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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e—intro—intercolumn

칼럼소개 특 19 호>"생각하며 읽는 그림 이야기"

by e-bluespirit 2001. 7. 5.

'키스'를 생각하며 읽는 그림 이야기 : Klimt의 The Kiss







★추억은 방울방울.



한 때, 나도 학교 도서관을 전전하던 적이 있었다.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사실, 기말고사 때문이 아니라 그림 때문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살 수 도 없는 비싼 화집(畵集)이 널려 있고, 하루종일 무겁고 커다란 화집을 책상 위에다가 어질어질 쌓아놔도 아무도 터치하는 사람이 없었던 도서관이 좋았다. 크고 무거운 그림책이 많은 도서관 2층은 수업이 없는 어정한 시간을 아깝지 않게 보낼 수 있었던 유일한 곳이었다. 또, 기말 시험이 다 끝나고 몸과 마음의 진이 다 빠진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한국말로 쓰여 있는데도 읽어도 알 수 없었던 어려운 철학시험문제들로 지친 내 눈을 즐겁게 해 주는 곳이었다. 클림트의 그림을 도서관에서 처음 봤는지, 아니면 수업 시간에 슬라이드로 봤었는지, 아니면 어디 길거리에서 봤었는지, 그 시작을 알 수는 없었다. 다만, 한 동안 그의 그림에 푹 빠져서 지냈던 적이 있었다. 도서관에 간다는 나를 똥그래진 눈으로 쳐다보던 친구들을 뒤로하고 한 동안 도서관 2층에서 클림트의 그림을 보며 혼자 좋아라 했던 것도 이젠 추억이 되어버렸다. 화려한 곡선과 더운 황금색, 한 때 춘화(春畵)라고 비난받았을 정도의 에로티시즘을 담아내고 있는 그의 그림이 이 불쾌지수 높고 후덥지근한 여름에도 생각나는 걸 보니, 내가 클림트의 그림을 좋아하긴 좋아하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며칠은 색이 너무 좋았고, 한 며칠은 배경과 옷에 그려진 모양이 너무 좋아서 무거웠던 화집을 손에서 놓을 수 없게 만들었던 오스트리아의 화가, 쿠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 1862 - 1918)가 오늘 그림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에로티시즘, 그리고 아르누보(Art Nouveau)

espirit



espirit





클림트, 벌써 100년 전의 사람이었다. 그가 한 세기 전의 사람이었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클림트의 그림은 cool하고 세련되었으며 다른 그림들이 갖고 있지 않은 매력을 잔뜩 지니고 있다. 한 번 보면 보는 이로 하여금 잊을 수 없게 만드는 그의 그림 속에만 녹아 있는 그림의 요소는 과연 무엇일까.

