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첨과 맨 끝을 찾는 것은 이 속(中)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참나(얼나) 때문이다. 이 마음속에 맨 첨과 맨 끝을 찾는 것이다.
시작이 있고 마침이 있는 상대적 존재인 제나(自我)에게는 절대존재인 얼나(靈我)가 첨이요 끝이 된다. 얼나가 시간 공간의 맨 첨과 맨 끝에 있는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이다. 마음 속(中)의 얼나가 상대세계에 얼굴을 쪽 내민 가온찍기(「」)이다. (1960)
우리는 무한히 사는 것을 원하고 정신이 살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선지자의 진리 중에서도 아름답고 인격적인 것을 택해야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이를 받들고 나가야 합니다. '나'의 일만 보아주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공정하고 사사로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실컷' 육체의 만족을 좇는 것을 꺼리는 동시에 우리에게 배울 것을 요구합니다. 선지자의 진리를 배우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임을 깨달아야 겠습니다.
과학은 과학만 배우고 신학은 <성경>만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인 이상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지식도 얻어야 합니다. 콩이나 팥을 되는 되(升)가 있습니다. 이것을 알고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정신상태를 만들어야 합니다.
'실컷' 따위는 땅에 버리고 조히 말씀을 따르고, 영원히 사는 조히 한 줄을 붙잡고 다같이 이제 조히조히 살아봅시다. 조히 한 얼 줄을 붙잡고 살면 조히조히 사는 것이 됩니다. '실컷' 따위의 말은 내버립시다. 만일 이것을 지고 간다면 심판 받는 것밖에 아무 것도 안 됩니다.
무엇을 실컷 맛봤으면, 먹어봤으면 하는 것은 다 버리고 조히조히 끝을 마칩시다. 이 사람도 여기까지 조히조히 왔으니 조히 고맙습니다. 이 세상의 삶이 얼마 남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조히조히 있다가 떠날 때 조히 한 얼 줄을 잡고 지나보기로 합시다.
<다석강의>31쪽
위로 길이길이 올라갑니다. 하늘에 머리를 두고 아름답게 사는 사람은 위로 올라가는데, 아무런 소리 없이 고이고이 올라갑니다. '우러옐나'는 하느님을 우러러보면서 나아간다는 뜻과 울면서 나아간다는 뜻이 겹쳐 있습니다. 사람이 하느님께서 계시는 위로 가지 않고 가로로 가면 담밖에 없습니다. 위로 올라갈 때는 울면서 올라갑니다. 우렁차게 또는 구슬프게 운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데 그치지 않고, 부르고 부르면서 가는 것입니다. <다석강의> 27~28쪽
이 사람이 궤변가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시의 '예수'와 예수 그리스도가 마주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궤변쟁이의 몸이 예수의 십자가 보혈로 사함을 받는지는 잘 모르지만, 이 사람이 이 자리에 설 수 있는 것은 어제 저녁에 먹은 밥이 피가 되어주었기 때문입니다. 밥과 야채를 먹었기에 이렇게 서서 기운을 차려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역사적으로 예수가 골고다 산 위에서 흘린 피를 찾는 것인지, 그 내용에 대해 어느 정도 믿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이어이어 내려온 그 능력이 예수와 나를 이어지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역시 절대자에게 이어져서 나타나게 되는데, 그 모양은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뜻에서 우리는 역사적으로 예수에게 이어져서 현재에도 산 능력을 내려 받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이 사람은 십자가에 흘린 피로써 온 무리가 죄 사함을 받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것이 조히조히 한 얼 줄로 나타난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성경>의 본 뜻이 아니겠습니까? <다석강의> 25~26쪽
몸으로는 분명 짐승인데 손을 자유롭게 쓰는 것은 사람밖에 없습니다. 두 손 모아 하느님께 기도드리는 것도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ㅣ 나가'에 'ㅣ'가 문제입니다. 'ㅣ'는 사람이 막대처럼 곧장 선 것을 나타냅니다. 세계 어느 민족이나 막대기를 하나 그리면 사람들을 뜻합니다. 내가 이 세상에 나선 것입니다. 하늘 아래서 하늘을 향하여 곧추 일어선 것입니다. 사람들은 먼 훗날에 가서도 이렇게 곤두설 것입니다. 이 '나'가 가는데 어디로 갑니까? 우리의 (진리)정신은 위로 올라갑니다. 머리를 들고 하늘을 뚫고 나아갑니다. 머리의 이마가 앞잡이 노릇을 하여 위로 올라갑니다.
