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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e—live—Library

세월 1,2,3 - 김형경

by e-bluespirit 2007. 6. 26.











 

 

세월 1

 

 

고통과 고통, 기억과 기억, 사물과 사물을

뒤섞어,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고 무엇도 아닌 것이 되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딱딱한 나무등걸이나 무표정한 바위,

허공을 지나가는 바람 같은 것이 되기를...

 

 

1

 

   그곳에도 집이 하나 있다. 그 여자가 살았던 여러 집들 중 하나가

서울시 은평구 불광동에 있다. 창을 열면 멀리 눈앞으로 북한산 자

락이 내려와 있던 집. 여자는 아침에 잠을 개면 창을 내다보는 것으

로 하루를 시작한다. 산자락은 볼 때마다 모양이 다르다. 어떤 날은

웅크린 짐승의 등 같고 어떤 날은 나란히 서 있는 두 모자의 모습

같다. 또 어떤 날은 한껏 팔을 벌리고 있는 어떤 존재, 인간의 운명

이거나 저잣거리의 일상을 조종하는 힘있는 자의 가슴 같다. 그 가

슴에서 날아오르는 참새떼나 진달래 군집을 바라보면, 그 시절에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아침마다 산을 바라보는 것으로 또 하루를 살아

낼 힘을 얻곤 한다.

 

 

 

17

 

   사람들은 늘 시작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한 해는 새해 첫날을 어

떻게 보냈느냐에 좌우되고, 장사는 마수거리가 중요하고, 택시기사

조차 첫 손님으로는 안경 낀 사람과 여자를 태우지 않는다. 모두들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시작. 그 시작을, 그? 여자와 잿빛 바바리를

입은 남학생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옆모습이

나 뒷모습을. 앞으로 이 글에서, 잿빛 바바리를 입은 남학생을 잿빛

바바리라 부르기로 한다.

 

 

 

이 글은 내가 건넌 강이 더 깊다거나 내가 넘은 산이 제일

험했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 산을 넘고 그 강을

건널때, 어떤 시행착오를 겪으며 어떻게 사상을

배워나?는가에 대한 기록이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자의식이 강한 한 여자 아이의 영혼의 역사라고 할 수

있고, 감히 말하나면 '여성 예술가의 초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그 글을 사작할 때 그것을 써보고 싶었다.

 

- 작가의 말중에서

 

 

 

세월 2

 

 

 

두 남자 시이에 앉아,

그 여자는 풀밭 위의 식사?라는 그림을 떠올린다.

양복을 단정히 입고 점잖게 앉아 있는 두 남자 사이에,

한 여자가 알몸의 옆모습을 보이며 앉아 있는 그림. 왜 인간이라는

생물의 종에서 여자는 늘 그토록 유희의 대상이고,

사소한 사물과 다름이 없고, 그토록 잔인한

대접을 감수해야 하는가.

 

 

18

 

   그 여자는 아직 한 번도 아버지의 여자에 대해 정식으로 언급한

일이 없다. 무슨 마음에 맺힌 감정이나 입밖에 내기 싫은 어떤 일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정식으로 언급할 만한 어떤 사건이나 감

정이 전혀 없어서다. 일 년에 한 차례, 혹은 두 차례씩 아버지를? 만

나러 갈 때마다 한 번씩 볼 뿐이다. 그때마다 그 여자는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버지에게도 거의 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아버지의 여자에게 말이 없는 건 당연하다. 그녀 쪽에서도 먼저 말

을 걸지 않는다. 아마 그들은, 서로를 나무나 돌처럼 생각해왔는지

도 모른다.

 

 

 

33

 

   "그냥 쉬세요."

   그 여자는 조용히 방문을 닫고 돌아선다. 다음에, 다음에 언젠가

그럴 날이 있을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은 마음으로 아버지와 마주

앉아, 3년만 지나면 밀림의 왕자가 된다는 호랑이 이야기며, 생선을

구울 때는 석쇠가 잘 달구어진 다음에 올려놓아야 한다는 얘기며,

장기를 둘 때는 졸을 잘 운용해야 한나는 얘기며...... 그런 이야기

를 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언젠가는. 돌아서는 눈앞이 어룽어

룽 흐려진다.

