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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e—dialect—dialog

[고구려를 다시 보자] 벽화로 본 고구려

by e-bluespirit 2004. 2. 25.

[고구려를 다시 보자] 벽화로 본 고구려

 

…배우자 없는 벽화

황해도 안악군 용순면 안악 2호분 안칸 북벽 벽화 배치도. 특이하게도 남편은 보이지 않고 안주인만 등장한다.

고구려 벽화고분들은 통상 부부를 합장한 묘제이다. 4세기 중엽 안악 3호분(황해도 안악군 용순면)처럼 5명이 넘는 사람들의 뼈가 발굴된 순장제도의 사례도 있지만, 그 이후 묘실에 관을 놓는 자리는 거의 나란히 2개씩이다. 벽화 역시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현 각저총과 평안남도 남포시 약수리 벽화고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일부일처의 부부 초상화나 생활상이 등장한다.

 

● 남편이나 아내가 안보이는 이유는

그런데 한쪽 배우자가 없는 경우도 있다. 평안남도 덕흥리 벽화고분이나 지린성 지안현의 무용총에는 부인의 초상화나 부인이 그려져 있지 않다. 또 지안현 장천 1호분의 중심행사에는 귀부인이 보이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안악 2호분처럼 남편이 등장하지 않는 예도 있다. 부부간의 관계를 표현한 것일까. 전생의 철천지원수가 현생에서 부부로 만나게 된다고 하는데 그 애증의 역사는 예나 지금이나, 신분이 높으나 낮으나 크게 다름없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5세기 무용총 벽화에는 부인을 그려 넣지 않았다. 무덤 안칸에 관을 놓는 자리도 아예 하나밖에 없다. 부부 사이가 그만큼 나빴을까. 혹은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삼는 ‘형사취수제(兄死娶嫂制)’라는 풍습대로 묘주인의 부인을 친동생이 차지했기 때문인가. 후자일 가능성이 높겠다.

무덤 주인의 생활상은 안칸 북벽의 장방 안에서 벌어진 모습이다. 인접한 각저총과 유사하게 전체 벽면을 무대처럼 꾸민 것이다. 네모꼴 관을 쓰고 점무늬 바지에 붉은 띠의 검정색 저고리 차림인 주인공이 중앙에 앉아 있다. 상류층의 의자생활을 보여준다.

이 벽화는 손님을 맞는 장면이다. 한데 두 손님의 스타일이 색다르다. 한 명은 흰 주름치마 위에 롱코트 형 검은색 겉옷을 걸치고, 머리는 삭발한 듯하다. 피부색도 고구려인보다 진한 적갈색이다. 서역 어딘가에서 방문한 외국인이다. 무용총 천장에 가득한 연꽃무늬를 보아 불승(佛僧)으로 여겨진다. 앞의 승려는 두 팔을 벌리고 열심히 부처의 세계를 강론하는 자세이다. 고구려에는 4품 관료인 태대사자 이상에서 외국 사신의 접견 임무를 맡는 ‘발고추가(拔古鄒加)’라는 관직이 있었는데, 묘 주인이 바로 그 고관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 인물마다 사족반에 다섯 개씩의 검은색 칠기 반상기가 차려져 있다. 그릇 가운데 인물에서 먼 쪽의 찻잔이 눈에 띈다. 그 위로는 두 개의 병과 과일을 푸짐하게 쌓은 긴 다리의 소반이 놓여 있다. 외국 승려를 만찬에 초대한 뒤 후식과 다례(茶禮) 의식을 겸한 상차림으로 보인다. 과도를 든 시종이 시중을 들고 묘 주인 뒤에는 두 청년이 대기해 있다. 모두 당시 하급관료나 남자들이 썼다는 고깔 형태의 ‘절풍모(折風帽)’를 쓰고 있다.

묘주인의 생활상을 그린 중국 지린성 지안현 장천 1호분 앞칸 왼쪽 벽화. 가운데 큰 나무 아래에서 벌어지는 축제에는 남자들만 등장한다. -사진제공 이태호 교수

● 모자는 신분의 상징

5세기 장천 1호분에서 묘 주인의 생활상은 앞칸 왼쪽 벽에 그려져 있다. 이 벽화는 특이하게도 여러 행사가 뒤섞인 대축제를 묘사한 것이다. 전체 벽면에는 연꽃 비가 날린다. 벽면의 아래쪽은 수렵도이고 위쪽 그림은 무악, 씨름, 광대놀이 등 불교축제인 칠보(七寶)행사 장면으로 해석된다.