구스타프 클림트는 1862년 7월 14일, 오스트리아 바움가르텐에서 태어났다. 오스트리아라...심상치 않은 곳이다. 따져보니, 심리학자이자 철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였던 프로이드가 태어난 곳이다. 누구 말대로 그 곳 물 탓인지, 두 사람 모두 에로티시즘을 연구하고 표현해 내는데 에너지를 다 바친 사람들이었다. 철학자와 예술가는 시대적으로 볼 때 한 가지 공통점을 갖고 살아간다. 시대 정신을 몸과 마음으로 읽고 느낀다는 점. 예술가는 그 시대의 분위기를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에도, 음악으로 그림으로 때로는 영화로 표현해 내는 신기한 사람들이다. 특히, 내 생각엔 미술가들이 제일 그렇다. 시대 정신과 분위기를 가시적인 선과 색의 조형언어로 표현해 내는, 우리 같이 직관이 더딘 범인(凡人)들은 흉내낼 수도 없는 엄청난 작업들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철학자들은 예술가들이 표현해 놓은 것들을 정리하고 이론화하는 사람들이다. 시대를 느끼고 읽어낸 것들을 언어로 옮겨 정리하고 이론화하는 철학자들 또한 만만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이 앞서 느낀 시대적 분위기에 대한 이해는 아무 생각 없이 세 끼 밥만 먹으며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충격적일 때가 많았다. 특히, 세기말의 철학은 더더욱 그러했다. 19세기말의 충격적인 이론을 내 놓은 세 명의 철학자들, 막스가 그랬고, 니체가, 그리고 프로이드의 철학이 평범하게 살고 있던 전 세계 사람들의 생각을 흔들어 놓아, 세상은 잠시 사상적인 혼돈 속에 있었다. 프로이드와 클림트는 개인적이고 은밀한 것으로만 여겨졌던 전통적인 性개념을 겉으로 드러낸 사람들이었다. 프로이드와 클림트식 사고 방식은 시대를 너무 앞섰던지라 많은 사람들로부터 거센 비난과 조롱을 한 몸에 받았다. 얘기가 너무 먼길로 돌았다. 정신차리고, 사람들로부터 놀림받았던 클림트의 그림, 'The Kiss'를 살펴보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눈감고 있는 볼 빨간 여인의 얼굴과 잘 보이지 않는 남자의 머리다. 그리고 두꺼운 남자의 목덜미와 그 목을 채 다 못 편 손으로 감싸고 있는 여인의 손, 그리고 여인의 조막 만한 얼굴을 조심스레 감싸고 있는 커다란 남자의 손, 그 남자의 한 쪽 손을 부끄러운 듯 잡고 있는 여인의 가느다란 손과 여인의 드러난 어깨, 팔과 무릎꿇은 여인의 이쁜 다리와 발이 눈에 들어온다. 나만 그런가? 아니다. 이것들이 먼저 눈에 들어 올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 그림에는 있다는 것이다. 이 그림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아르 누보(Art Nouveau: 불어로 새로운 미술이라는 뜻, 장식과 곡선을 특징으로 하는 경향)적인 장식적 곡선미(曲線美)다. 여인과 남자를 감싸고 있는 구불구불한 곡선의 아우트라인하며, 남자의 비잔틴식 황금색 옷 사이에서, 그리고 여인의 꽃무늬 옷 뒤에서 여인의 감정을 자극시키는 저 모양이 바로 아르누보 스타일이라는 것이다. 남자와 여인의 육체만이 이 그림에서 도드라져 보이는 이유는 그 아르누보 장식들의 평면성 때문이다. 명암도 입체감도 없는 배경과 남, 녀의 화려한 황금빛 옷은, 무늬가 다르지 않았던 들 어느 것이 남자 옷이고 여자의 것인지 모를 정도로 평면적이다. 옷이 아니라, 그저 장식으로 보인다. 또, 여자 옷 아래로 흘러 다리 아래로 떨어지고 있는 식물 줄기 같은 저 모양들은 어떤가. 알 수 없는 모양들의 순환과 화려한 색채, 평면적인 장식이 키스하려는 두 남녀의 숨막히고 에로틱한 감정을 극도로 유발해주고 있는 것이다. 현실감 없는 배경도 한 몫 한다. 현실과는 다른 시, 공간에 두 남녀를 떨어뜨려 놓은 듯한 배경은 키스하려는 찰나의 순간을 영원으로 몰고 가기에 충분하다.


★아가(雅歌), 노래 중의 노래.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아가서 1장 2절 말씀이다. 입맞춤이 사랑의 시작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지금 시작하는 두 남녀의 사람을 보고 있는 것이다. 포도주보다 더 나은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랑, 그리고 키스라...직접 사랑을 하고 키스를 하는 기쁨이야 이 그림에 비길 수 있을까 만은, 클림트의 'The Kiss'를 보고 있으려니 훔쳐보는 사랑도 보는 이에게는 꽤나 기쁨이 되는 것이다. 100년 전의 그림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화가의 감각과 스타일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그림을 보고 있으려니, 감성 에너지 충만했던 대학 시절이 그립다. 정문에서부터 언덕을 지나고 작은 숲을 지나, 높은 계단을 올라서야 갈 수 있었던 내 친구 도서관도 그립고, 지금쯤, 클림트 그림에 푹 빠진 또 다른 이의 감성을 충만하게 채워 주고 있을 커다란 화집도 그립다. 오랜 시간 동안 찾아 헤맸던 이를 만나 사랑의 기쁨을 누리고 있는 그대에게, 나처럼, '보는 사랑'에도 흡족해 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사는 그대에게 'The Kiss'를 바친다. 몸이 뜨거운 여름에 마음까지 뜨거워지는 에로틱한 그림을 보이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그래도 아이러니 하게 왠지 cool한 느낌이 드는 건 이 그림의 매력(魅力)인지 마력(魔力)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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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며 읽는 그림 이야기