 

 

 

슬픔이나 기쁨, 그런 정서는 하나의 사건이나 하나의

대상에서 유발되는 게 아니다. 눈앞의 낙엽과 아주

오래된 기억이 만나, 발부리에 걸린 돌맹이가 잊은 줄

알었던 기억과 만나, 기쁨이 되거나 슬픔이 된다.

기쁨이나 슬픔, 그리고 공포?같은 것들은 감정의 직조

속에 아주 북잡아게 얽혀 있어, 여자는 나중까지도

정서의 느닷없는 휘둘림에 당황한다. 꽁치를 보고

슬프다고 말할 때, 인형을 보고 무섭다고 말할때,

달맞이 꽃을 보고 기쁘다고 할때, 사람들은 그 여자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때, 그 여자는 외로워진다.

 

-본문 중에서

 

 

 

 

세월 3

 

 

그여자가 인생에서 배운

단 하나의 교훈이 있다면, 세월 앞에서

겸허해야 한다는 점이다.?어느 나이에 이르기 전에는

감히 이겨낼 수 없는 세월의 이치가 있는 법이다.

어느 나이에 이르기 전에는 감히 도달할 수 없는

사유의 깊이가?있는 법이다.

 

 

34

 

   그 여자는 자위방에 누워 좁은 천장을 올려다 보고 있다. 전기장판

은 등만 가까스로 따뜻하게 해줄 뿐 코끝은 영락없이 낼랭하다. 이

미 오래 전에 잠이 깼지만, 잠깬 자세 그대로 누워 있기만 한다. 보

증금 30만원에 월세 5만원짜리 방. 천장을 올려다 보며 누워, 다 끝

났구나, 생각한다.

 

 

 

49

 

   누구에게나 삶은 힘든 것이고, 누구나 성장 과정에서 한두 가지의

상처는 안게 마련이다. 다만, 내가 글을 쓰는 직업을 가졌기 때문에

그걸 기록할 수 있는 행운과 불행을 동시에 안았을 것이다. 행운이

라고 하는 것은 정신분석학적 측면에서 말하는 것이고, 불행이라고

하는 것은 이 글을?쓰는 동안의 고통에 대해서다. 이 글을 쓰던 지난

연말연시 동안, 늘 온몸이 녹작녹작하고 가슴이 후득후득 떨렸다.

단 하나 위안이?되었던 것은, 이것만 쓰면, 이 고비만 넘기면, 다 끝

난다는 점이었다.

   고작 세 권에 불과한 이 이야기를 모든 나이든 분들께 바치고 싶

다. 내 부모와 조부모, 외조부모를 비롯해, '내가 살아온 날들을 책

으로 묶으면 열 권, 스무 권은?될 거다'고 말씀하시는 모든 어른들

앞에 고개 숙여.

 

 

 

어느 나이에 이르기 전에는 할 수 없는 일이 있는 법이다.

어느 나이에 이르지 전까지는 애해할 수 없는 세상의

이치가 있는 법이다. 어느 나이에 이르기 전에는 감히

도달할 수 없는 사유의 깊이가 있는 법이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세월이다. 시간이 퇴적층처럼 쌓여 정신을

기름지게 하고 사고를 풍요롭게 하는, 바로 그 세월이다.

그러므로, 세월 앞에서는 겸허해야 한다. 누구도,

그 사람만큼 살지 않고는 어떤 사람에 대해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누구든, 그 사람과 같은 세월을

살아보지 않고서는.

 

-본문 중에서

 

 

 

 




 


 







