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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irit/e—cr—life

생명의 근본 원리는 스스로 함이다

by e-bluespirit 2014. 12. 26.









  생명의 근본 원리는 스스로 함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하는 정신이기 때문에 지은 그 세계도 스스로 하는 생명에 이르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산 하나님이기 때문에 죽은 기계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자기를 항상 자유하는 생명을 가진 인격을 통하여 나타내기를 쉬지 않는다. 인간은 하나님의 일동무가 되었다. 하나님은 그 우주 완성을 반드시 사람을 통하여 하려 한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 60~61쪽

함석헌





   말씀 살음(사룀)이 영생이다. 육체가 숨이 막히면 죽듯이 정신은 말이 막히면 죽는다. 말대답을 못하면 정신은 죽는다. 하나님의 말씀 살음 이것이 영생이다. 마치 비가 와서 샘이 솟듯이 말씀 살음이 영원한 생명으로 사는 것이다. <다석 유영모 어록> 20쪽 

유영모  






  모든 악은 선의 뒷면이요, 모든 싸움은 다 사랑 싸움이다. 아픔 없이 하나님을 찾아 만날 수 없다. 황금시대보다는 어지러운 때에, 영화보다는 떨어짐에, 이긴 자보다는 진 자에, 평안보다는 고통에, 즐거움보다는 죽음에 보다 더 귀히 여기고 보람 있게 여기고 존경할 것이 들어 있으며, 참으로 영원한 감격이 될 보화가 들어 있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 67쪽

함석헌






   누에는 죽어야 고치가 된다. 실을 다 뽑고는 죽어야 한다. 죽지 않으려는 미련한 생각을 버려야 한다. 생각의 실, 말씀의 실을 뽑아 생각의 집, 말씀의 집, 사상의 집을 지어야 한다. 그것은 내가 가서 있을 집을 마련하는 것이다. 우리는 말씀의 집을 지으러 왔다. 생각하여 말씀의 실을 뽑아 누에가 고치 집을 짓듯 말씀의 집을 지어야 한다. <다석 유영모 어록> 21쪽 

유영모  






  역사의 운동은 차라리 수레바퀴나 나선의 운동으로 비유하는 것이 좋다. 수레의 바퀴는 밤낮 제자리를 돈 것 같건만 결코 제자리가 아니라 나아간 것이요, 나사는 늘 제 구멍을 돌고 있는 것 같은데 사실은 올라가는 것이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 74쪽

함석헌






   나는 '모름지기'란 우리 말을 좋아한다. '모름지기'란 반드시 또는 꼭이란 뜻이다. 사람은 모름(하나님)을 꼭 지켜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모른다. 하나님 아버지를 다 알겠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아들이 아무리 위대해도 아버지와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석 유영모 어록> 20쪽 

유영모  






  이제 인류의 문명은 전쟁으로 끝을 맺느냐, 전쟁 그것의 끝을 맺는 새 문명으로 들어가느냐 하는 갈림길에 이르렀다. 그 속에 품고 있는 역사의 먼동 틀 때에 뿌려진 정신의 씨가 덮어 누르는 가시덤불을 뎔?쑥 올라와 새 단계에 오르느냐, 그렇지 않으면 아주 질식되어 버리고 지구가 가시밭이 되고 마느냐 하는 데 있다. 정신적인 방향으로 결정적으로 키를 돌리지 않는 한 소망이 없는 자리에 이르렀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 77-78쪽

함석헌






   우리가 정신을 닦는다는 것은 말씀을 닦는 것이다. 생각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말씀을 닦는 것이다. 몸을 닦듯이 말을 닦아야 한다. <다석 유영모 어록> 22쪽 

유영모  








일시 : 12월6일 토요일 13시
장소 : 4호선 혜화역 3번출구
진행 :

혜화역 3번출구(13:00 출발) - 서울의과대학 - 의학박물관 - 암병원 - 창경궁 홍화문(13:30 해설) - 창경궁 식물원 - 함양문 - 창덕궁전각 자유관람 - 돈화문(15:30) - 재단사무실(15:50~16:40) - 인사동(17:00 음식점 포도나무) - 약4Km

<이번 씨순길에선...생각 셋>

창경궁의 문정전 앞뜰은 사도세자의 비극이 서려있는 장소입니다. 지난 11월 순례한 화성행궁 또한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으로 정조가 행차하던 곳입니다. 영-정조 치세를 흔히들 조선의 문예부흥기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영-정 두 임금 사이에는 뒤주에서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의 비극이 있습니다. 