09/06 칼럼 "로남의 문화예술비평"의 "Gustav Klimt 의 The Kiss; Le Baiser" 7
Gustav Klimt 의 The Kiss; Le Baiser

저는 구스타프 클림트를 좋아합니다. 아니 그보다는 그의 그림들을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좋아합니다. 그는 백년 전 사람이며 아르 누보(유겐트 스틸)의 거장이라고들 하죠. 아르누보란 말 그대로 [새로운 미술] 이란 뜻입니다. 저는 그의 작품 중에서도 <키스>라는 작품을 제일 좋아합니다. 이 작품은 그가 전성기를 구가한 시기에 내놓은 작품으로, 에로티시즘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제가 일정 공간의 까페를 인테리어한다면 그의 작품 키스를 전면으로 내세울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풍경화들로 남은 공간을 가득 채울 것입니다. 이 그림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정확히 말하면 [육체적 엑스터시]를 느끼게 합니다. 조금 야한 얘기로 [오르가즘]이라 할까요. 이 그림은 [오르가즘]적으로? 봐야 합니다. 클림트는 육체적 사랑을 이 작품에 구현해 놓았습니다. 다분히 의도적인 작품이란 얘기지요. 클림트가 왜 이렇게 그렸을까 궁금해 하면서 하나씩 살펴볼까요.

1. 색채 - 그림은 황금색등 총 천연색으로 무척 화려합니다. 관능적 감각세계가 이렇게 화려할까요? 관능적 극치(오르가즘)를 색으로 표현한다고 할 때 황금색이라 할 수 있을까요? 그림을 보면 여성이 남성을 끌어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남성이 여자를 끌어안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자는 마치 난폭한 폭군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여자는 미소를 짓고 있군요. 일종의 매저키즘일까요? 아니면 클림트는 남성적인 관능은 황금, 즉 돈에서 나온다고 봤을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 그림의 주제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 화려한 색채는 [사랑]이라는 주제에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일까요?

2. 화려한 기하학적 무늬 - 클림트는 원래 장식가였다고 합니다. 쉽게 말하면 인테리어였죠. 당초무늬, 동심원, 네모, 꽃, 담쟁이덩굴이 소용돌이치며 화면을 채우고 있군요. 무릎을 꿇고 있는 자세와 남성의 강렬한 포옹을 메워주는 여러 무늬들은 실내 디자이너였던 그의 전력을 말해주는 듯 합니다. 황금색과 은색의 나뭇잎에 둘러싸인 두 남녀가 화사한 꽃더미...일단 둘이 사랑을 나누기에는 더 없이 좋은(?) 장소군요. 여인의 옷에도 꽃이 장식되었군요.이 그림에 대한 여러 해석이 많은 데 꽃이 그림에 나온다는 것은 그의 여러 작품들을 비교했을 때 긍정적인 인간의 성취를 말합니다. 그래서 [난폭한 폭군]과 [매저키즘]은 일단 물 건너 간 것 같군요. 역시 이 그림은 정열적인 사랑을 아름답게 표현한 작품인 것 같습니다.

3. 여성 - 클림트는 유난히 많은 여성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클림트에 의해 표현된 여성상은 '요부'인 동시에 ‘어머니'라는 대조적인 모습들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그 당시 시대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당시 프랑스에선 최초의 여자중등학교가 등장했고, 독일에서도 여성 교육기관이 생기는 등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어 가는 분위기였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 당시의 작품들엔 강한 여성성, 고개숙인(?) 남자등이 많이 표현되었답니다. 이 부분은 나중에 소개할 때가 있을거예요(오스카 와일드를 기억하세요). 그 중에서도 클림트는 외설과 퇴폐적인 요소로 당대의 전통 화단에서 많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특히 빈 대학의 천장화가 많은 논란이 되었지만, 그는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독자적인 화풍을 개척해 나갔습니다.

4. 주제 - 누구는 이 그림이 황금 꽃밭에서 여자가 남자 품에 안겨 있는 로맨틱한 그림같지만 사실은 처녀가 흡혈귀의 습격을 받고 황홀해 하고 있는 그림이라고도 하죠. '처녀와 흡혈귀의 이분법'이라는 논리가 세기말에 유행했다는데 그 논리대로 이 그림을 해석한다면, 흡혈귀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처녀 상실의 순간을 그렸다는 것입니다. '데어 밤피레(Der Vampier: 흡혈귀)라는 오페라가 히트하면서 세기말의 시인과 화가들에게서 '처녀와 흡혈귀의 이분법'의 논리가 나왔다고 하죠.