묘 주인은 큰 나무 아래에 있다. 마치 우리 민속에서 마을 앞의 거목을 당산나무로 신성시한 것과 같은, 어느 특정 지역의 신목(神木)일 법하다. 이 신목과 함께 야외에서 벌어진 축제로 보아 묘 주인은 그 지역의 지방관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벽면의 예불이나 무악장면에는 부부가 등장했는데 여기에는 부인을 대동하지 않았다. 행사 중 남자들만의 공적인 모임인 듯하다.

무덤 주인은 지워졌지만 큰 나무의 왼편 의자에 앉아 그 맞은편의 관리들을 대면하는 장면이다. 그 앞에는 긴 다리소반에 소뿔 모양의 토기잔이 보인다. 검은 술병을 앞에 두고 의자에 앉은 인물과 반 무릎을 하거나 서서 허리를 굽힌 인물은 물방울무늬의 바지저고리 차림이다. 머리장식은 흰 모자로 상투를 덮고 띠를 두른 절풍모에 새 날개 모양의 깃을 꽂은 모습이다. 관료를 나타내는 조우관(鳥羽冠)이다. 고구려의 관모 제도에 ‘고관은 청라관(靑羅冠), 그 아래는 붉은 비단의 비라관(緋羅冠)에 새 날개깃을 꽂고 금은을 장식했다’는 ‘구당서(舊唐書)’ 기록과 거의 일치하는 형태이다.

신목에는 왼편 가운데 원숭이로 보이는 동물이 기어오른다. 그 좌우의 무릎을 꿇은 인물과 긴소매 저고리를 입은 작은 소년은 원숭이 놀이와 관련된 것 같다. 이 장면의 오른쪽 위로는 공 던지기와 수레바퀴 올리기를 하는 두 광대가 뒤섞여 있다. 묘 주인의 왼쪽 뒤로는 일산(日傘)을 든 시종과 흰 천을 든 시녀가 보인다. 남녀가 모두 바지저고리 차림이다.

 

이태호 교수·명지대 미술사학과


▼고국천왕의 왕비 우씨, 시동생 남편으로 섬겨▼

연나부 출신 우씨는 9대 고국천왕과 10대 산상왕, 두 왕의 왕비였다. 첫 남편인 고국천왕이 죽자 바로 아래 시동생인 발기를 제치고, 둘째시동생 연우를 왕(산상왕)으로 등극케 하고 두번째 왕후가 된 것이다. 부여나 흉노 등 북방유목민 전통의 ‘형사 취수제’ 풍습을 따른 것이지만 왕후 우씨의 권력을 향한 지략을 짐작케 한다. 그런데 우씨는 후사를 이을 아이를 갖지 못했고 질투심 또한 강했다.

산상왕이 관나부의 주통천에 사는 후녀(后女)와 관계를 가져 아이를 갖게 하자 후녀는 후궁으로 들어와 아들(11대 동천왕)을 낳게 된다. 그 과정에서 우씨 왕후는 후녀를 죽이려 음모를 꾸미는 등 시샘이 하늘을 찔렀다. 심지어 동천왕이 등극한 뒤에도 왕의 옷에 국을 쏟는다든지 하며 괴롭혔다. 그러나 동천왕은 넓은 아량으로 우씨를 태후로 모셨다.

태후 우씨는 임종을 앞두고 “내 행실로 인해 지하에서 고국천왕을 뵐 면목이 없으니 산상왕릉 곁에 무덤을 써 주시오”라고 유언했고, 대신들은 그에 따랐다. 그러자 고국천왕이 어느 무당의 꿈에 나타나 “우씨가 산상왕 곁으로 간 것을 보고, 하늘에서 만난 우씨와 심하게 다투었는데, 분하고 부끄러우니 나를 가려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 무당의 전언에 따라 고국천왕릉 앞에 소나무 일곱 그루를 심었다는 것이다. 이상은 ‘삼국사기’가 전하는 이야기다. 죽은 뒤까지 벌이는 남자의 질투도 만만치 않다. 이런 정치적 또는 인간적 갈등으로 고분 벽화에서 부인이 제외되거나 남편 없는 고분이 조성됐을 수도 있겠다.