'내'가 살아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할 때 '나'라고 하는데,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머리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머리를 깔고 앉을 수 있는 것은 절대자뿐입니다. 이마는 하느님을 나의 임으로 모신다는 뜻으로 이마(임아)입니다.
<다석강의> 24~25쪽
부르조아(부유층)들은 좋은 날을 즐기겠지만 우리는 싫은 궂은 날, 비바람 부는 날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비바람 부는 날에 기도하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늘 희망을 가진다는 것도 어렵습니다. --- 그런데 비와 바람은 꼭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빌고 바라는 것은 어렵지만 꼭 필요합니다. 비가 오지 않고 바람이 불지 않으면 사람들은 제단을 쌓고 풍우(風雨)를 빌기도 합니다. '바람 불어 주소서', '비를 내려 주십시오' 합니다. 우리가 빌고 바라는 것이 비바람입니다. 이것은 다름 아닌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말씀 따름 그밧게'는 말씀만을 따른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절대라, 말씀만을 따를 뿐입니다. 이는 하느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흔히 누구누구를 따른다고 하는데, 이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어려운 말입니다. 거짓말입니다. '한 얼 줄'로 하느님을 따른다는 말은 옳지만, 그 밖에 누구를 따른다는 말은 쉽게 할 수 없습니다. <다석강의> 28~29쪽
유영모
나는 그대를 나무랐소이다.
물어도 대답도 않는다 나무랐소이다.
그대겐 묵묵히 서 있음이 도리어 대답인 걸
나는 모르고 나무랐소이다.
나는 그대를 비웃었소이다.
끄들어도 꼼짝도 못한다 비웃었소이다.
그대겐 죽은 듯이 앉았음이 도리어 표정인 걸
나는 모르고 비웃었소이다.
나는 그대를 의심했소이다.
무릎에 올라가도 안아도 안 준다 의심했소이다.
그대겐 내버려둠이 도리어 감춰줌인 걸
나는 모르고 의심했소이다.
크신 그대
높으신 그대
무거운 그대
은근한 그대
나를 그대처럼 만드소서!
그대와 마주앉게 하소서!
그대 속에 눕게 하소서!
<함석헌 전집 6> 19쪽
믿음의 조직을 가집시다.
내가 말하는 조직은 음모단체는 아닙니다. 몇몇이 술잔을 돌려가면서 꿍꿍이를 꾸며 다 바지저고리가 되어 힘 없는 것을 기회로 삼아 하는 것과 같은 것은 혁명이 아닙니다. 오늘날은 민중의 시대인 만큼 진짜 혁명이란 민의가 움직여 백주에 드러내놓고 하는 혁명이라야 합니다.
조직 없이는 참다운 민중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말하는 민중의 조직이란 결코 어떤 결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어느 정당에 가입한다든지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신 혹은 믿음을 기반으로 하는 유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일제시대에는 우리들은 일경에게 쫓기면 어느 집이라도 뛰어들어가면 서로 숨겨주었듯이 그런 믿음의 조직을 말하는 것입니다.
감시원이 달라붙는 공산당식 기계적 조직을 말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정의와 도의에 얽힌 인격적 조직을 말합니다. 지나간 일을 거슬러 욕만 하자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잘 됐든 못 됐든 일단 지나간 일은 들추지 말고 현재의 일에 작심하여 행동을 하자는 것이 나의 본의입니다. <함석헌 전집 1, 들사람 얼> 273쪽
나는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내 임이 다섯입니다. 고유 종교, 유교, 불교, 장로교, 또 무교회교, 그러나 그 어느 것도 내 영혼의 주인일 수는 없습니다. 지금 내가 같이 있는 퀘이커도 내 영혼의 주는 아닙니다. 나는 현장에서 잡힌 갈보입니다. 도덕과 종교로 비판받을 때 나는 한마디의 변명도 있을 수 없습니다. 나는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나는 내 속에 있는 일곱 악마를 그의 발 밑에서 고백해야 하고 내 마음의 옥합을 깨뜨려 단번에 부어 버려야 합니다. 내가 유다입니다. 나는 내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내 가족과 스승과 친구에게 못한 것을 그의 앞에 내놔야합니다. 나는 온 역사의 압력을 내 약한 등뼈 위에 느낍니다. 한국도 하나의 사마리아 계집이요 갈보요 마리아요 유다입니다.