김형경본명:김정숙1960년 강릉에서 태어났으며 강릉여자고등학교를 거쳐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추리 소설을 좋아했던 작가의 어렸을 적 꿈은 탐정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탐정이 되기가 어려웠고, 꿈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남은 것이 작가였다. 성장기 때 책을 좋아한 작가는 "나도 책을 쓰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가지고 국문과에 진학했지만 습작하는 시기에 자신에게 재능이 있는지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류시화나 이문재 같은 경희대 국문과 78학번 동기들은 모두 고등학교 때부터 문학으로 스타였다. 이런 친구들 사이에서 기가 많이 죽었다고 작가는 말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작가로 하여금 책도 많이 읽고 보다 성실하고 열심히 글을 쓰게 만든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1983년 『문예중앙』에 시로, 1985년 『문학사상』에 중편 「죽음잔치」로 등단했다. 그녀는 국민일보 1억원 현상 공모 당선작인『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로 독자들의 뇌리에 `김형경'이라는 이름을 굵게 새겨 놓았다. 『새들은 제이름을 부르며 운다』는 정치적으로 암울했던 80년대를 지나온 젊은이들의 사랑과 고뇌, 그리고 그 시절의 상처를 보듬고 현실을 살아가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그린 장편소설이다. 정치적으로 암울했던 80년대를 거쳐, 급격하게 변화한 환경과 자기 한계에 부딪힌 젊은이들이 삶의 진정성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겪는 고뇌와 좌절, 예술과 현실 등의 묵직한 주제를 섬세하고 아름답게 묘사한다. 

그녀의 작품 『피리새는 피리가 없다』는 언더그라운드 대중음악가수들의 세계를 소재로 한 장편소설로서 30대 중반의 평범한 주부인 영숙이 10여년 전 언더그룹의 가수로 일하던 시절을 회상하는 내용이다. 밤무대에서 일하다 기획자에 의해 화려한 스타가 되는 영숙은 가요계의 추악한 실상을 겪게 된다. 자신의 파란많은 체험을 바탕으로 한 그의 두 번째 장편인 『세월』은 작가가 30여년 동안 안으로만 삭이고 있던 '봉인된 시간'의 안쪽을 송두리째 뒤집어 보인 것. '그 여자'의 어머니 이야기와 아버지 이야기,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가 한데 어우러진 유난스러웠던 가족사며 성장기 소설이다.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에서 김형경은 대조적인 여주인공 두 명을 통해 여성의 삶을 들여다보았다고 한다. 인혜와 세진은 동전의 양면처럼 다르며, 다른 곳을 바라보면서도, 여성으로서 한 몸이다. 수술대 위에 오른 두 여자의 몸과 마음에 대한 작가의 해부는 정신과 치료까지 동원하며, 그럴 수 없이 찬찬하고 성의 있다. 그녀의 다섯번째 소설『성에』는 사랑과 성, 유토피아 등 우리의 삶에 깃들어 있는 환상에 대한 주의 깊고 세밀한 고찰이면서도 동시에 그 환상을 쉬이 놓지 못하는 이들에게 연희는 말하고 있다. 환상을 마음껏 빛나고 아름다운 것, 현실과 무관하며, 허황된 것, 가장 충만해서 서러운 것으로 영접할 때, 우리는 비로소 비루하고 지리멸렬한 생을 지탱시켜 줄 각별한 에너지 하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꽃피는 고래』에서는 세상에서 다시 없을 만큼 가혹한 상실을 경험한 열일곱살 소녀가 그것을 딛고 일어서는 과정을 통해 상실을 통한 성장과 성숙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소설집 이외에도 심리에세이 시리즈를 통해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 내재한 감정의 실체와 근본에 대해 사색하는 책을 써 왔다. 40대 이후 정신분석 치료를 받고 난 후 2년 동안 세계 곳곳을 여행하면서 만난 많은 사람들과의 에피소드를 통해 사람사는 풍경과 내면을 들여다 보는 에세이『사람 풍경』을 출간하였으며 『천 개의 공감』에서는 저자가 이십대부터 접해온 심리학적 지식과, 실제 정신분석의 경험에서 얻은 지혜를 바탕으로 ‘관계 맺기’에 절망하는 이들에게 들려주는 위로와 치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슬픔의 흐름이 막혀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시금 슬픔의 강이 흐를 수 있도록 물꼬를 터주고자 쓴 『좋은 이별』까지 그의 심리에세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해주고 있다.

이외에도 시집 『모든 절망은 다르다』와 소설집 『단종은 키가 작다』,『푸른 나무의 기억』, 『외출』, 『담배피우는 여자』,『성에』 등의 작품을 출간하였다.






"심리 에세이를 쓸 때마다 늘 그것이 마지막 책이라고 생각하지만 어느 순간 또 다음 책을 쓰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그럴 때면 내가 생을 사는 게 아니라 생이 나를 어디론가 이끌어간다는 느낌이 들면서 그 책이 이번 생에 반드시 해내야 하는 숙제처럼 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