서역에서 온 불승(佛僧)으로 보이는 2명의 손님을 접대하는 묘 주인의 모습이 그려진 중국 지린성 지안현의 무용총 안칸 안쪽 벽의 벽화. 왼쪽 2명이 불승이고 가운데 시중드는 작은 남자를 마주보고 있는 사람이 묘 주인이다. -사진제공 이태호 교수


 

 

…(10)철기군


삼실총 세 번째 방 서벽의 철갑으로 무장한 무사.
《벽화에 그려진 고구려 육군은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되어 있다. 칼 창 활 도끼 방패 등의 무기를 소지한 보병과 기병은 각각 베옷 전투복 부대와 철제 갑옷을 입은 부대로 구분된다. 그 가운데 가장 막강한 전투력은 철기군(鐵騎軍)에서 나왔다. 철기군은 말의 안면에 철판으로 마주(馬胄)를 씌우고 전신에 철제 갑옷(馬甲)을 입힌 뒤, 그 위에 긴 창을 들고 올라탄 쇠 갑옷 차림의 병사로 그려져 있다. 쇠 갑주로 무장한 철기군의 말을 ‘개마(鎧馬)’라고 불렀다. 중무장한 한 명의 철기군은 지금 탱크 한 대의 전력에 해당되지 않았을까. 철기군은 3세기에 벌써 등장한다. 동천왕(재위 227∼248년)이 위(魏)나라와 전쟁할 때 동원한 2만명 중에서 5000명이 철기군이었다. 대규모 기갑군단을 운영한 셈이다. 이를 보면 고구려의 군사전술은 빠름과 느림을 적절히 구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철기군단은 빠른 기동성이나 속도전과 함께 둔중하고 굳건한 위세도 보여 주었을 것이다. 》

○철기군 호위 행렬도 장중한 분위기 연출

4세기 후반∼5세기 초반 황해도 안악 3호분과 평남 남포시 덕흥리 벽화고분의 철기군은 묘주인의 행렬도에 보인다. 안악 3호분 안 칸 동북벽 회랑의 대(大) 행렬도는 묘 주인이 탄 소 수레를 중심으로 보병과 기병이 호위하는 모습이다. 현재 동벽에만 250여명이 이동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쇠 갑옷의 보병을 앞세우고, 긴 창을 비스듬히 든 옆모습의 철기군은 위아래로 4명씩 배치되어 있다. 행렬은 느리면서도 정연하고 장중하게 연출돼 있다.

 

 

덕흥리 벽화고분에는 안 칸 동벽을 가득 채운 행렬도가 있다. 묘 주인 유주자사가 13현의 관아를 순시하기 위해 이동하는 장면이다. 철기군은 위에 6명, 아래에 5명으로 행렬 전체를 호위한다. 철기군의 창에 장식된 물고기 모양의 깃발이 날린다. 안악 3호분보다 단출한 소규모 행렬이고 제법 빠른 움직임이다.

5∼6세기 중국 지린성 지안현 쌍영총 안 길에 그려진 단독 철기병의 모습은 더욱 빠르게 느껴진다. 쇠 갑옷 밑으로 말 다리의 벌어진 모습과 꾸불꾸불한 안장 장식물의 펄럭이는 깃발에 속도감이 실렸다. 또 말과 사람이 철제갑옷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도록, 당시 쇠를 얇고 단단하게 제련하는 단조(鍛造) 기술이 뛰어났음을 충분히 짐작케 한다.

철기군의 전투 장면은 5세기 지안현 삼실총 제1실 북벽에 그려져 있다. 성곽의 오른편에 두 장수가 말을 달리며 창으로 대적하고 있다. 오른편 흰 얼굴 가리개 마주의 기병이 양손에 쥔 창으로 찌르자, 붉은색 마주의 기병이 턱하니 상대의 창끝을 왼손으로 맞잡았다. 실전보다는 훈련인 듯하다. 홍백(紅白)군의 대표선수가 나서 시범을 겸한 전투 경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장면 위에도 홍백 갑옷의 두 장수가 엎드려 맨손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위엄에 찬 철갑무사 ‘묘실 수호신’으로

보병도 쇠 갑옷 부대를 운영했다. 삼실총 세 번째 방 서벽에 그려진 무사(武士)는 험상궂은 얼굴 표정으로 미루어 불교의 사천왕상 같은 수호신으로 배치한 것이다. 그런데 목을 보호하는 경갑(頸甲)을 댄 갑옷의 모습, 왼손에 쥔 고리가 둥근 칼 환두대도(環頭大刀)와 쇠못이 박힌 신발 등은 다른 고분벽화에서 보이는 갑옷 보병과 흡사하다. 특히 이 무사가 신은 것과 같은, 밑바닥에 쇠못을 박은 금동제 신발이 평양지역에서 출토되기도 했다.