또 [이 그림은 청순한 처녀가 함락당하기 직전...눈을 감고 몸은 긴장해서 굳어 있다. 벼랑 끝에 있는 느낌이지만 여자의 마음은 실상 성에 대한 기대로 꽉 차 있다. 표정도 그렇지만 손발이며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는 포즈이며...옷의 문양은 아르 누보의 장식 패턴 속에 클림트 특유의 성적 기호(記號)가 들어 있다. '순결을 잃는 그 순간 처녀는 죽는다. 처녀는 죽어서 새로운 여자로 태어난다. 그 여자는 본능을 그대로 드러내는 여자다.']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이 그림이 에로틱하며 육체적 오르가즘을 표현한 그림인 증거는 연인의 뒤에 있는 둥근 아우라가 잘 말해줍니다. 둥근 아우라는 남자의 성기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거대한 남근이자 남자 주인공처럼 강한 남성성을 드러냅니다. 이것으로 곧 이 작품이 [성적 환타지]가 주제임을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일종의 남근주의라 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그 시대상황(여성의 위치가 남성보다 낮았던)속에서 그 이유를 찾고 싶습니다.

또 여성들의 사회적 신분상승에 대한 남성들의 두려움이 증가되고 있는 상황에서 오히려 강한 남성성을 상징했던 것은 어찌보면 페미니스트들에게 배척받을 짓 같지만 누드 작품이 드물었고 오히려 외설과 퇴폐로 비난받았던 시대환경들을 돌아보았을 때 그의 작가정신이 가장 솔직하면서도 투철하게 인입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거대한 남근의 아우라, 성적 오르가즘.

두 연인이 사랑을 나누고 있는 모습(옷을 벗고 몸을 섞는)을 직접적으로 그리진 않았지만 아우라로서 충분히 상상력을 자극하는, 그의 낭만적 로맨티즘이 애로티즘과 결합한 구스타프 클림트의 최고 걸작이라고 하겠습니다.



P.S) 앞으로 칼럼 말미에 [음반] 한 장씩을 소개하겠습니다. 제일 처음 소개할 음반은 The Beatles의 입니다. , ,등의 짧은 곡 시리즈 중 하나입니다. 그들의 이 짧은 곡 시리즈 앨범은 일명 화이트 앨범에서 폭발하게 됩니다. 이 앨범은 짧은 곡 시리즈 중에서도 라는 명곡과 , , ...등 경쾌한 리듬을 담고 있습니다. 를 아트락의 시초라 보는 이들도 있지요. 팝을 하나의 예술적 경지로 올렸다는 바로 그 곡입니다. 와 더불어 자주 리바이벌되는 곡입니다.

로남의 문화예술비평

 

 

08/08 "이린숙의 엽서 한 장"의 몸사랑--구스타프 클림트의 "Kiss" 22

몸사랑--구스타프 클림트의 "Kiss"

스물두 살에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을 만났다. 그의 '키스'를 본 순간 내 머리 속에 있던 키스의 어떤 이미지가 무너져 내렸다. 영화를 좋아하던 나, 영화 속에서 수많은 키스신을 보았지만, 두 남녀 서로 얼싸안은 표정에서 수많은 환희의 물결을 보았지만 그건 여전히 어떤 금기 사항 같은 거로 남아 있었다. 내가 보았던 많은 영화들, 그 감미로워 보이던 키스의 종말은 늘 아픔과 슬픔이 씨줄과 날줄로 엮어져 한 여자의 삶을 망가뜨리곤 했으니까. 그래서 그때까지도 키스는 내게 어떤 욕망도 품게 하지 않았다.

그 시절 열화당에서 나온 작은 미술책자가 유행했었다. 비록 붓 한번 잡아 본 적 없는 나였지만 그림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 때 없는 용돈을 쪼개가며 열화당 그림책에서부터 금성출판사에서 나온 그림책을 시리즈로 사서 보곤 했었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와 '슬픔', 뭉크의 '절규'와 '사춘기', 천경자의 '길례 언니' 등 나를 흔든 그림들 많았지만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만큼 강렬하지는 않았다.

