어지는 밤이다.

 

뫼 밑에 사자 하니 두견이도 부끄럽다

내 집을 굽어보며 솥 적다 우는고야

저 새야 세상살이보다 그도 큰가 하노라.

 

일할 때, 먼 길 갈 때 혼자 시조를 읊으면 내 마음속에 우리 조상이 자리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겨 울 산 에

서  있 는

참 나 무 의

생 각

 

 

만약 그 여자가 산속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저 집에 살던 남자는 죽지 않았을까?

 

참나무는 인간들이 간혹 식물성이라는 말을 동물성에 대한 반의어로 사용하면서 식물성이란 탐욕스럽지 않고, 덜 껄떡대며, 심지어 담백하고 우아하며 명상적이라는 의미까지 담아 말할 때 좀 우스웠다.

 

정강이까지 눈에 묻은 채 죽은 듯한 나날을 보내면서 참나무는 자신이 죽은 남자를 부러워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 칠 고

광 포 하 고

휘 몰 아 치 는

것 들

 

 

황원, 세중은 연희에게 등을 보인 채 멀어지고 있었고 세중 쪽에서 불어오는 황원의 모래 바람은 세중을 향해 소리치는 연희를 감싸고 지나갔다.

 

'사랑은 인생에 한 번이면 충분하다.'

 

"그 최초의 아침에, 아담과 이브는 뭘 했을까?"

 

그 생각은 막연한 예감이 아니라 거부할 수 없는 신탁 같은 데가 있었고 그 순간 연희는 한 사람의 평생을 지배하는 어떤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 랑 은

인 생 에

한  번 이 면

충 분 하 다

 

 

어디나 삶의 풍경은 똑같고 삶은 또 반복되는 게 분명하다. 자연을 보고 있으면 틀림없이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반 넘어 늙었으니 다시 젊든 못하여도

이 후나 늙지 말고 매양 이만 하였고자

백발아 너나 짐작하여 더디 늙게 하여라.

 

그 책이 투르게네프의 <사냘꾼의 수기>였다

 

사람이 사람 그려 사람 하나 죽게 됐네

사람이 사람이면 설마 사람 죽게 하랴

사람아 사람을 살려라 사람이 살게.

 

이 시조는 겅말 질감이 느껴진다.

 

벼슬을 저마다 하면 농부 할 이 뉘 있으며

의원이 병 고치면 북망산이 저러하랴

아이야 잔 가득 부어라 내 뜻대로 하리라.

 

나는 그저, 이 땅에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처럼 살다가 가는,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비쳐지기를 바란다. 내가 원해서 태어난 것도 아니다.

 

 

박 새 가

알 고  있 는

몇  가 지

사 실

 

 

참나무는 만약 그 여자가 산속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저 집의 남자가 죽지 않았을 거라 믿는 모양이지만 박새는 좀 생각이 달랐다. 박새가 참나무보다 한 가지 더 아는 게 있다면 동물들의 짝짓기에 관한 것이었다.

 

박새가 보기에 암컷들에게는 틀림없이 어떤 마력이 있는 것 같았다.

 

짝짓기 행위 자체가 죽음으로 이르는 과정인 경우도 많았다.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 떠오르는 사람이 바로 사랑하는 사람이래요. 자기가 누구를 사랑하는지 모를 때는 아름다운 풍경을 찾아가 그 앞에 서 보면 알 수 있대요. 그 풍경을 누구와 함께 보고 싶은지."

 

그런 때 박새는 인간들이 안쓰러웠다. 어떤 생물의 본성에도 맞지 않는 일부일처제라는 제도를 만들어놓고 야생의 생물들에게 그 잣대를 들이대는 행위는 일종의 보상심리나 히스테리처럼 보였다.

 

"도시에서 살 때 가장 나쁜 것은 햇빛이나 바람이나 강물을 마치 원수처럼 대하게 된다는 거였어요."

 

"도시에서 살 때 또 한 가지 나빴던 일은 인간이 선량하고 세상이 따뜻한 곳이라는 믿음을 잃게 된다는 거예요."

 

무심히 여자의 말을 듣던 박새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저 한심하고 바보퉁이 같은 인간 같으니라구.......

 

짝짓기를 향해 몰두하는 수컷들의 본성에는 죽음을 향해 질주하는 직선도로가 들어 있었다. 박새는 여자를 사이에 두고 같은 전율을 느끼고 있는 남자와 사내를 바라보면서 저들 세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야 말겠구나 싶은 예감으로 몸이 떨렀다.