영조는 42세 때 영빈 이씨에게서 사도세자를 낳았습니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2살 되는 해 세자책봉하였고 15세되는 해에는 대리청정을 맡겨 정사를 돌보게 하였습니다.  무수리를 어머니로 둔 영조는 신분의 컴플렉스도 있고해서 세자에게 제왕의 도를 엄하게 훈육하였으나 이를 감당하지 못하는 사도세자는 정신질한이 발병하여 난폭한 행동과 광기를 발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대리청정 기간, 어릴 때 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던 집권세력 노론과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는 영조에게 사도세자를 무고하여 뒤주 속에서 비극의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이 비극의 전말은 사도세자의 부인이자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홍씨의 한중록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할아버지 영조의 사랑을 듬뿍 받은 정조는 일찍 타계한 백부 효장세자의 양자가 되어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무사히 보위에 오르게 됩니다.  정조임금의 꿈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예회복과 복권이었으나 "네 아비에게는 할 만큼 했다. 단 한 글자라도 높인다면 할아비를 잊는 것으로 알라"는 엄명으로 감히 시행하지 못하였으나 조선말 사도세자의 입양고손인 고종황제에 의하여 장종(莊宗)으로, 또 대한제국 시절 다시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로 추존되었습니다.

<이번 씨순길은...생각 둘>

다석의 주요 키워드 여공배향(與空配享)은 맹자의 여민동락(與民同樂)에서 착안하여 만든 신조어입니다. 백성과 즐거움을 함께 나눈다(梁惠王章句 하편)는 뜻의 사자성어를 전혀 다르게 풀이합니다.

- 빈탕한데 맞혀놀이 - 여(與)는 한데, 공(空)은 빈탕, 그래서 여공은 빈탕한데가 됩니다. 짝 맞추는 것을 배(配)라하고 제사 지내는 것을 향(享)이라 합니다.  다석은 제사를 노리(놀이)로 풀이합니다. 그래서 배향은 맞춰놀이가 됩니다.  하느님과 짝이 되어 유희삼매(遊戱三昧)에 빠지는 것이  여공배향(與空配享), 빈탕한데 맞혀놀이입니다.  

원래 배향(配享)이란 말도 있습니다. 학덕이 있는 사람의 위패를 문묘(文廟)나 서원(書院) 등에 모시는 것을 배향이라고 했습니다. 공신의 위패를 종묘에 안치하는 것도 배향이라고 했습니다.

조선의 건국이념은 유학입니다. 조선의 궁궐은 여민동락(與民同樂)의 유교철학이 깃들어 있습니다.여민동락(與民同樂), 대한의 모든 씨알이 더불어 즐거움을 나누는 여민동락(與民同樂)은 지금 우리에게도 요구되고 있는 시대정신입니다. 

여민동락(與民同樂)과 여공배향(與空配享)을 묵상하며 이번 순례길을 걷습니다. 

<이번 씨순길은...생각 하나>

궁궐은 종묘사직, 도성과 더불어 조선왕조의 근간입니다. 서울에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다섯의 궁궐이 있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1392년 조선을 세우고 1935년 첫 번째 궁으로 경복궁을 짓습니다. 경복궁은 정궁(正宮)이며 법궁(法宮)입니다.

창덕궁은 1405년 태종이 지은 이궁(離宮)입니다.조선의 궁궐은 임금이 정사를 돌보며 생활하는 법궁과 전쟁이나 화재등 큰 재난으로 법궁을 사용하지 못할 때를 대비해 지은 이궁으로 나눈 양궐체제입니다.

서울의 모든 궁궐은 모두 1592년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졌는데 법궁인 경복궁은 터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다시 짓지 않고 창덕궁을 재건하여 1867년 경복궁을 다시 지을 때 까지 270여년간 법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 다른 궁궐과 마찬가지로 창덕궁 역시 많이 훼손되었지만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조선의 궁궐 중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으며 궁궐의 전각들이 자연과 잘 어우러져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특히 산과 언덕에 둘러싸인 후원은 조선 시대 궁궐 후원 가운데 가장 넓고 경치가 아름답습니다. 이번 순례에는 순방하지않으나 나중에 개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창경궁은 제9대 성종 때 지어진 궁궐로 경복궁 창덕궁과 함께 동궐로 불렸습니다. 성종이 왕실의 웃어른인 대비들이 편히 지낼 수 있도록 창덕궁 가까이에 지은 궁궐이며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자경전을 이 곳에 짓기도 했습니다. 

창경궁은 왕실 가족의 생활 공간이기에 왕실 비극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숙종 때 장희빈이 인현 왕후를 독살하려다 사약을 받은 곳이 취선당이고, 영조 때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불행한 죽음을 맞았던 곳은 문정전 앞뜰입니다. 

조선왕조의 권위를 깍아내리기 위해 일제는 1909년 전각들을 헐어 버리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고 이름도 1911년 창경원으로 격하하였습니다. 창경궁이라는 이름을 다시 찾은 것은 1983년으로 그 후로 부터 1986년 사이 이곳의 동.식물을 서울대공원으로 옮기고 놀이시설을 철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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