황해도 안악3호분 안 칸 동북벽 회랑의 대행렬도. 말을 탄 기병중 철갑으로 무장한 개마기병을 화면 중앙 위아래로 각각 4명씩 찾을 수 있다. -사진제공 이태호 교수

이러한 벽화의 철제 무기나 갑옷, 신발 등의 실물은 고구려 지역보다 같은 시기 가야지역을 중심으로 출토되어 흥미롭다. 그래서 가야를 철의 나라라고도 일컫는다.

그림으로 볼 때 고구려의 쇠 갑옷과 철모는 대부분 물고기비늘처럼 얇은 철판을 네모나고 잘게 잘라 가죽으로 이어 제작한 찰갑(札甲)형태이다. 이와 유사한 형태로 몽촌토성에서 백제 초기의 동물 뼈로 제작한 찰갑옷이 출토된 적이 있다. 이에 비해 4∼6세기 신라 지역인 경주와 가야의 땅이던 김해 부산 합천 고령 등의 고분에서 발굴된 쇠 갑옷은 대체로 너른 철판을 이용한 상체 보호용 판갑(板甲) 형태다. 윗부분이 둥글고 귀 가리개가 달린 벽화 철모는 기다란 철판을 이어서 만든 합천 출토품 투구와 가장 유사하다.

벽화에 표현된 말 얼굴 가리개인 마주는 똑같은 실물이 부산 복천동 10호분에서 발굴됐다. 또 말의 몸 전체를 보호하는 찰갑형 마갑이 경남 함안 도항리 마갑총에서 부위에 따라 크기가 다른 비늘 갑옷으로 겹겹이 쌓인 채 나와 주목을 끌었다. 가야도 고구려와 유사한 철기군을 운영했음을 보여 준다. 그 실상은 또한 김해 덕산 출토로 알려진 국보 제275호 개마인물형토기(鎧馬人物形土器)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철의 보고’ 요동 점령해 대제국 건설▼

부산 복천동에서 출토된 가야의 말얼굴가리개. 고구려의 말얼굴가리개와 유사하다. -박영대기자

질박한 느낌의 철은 요즘에도 여전히 친근하고 절실히 필요한 소재다. 최근 철 부족 현상으로 쇠붙이 절도가 극성을 부리고 있다고 한다. 부산에서는 심지어 철로 만든 추상조각품을 고철로 오인해 훔쳐 가려 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우리나라에서 철기의 사용은 기원전 300년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요동의 연(燕)나라 명도전(明刀錢·칼 모양의 청동 화폐)과 함께 출토되는 초기의 철기류는 중국에서 배운 기술들이 포함돼 있다. 그후 철 생산이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기술이 발전하면서 우리식 농기구와 무기류가 본격적으로 생산됐다. 쇠는 농업경제력과 전투력을 크게 증진시켰고, 이를 토대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국가체제를 단단히 다졌다. 고구려는 4, 5세기 소금과 철 생산지로 천혜의 땅인 요동을 점령함으로써 대제국의 건설이 가능했다.

한편 초기 철기시대 쇠는 삶의 소중한 물질이고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다. 철을 돈처럼 사용했다는 기록도 보이고, 쇳덩어리(덩이쇠)를 무덤의 시신 옆에 두기도 했을 정도다. 6세기후반∼7세기 전반 벽화에는 대장장이를 신격화하기도 했다. 지안현 통구 5회분 천장화의 선인(仙人)들 가운데는 벌겋게 단 쇳덩이를 쇠망치로 담금질하는 철야신(鐵冶神)이 수레바퀴를 만드는 차륜신(車輪神)과 나란히 등장한다.


 

 

[고구려를 다시보자]<2>벽화로 본 고구려…<11>반라의 力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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