 

 

미 끄 러 지 고

헝 클 어 지 고

어 긋 나 는

것 들

 

 

연희는 그날이 최초의 아침인 것만 같았다. 파충류에서 진화하여 처음 뭍에 발을 디뎠을 때의 포유류의 아침이거나, 사바나의 숲에서 나와 황원을 헤매게 된 유인원의 아침이 그랬을 것 같았다.

 

"신기해. 그게 저절로 열리고 물기가 맺히고, 마치 생각을 가진 생명체 같은 표정을 짓는다는 게......."

 

"아담과 이브가 에덴에서 죄를 지었을 때 그것은 곧 갈등을 자초�다는 뜻이잖아. 에덴에서 쫓겨나면서 인간의 삶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갈등이 생명체의 본질이고 삶의 에너지가 생기는 근원이라는 뜻일 거야. 갈등은 틀림없이 연구해볼 만한 과학적 대상이야."

 

"갈등 자초론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사랑 같아. 일단 사랑으로 돌입하면 엄청난 긴장과 고통, 심리적 소용돌이가 따르는데도 사람들이 간단없이 사랑을 향해 머리를 들이미는 이유는 바로 그곳에서 삶의 에너지가 나오기 때문일 거야. 사랑에 빠질 때 느끼는 기쁨과 슬픔, 환희와 환멸, 기대와 좌절....... 그 모든 상반된 감정들이 길항하는 틈바구니에서 생의 에너지가 생겨나니까."

 

"갈등을 사랑하라!"

 

찬바람이 밀려들어 그 허망하고 부질없고 가당찮은 소망을 단숨에 날려버리기를 바랐다.

 

"아니야, 나를 믿지 마."

 

 

한 십 년

잠  속 에 서

총 소 리 가

났 다

 

 

여기서 시계는 필요하지 않다. 몸의 감각으로 하루를 살아간다.

 

해 다 져 저문 날에 지저귀는 참새들아

조고마한 몸이 반 가지도 족하거든

하물며 크나큰 수풀을 새워 무엇하리요.

 

종교는 없지만, 중처럼 살고 싶지 않지만 지금은 중처럼 살고 있다. 내 종교가 불교가 되었다.

 

서산에 일모하니 천지에 가이 없다

이화에 월백하니 님 생각이 새로웨라

두견아 너는 누굴 그려 밤새도록 우나니.

 

가슴이 아주 천천히 가라앉고 나면 그 끝에 웃음이 피어났다. 몇 번 속고 난 다음에야 이제는 피식 웃게 되었지만.

 

 

청 설 모 가

이 해 할  수

없 었 던  것 들

 

 

참나무는 여자의 등장이 모든 불행한 일의 사단이었을 거라 말하고, 박새는 짝짓기를 향해 몰두하는 수컷들의 본성에 죽음의 욕망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지만 청설모는 생각이 달랐다. 청설모는 그 일이 생긴 것이 평소에도 자신이 잘 이해할 수 없던 인간들만의 특별한 생태나 습성과 관련된 게 아닐까 싶었다.

 

여자는 산에서 거두는 것은 무엇이든 우선 산에 바쳐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청설모가 짐작하기에 그런 때 인간의 마음속에는 굴곡 심한 거울이 있어 어떤 외부의 사물이든 그 거울을 통해 자기가 원하는 대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청설모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생물들이 먹이를 구한다는 말은, 보다 직접적으로 표현한다면, 다른 생물을 사냥해서 그의 주검을 먹는다는 뜻이었다.

 

청설모가 요즈음 먹는 알밤이나 도토리 역시 밤나무와 참나무가 봄부터 여름까지 온 힘을 기울여 키워낸 그들의 자식들이었다.

 

청설모가 보기에 인간 역시 그 산의 먹이 사슬 중 일부이고, 그 중에서도 가장 꼭대기에 위치하는 것 같았다.

 

바람이 한 차례 숲을 흔들 때마다 숲에서는 파도 소리가 났고 뒤이어 낙엽들이 우수수 떨여져내렸다.

 

청설모가 저들에게 바라는 게 있다면 단 하나였다. 산 속으로 짝짓기를 하러 오더라도 도토리나 밤을 주워 가지 말았으면 하는 거였다.

 

 

말 할  수  없 는

것 에  대 한

이 야 기

 

 

그때 세상은 아주 멀리 있었다. 그 산속에서 연희가 느끼는 세상이란 눈 덮인 산천처럼 모호하고, 밤낮이 바뀌는 일처럼 기계적이고, 문 밖을 지나가는 바람처럼 사소했다.

 

무엇보다도 연희는 외부에 존재한다고 느꼈던 그 모든 타인들의 존재가 본디부터 자신의 내면에 있던 자아의 일부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자난 며칠간 하고 있었다.