그 그림 속 키스는 나에게 키스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져 왔다. 딱히 사귀는 애인, 아니 남자 친구라도 있었으면 당장에 그를 만나 키스를 하려고 달려들 것 같았다. 습관처럼 혼자 차를 마시고 혼자 여행을 가던 그 시절이었기에 나는 혼자 키스를 할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누군가를 느끼며 마침내 그를 안고 때로는 그에게 안겨 입술을 마주 대고 숨결을 느끼다가 조금씩 입을 벌려 저 깊은 입 속의 어둠 속으로 가만히 혀를 들이밀며 그 남자의 혀를 찾아 서로 부딪치고 감고 휘저으며 마치 보트를 타듯이 그의 입 안을 노저어 다닌다. 그러면 내 마음에 작은 별 하나 뜨고 먼 하늘 끝자락에 예쁜 초생달도 떠올랐다.
별은 하나에서 둘로 둘에서 넷으로 불어나기 시작해서 마침내 우우우 소리를 내며 하늘 가득 별밭을 만들어 놓았다. 이쪽을 보아도 저쪽을 보아도 온통 반짝거리는 별빛들뿐이었다.
그것은 처음 보는 황홀경이었고 눈뜨고 나도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는 별빛이었다.

그랬다. 클림트의 '키스'는 내게 '키스'의 감미로움과 환희를 가르쳤다. 그것은 실습 없이도 완벽하게 가르친 교과서였으며 선생이었다. 두 남녀의 몸을 조각조각 화려한 색깔로 분할하여 마치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살아 춤추는 무희들인 양 화려한 무대로 등장하여 관객을 즐겁게 하고 관객을 환호케 하였다. '그렇구나 키스를 하면 저렇게 몸에서 광채가 나는 거구나.' '키스는 한 여자의 삶을 구렁텅이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저렇게 인어의 비늘처럼 빛나게 하는 거구나.' 나 그 이후로 영화 속 어떤 키스 장면을 보아도 클림트의 '키스'처럼 에로틱하지 않고 설레지도 않았다.

그런데 정말 '키스'는 내 몸을 별처럼 빛나게 하고 내 몸의 세포 하나 하나를 반짝이는 인어의 비늘로 만들어 미끄러지듯이 한 남자의 입 속을 유영하게 했을까?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나의 실망은 참 컸었다. 대학 3학년 겨울 첫 키스, 물론 엉겹결이어서였는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한 사람의 입 속을 노 젓듯이 탐색하는 감미로움도 아니었고 온몸을 별처럼 빛나게 하는 환희의 꽃밭도 아니었다. 그냥 조금 몸을 뜨겁게 하고 아찔한 순간이 찰나처럼 오는 듯 사라지고 마는 안타까운 것에 불과했다. 오래 동안 키스는 그런 것에 지나지 않았다. 두 남녀가 만나서 으레 주고받는 어떤 정형화된 몸짓이었다. 그것은 나를 슬프게 했다. 푸르른 스물 두어 살 무렵의 에로틱한 환상을 잃어버렸으니까.....

그러나 나는 눈가에 주름이 생기고 흰머리가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하는 나이에 내 몸 에서 별이 돋아나고 내 몸에서 인어의 비늘이 반짝이는 키스를 했다. 그것은 순간의 전율이 아니라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환희와 셀레임의 호수였다. 그의 입 속으로 미끄러지듯이 들어가, 일렁이는 물살을 가르며 수면 위로 쏟아지는 따가운 햇살을 느끼며 오랫동안 노 저어 다녀도 힘들지 않고 지치지 않는, 초여름 보트 타기 같은 것이었다. 눈뜨고 바라보는 그의 얼굴 하늘 같이 넓고 평화로웠으며 나도 그 곁에서 빛나는 별이었다.

사랑을 느낀다면 클림트의 '키스'를 보라. 이 세상에서 제일 황홀한 입맞춤을 하고 싶다면 클림트의 '키스'를 보라.

미루나무 한 그루


 

10/22 칼럼 "블랙 엘크의 전언" - 想像 (1) - Blue Elephant 10

쿠르베 구스타프 (Gustave Courbet, 1819 - 1877, 프랑스)
Seacoast, 1865, Oil on canvas, 53.5 x 64 cm,
Wallraf-Richartz Museum, Cologne

며칠 전 하늘을 보면서 감탄을 했더랬다. 전날 내린 비 때문인지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에 눈이 부실지경이었던 것이다. 그 파란 하늘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왠지 가슴 한구석이 쓸쓸해졌고 나는 무언가를 상상하고 싶어졌다.