아니요, 세계가 결국은 무지와 정욕과 부패와 불신의 겹친 실패 아니겠습니까? 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냉랭한 키스를 입에 받으면서도 "친구여!"하는 그이를 만날 것입니까? <함석헌 전집 15 : 펜들힐의 명상> 29쪽
마지막 저녁 식사 때에 예수께서는 "내 마음이 참 괴롭다"고 했습니다. 나는 그의 그 고민은 분명히 유다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당신들 중 한 사람이 나를 잡아 주려고 합니다" 했을 때 그는 그때라도 유다가 제발 마음을 돌이켰으면 하는 애끓는 생각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모든 제자들이 다 "주님 그게 저입니까?" 하기만 했습니다. "내가 당신들 열둘을 택하지 않았소?" 하는 예수께는 한 사람의 배반으로 그 열둘의 전체 사귐이 깨지는 것이 문제였는데, 제자들은 다만 개인적인 생각만 하고 나만 아니면 다행이라는 생각에 "저입니까?" 했습니다. 그들은 분명 그가 준 헤매는 양의 비유의 가르침을 잊었습니다. 그는 우리에 있는 아흔아홉보다 잃어버린 하나가 더 중하다고 했습니다. 하나가 없음으로 전체가 깨지기 때문에. <함석헌 전집 15 : 펜들힐의 명상> 25쪽
유다는 사실 전 인류의 짐을 맡아 진 것입니다. 그의 행동은 마치 화산의 불이 지구의 깊은 속에서부터 전 지구의 압력으로 터져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깊은 *바탈의 알 수 없는 폭발입니다. 만일 열하나가 따라나가서 그를 위로하고 그 말을 들어주었더라면 일은 그렇게 비극으로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볼 때 예수는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의미로는 예수를 죽인 것은 열한 제자입니다. 대화가 끊어질 때 얼마나 참혹한 것입니까? 그때까지 예수는 대화의 길을 다시 트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아주 죽음의 길로 나아가기로 결정했습니다. <함석헌 전집 15 : 펜들힐의 명상> 27쪽
*바탈: 바탕의 옛말. '본래부터 있는 것'을 뜻하며 우주적 전체성을 드러내는 자연생명과 인간 얼을 나타낸다.
유다는 똑똑하고 이성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에 회계를 맡겼을 것입니다. 그는 똑똑했고 이성적이었기에 아무래도 현실 문제에 대해 눈을 감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한 제자들이 항상 예수 옆에 가까이 돌고 마지막 장면이 임박한 때에 하늘나라에서도 윗자리를 차지하려고 다투는 것을 보았을 때 아마 구역질을 느끼지 않았나. 크게 반발까지 느끼지 않았을까. 그래서 아마 따로 돌면서 생각하기를 시작했을 것입니다. 열한 친구와의 사이에 대화의 길이 막혀버렸을 것입니다.
대화는 정신생활의 호흡입니다. 대화가 한번 끊어지면 마치 통풍이 끊어진 것같이 곰팡이가 돋기 시작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대화가 끊어지면 의심, 억측, 악의가 성해 그 공간을 채우게 됩니다. 예수는 그것을 아셨기 때문에 여러 번 주의를 주었습니다. <함석헌 전집 15 : 펜들힐의 명상> 26쪽
함석헌
우천으로 몽촌토성만 걸었습니다. 많은 회원이 참석? 못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반가운 비입니다. 올해 수십년래 가뭄이라고 하는데 중부지방이 가장 가뭄이 메말랐다고 합니다. 벌써 가뭄으로 많은 고통을 받고 있지만 내년 봄이 더 걱정스럽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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