 

"내 생각에 인류가 발명한 두 번째 히트 상품은 틀림없이 유토피아야. 무릉도원이나 양산박이나 파라다이스 같은 곳."

 

"그래도 인간에게 유토피아를 비롯해 이런저런 환상이 필요한 이유는 짐작할 거 같아. 갈등 자초론에 관한 게 아닐까 싶은 거지. 현실과 대립하고 길항하면서 생의 에너지를 만들어내기 위한 기제로서 환상이 동원되는 게 아닐까 하는 거."

 

"그럼 첫 번째는 뭐라고 생각해?"

 

"사랑."

 

'어리거든 채 어리거나 미치거든 채 미치거나, 어린 듯 미친 듯 아는 듯 모르는 듯, 이런가 저런가 하니 아무런 줄 몰라라.'

 

오직 죽음만이 체감되는 그 산속에서 성은 유일하게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행위, 유전자를 남겨서라도 계속 살고 싶은 가열찬 생존 욕망의 한 형태였을 것이다.

 

 

시 조

한  수 로

하 루 를  산 다

 

 

육 년을 여기 와서 사는데 일 년에 방문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오늘도 좋은 날이요 이곳도 좋은 곳이

좋은 날 좋은 곳에 좋은 사람 만나 이셔

좋은 술 좋은 안주에 좋이 놔이 좋애라.

 

그 여행을 끝내고 났을 때 마음이 많이 넉넉하고 편해져 있었다.

 

어리거든 채 어리거나 미치거든 채 미치거나

어린 듯 미친 듯 아는 듯 모르는 듯

이런가 저런가 하니 아무런 줄 몰라라.

 

나는 모든 걸 관망할 뿐이다. 여지껏 물거품으로 살아왔고 끝까지 그렇게 살 것이다.

 

가을에 감자 캘 때 어쩌다 고개를 들면 파란 하늘 하늘에 백두산이 하얗게 떠 있었다. 한 폭의 그림이다.

 

 

바 람 은

투 신 하 는

노 을 을

보 았 을  뿐

 

 

바람은 참나무와 박새, 청설모가 저마다의 시각으로 그 사건을 보고 저마다의 틀 안에서 저들의 죽음을 분석하는 얘기를 들었다. 하지만 바람은 그들이 열거한 모든 이유가 한정된 육체 속에서 유한한 생을 살아야 하는 생물들의 언어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저 강이나 대지처럼 영원히 살아야 하는 바람은 저들에게 일어난 모든 문제가 그들 생이 지닌 유한성 때문이라고 믿고 있었다. 유한하지 않다면 영원히 살고자 하는 욕망을 품지 않았을 것이고, 불멸에의 욕망이 없다면 그토록 초조하게 자식을 갖고 싶어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람이 보기에 저 유한한 생명체들에게 산다는 것은 시간을 상대로 내기를 하는 일임에 틀림없었다.

 

유한하지 않다는 사실은 자주 끔찍하다. 불멸을 꿈꾸는 모든 생명체에게 바람은 그것이 얼마나 지루하고 막막하고 숨 막히는 일인지 말해주고 싶었다. 불멸하는 바람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저 아름다운 봉숭아나 맨드라미도 실은 눈꼽만한 까만 씨앗에 불과하던 때가 있었고, 저 우람한 참나무도 손톱만한 도토리이던 시절이 있었다. 마당에 누운 세 사람에게 바람이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다만 그것이었다.

 

 

빛 나 고

충 만 하 며

서 러 운  것 들

 

 

인간은 환상 없이 살 수 있는가.

 

"소비 자본주의의 전시장 같은 곳이지."

 

"그때, 그렇게 떠났던 건....... 도피였어. 충격적인 경험으로부터, 꿈을 잃은 이 땅으로부터, 무력감에 빠진 자신으로부터....... 달아난거였어. 무엇보다도, 압도적으로 밀려오는 사랑으로부터....... "

 

환상은 손에 넣는 순간 즉시, 필히 환멸로 바뀌고 말 것이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 순간 모든 것이 다 완성된 것 같았다. 십 년 이상 지속되어온 어떤 환상의 결미가 마무리되고, 의식의 후미진 곳에서 딴살림을 차린 그것들이 단단히 제자리를 잡고, 또한 그것들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아낸 것 같았다. 물속 같고 진공 같은 실내의 어느 틈을 비집고 햇살과 바람이 쏟아져 들어오는 듯했다.

 

 

 







 

 

 김형경

1960년 강릉에서 태어났으며 강릉여자고등학교를 거쳐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추리 소설을 좋아했던 작가의 어렸을 적 꿈은 탐정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탐정이 되기가 어려웠고, 꿈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남은 것이 작가였다. 성장기 때 책을 좋아한 작가는 "나도 책을 쓰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가지고 국문과에 진학했지만 습작하는 시기에 자신에게 재능이 있는지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류시화나 이문재 같은 경희대 국문과 78학번 동기들은 모두 고등학교 때부터 문학으로 스타였다. 이런 친구들 사이에서 기가 많이 죽었다고 작가는 말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작가로 하여금 책도 많이 읽고 보다 성실하고 열심히 글을 쓰게 만든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1983년 『문예중앙』에 시로, 1985년 『문학사상』에 중편 「죽음잔치」로 등단했다. 그녀는 국민일보 1억원 현상 공모 당선작인『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로 독자들의 뇌리에 `김형경'이라는 이름을 굵게 새겨 놓았다. 『새들은 제이름을 부르며 운다』는 정치적으로 암울했던 80년대를 지나온 젊은이들의 사랑과 고뇌, 그리고 그 시절의 상처를 보듬고 현실을 살아가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그린 장편소설이다. 정치적으로 암울했던 80년대를 거쳐, 급격하게 변화한 환경과 자기 한계에 부딪힌 젊은이들이 삶의 진정성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겪는 고뇌와 좌절, 예술과 현실 등의 묵직한 주제를 섬세하고 아름답게 묘사한다. 

그녀의 작품 『피리새는 피리가 없다』는 언더그라운드 대중음악가수들의 세계를 소재로 한 장편소설로서 30대 중반의 평범한 주부인 영숙이 10여년 전 언더그룹의 가수로 일하던 시절을 회상하는 내용이다. 밤무대에서 일하다 기획자에 의해 화려한 스타가 되는 영숙은 가요계의 추악한 실상을 겪게 된다. 자신의 파란많은 체험을 바탕으로 한 그의 두 번째 장편인 『세월』은 작가가 30여년 동안 안으로만 삭이고 있던 '봉인된 시간'의 안쪽을 송두리째 뒤집어 보인 것. '그 여자'의 어머니 이야기와 아버지 이야기,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가 한데 어우러진 유난스러웠던 가족사며 성장기 소설이다.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에서 김형경은 대조적인 여주인공 두 명을 통해 여성의 삶을 들여다보았다고 한다. 인혜와 세진은 동전의 양면처럼 다르며, 다른 곳을 바라보면서도, 여성으로서 한 몸이다. 수술대 위에 오른 두 여자의 몸과 마음에 대한 작가의 해부는 정신과 치료까지 동원하며, 그럴 수 없이 찬찬하고 성의 있다. 그녀의 다섯번째 소설『성에』는 사랑과 성, 유토피아 등 우리의 삶에 깃들어 있는 환상에 대한 주의 깊고 세밀한 고찰이면서도 동시에 그 환상을 쉬이 놓지 못하는 이들에게 연희는 말하고 있다. 환상을 마음껏 빛나고 아름다운 것, 현실과 무관하며, 허황된 것, 가장 충만해서 서러운 것으로 영접할 때, 우리는 비로소 비루하고 지리멸렬한 생을 지탱시켜 줄 각별한 에너지 하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꽃피는 고래』에서는 세상에서 다시 없을 만큼 가혹한 상실을 경험한 열일곱살 소녀가 그것을 딛고 일어서는 과정을 통해 상실을 통한 성장과 성숙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소설집 이외에도 심리에세이 시리즈를 통해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 내재한 감정의 실체와 근본에 대해 사색하는 책을 써 왔다. 40대 이후 정신분석 치료를 받고 난 후 2년 동안 세계 곳곳을 여행하면서 만난 많은 사람들과의 에피소드를 통해 사람사는 풍경과 내면을 들여다 보는 에세이『사람 풍경』을 출간하였으며 『천 개의 공감』에서는 저자가 이십대부터 접해온 심리학적 지식과, 실제 정신분석의 경험에서 얻은 지혜를 바탕으로 ‘관계 맺기’에 절망하는 이들에게 들려주는 위로와 치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슬픔의 흐름이 막혀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시금 슬픔의 강이 흐를 수 있도록 물꼬를 터주고자 쓴 『좋은 이별』까지 그의 심리에세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해주고 있다.

이외에도 시집 『모든 절망은 다르다』와 소설집 『단종은 키가 작다』,『푸른 나무의 기억』, 『외출』, 『담배피우는 여자』,『성에』 등의 작품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