무언가를 상상하고 싶어질 때는 가슴이 답답해질 때이다. 무언가에 짓눌린 듯 살아가고 있다고 느껴질 때, 나는 자유롭고 싶어지는 것이다. 불가능한 것, 이 세상에는 없는 것을 상상하는 일은 그러므로 '자유를 욕구'하는 행위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한 욕구는 출구가 없어 보이는 이 세계에 탈출구를 뚫는 단초가 되기도 한다. 인류의 역사가 진보해왔다면, 그 동력은 바로 인간의 저 터무니없는 상상력이라고 해도 무방하리라.

그 날 푸른 하늘을 바라보면서 내가 떠올렸던 것은 바로 '파란 코끼리'였다. 물론 이 세상에 파란색의 코끼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실 알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이 세계의 어느 구석쯤에 정말로 있을지도 모를 일인 거다.

몸집은 그다지 크지 않아도 좋다. 집채만한 크기의 코끼리가 일반적이므로 나는 오히려 아주 작은 코끼리를 상상해도 좋은 것이다. 파란색의 자그마한 코끼리를 말이다.

이 파란색의 작은 코끼리는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들을 위하여 존재한다. 소설 '어린 왕자'의 첫머리에 나오는 보아뱀 뱃속의 코끼리처럼 평소에는 그 실체가 잘 보이지 않지만, 상상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이 때때로 무료하고 권태로운 일상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을 때면, 어김없이 그의 꿈속에 나타나 그가 잃어버린 유머 감각과 상상할 수 있는 원동력을 회복시켜주곤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파란 코끼리가 하는 일은 간단하다. 작고 뚱뚱한 몸집을 뒤뚱거리며 어슬렁어슬렁 나타나서 '뿌웅∼' 하고 방귀를 뀌는 것이다. 이를 보고 있는 사람이 웃음을 참지 못하도록 말이다.

그러한 광경을 상상하고 있노라면 나는 어딘지 맥이 탁 풀려버리는 것을 느낀다. 살아가면서 애써 긴장해 있을 필요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현실은 지나치게 강요하는 것이 많고, 한시라도 여유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바빠야만 할 것처럼 만든다. 바쁜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스스로가 의도한 바쁨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사회적 시스템에 의해 바쁜 것이라면, 그것만큼 사람을 피곤하고 힘들게 하는 것이 없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군대에서 뼛속 깊이 체험했고, 그것이 얼마나 사람을 무기력하고 수동적으로 만드는지, 그리고 얼마나 만성적인 스트레스 속에 살아가게 만드는지 잘 알고 있다.

대학 4학년 2학기. 슬슬 취업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되면서, 나는 이 사회의 시스템과, 그 속에서 하나의 '노동력'으로 편입되어야 한다는 현실에 적잖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 사회가 요구하고 있는 '노동력'의 '질'에 내가 부응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는가를 스스로 검증해야 할 때마다, 오랜 가뭄에 의해 땅이 갈라지듯 가슴의 밑바닥이 쩍쩍 갈라지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학점, 토익, 사회봉사경험, 자기소개서.... 이렇듯 상상력이 거세당한 메마른 단어들 앞에서 나는 무력하다. 그리고 바짝 긴장하게 되는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나는 저 메마른 땅에 투항해야 한다. 그곳에 '우물'이 있기를 믿으면서. 아니, 있어야 한다고 우기면서... 그곳에는 그래도 여전히 아름다움이 숨어있고, 나는 그것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알 고 있다. 이제 사회라는 '사막'에 내던져질 나는 보아뱀 몸속의 코끼리와 같다는 것을. 보아뱀 몸 속의 코끼리란, 사실 너무나 잔인한 광경인 것이다. 소설 '어린왕자'에 등장하는 그것은 비록 상상의 산물이지만, 이 세계의 잔인성을 우회적으로 드러내고 있기도 한 것이다. 보아뱀은 분명 코끼리를 한 입에 잡아먹을 수 있을 만큼 굉장한 생존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일단 코끼리를 삼키면 그것을 보여주지 않으며, 사람들은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의 그림을 보여주면, 엉뚱하게도 그것을 '모자'라고 한다. 보아뱀도, 코끼리도 명확하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그림이 모자가 아니라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는 한층 더 구체적인 상상력의 산물이 필요하다. 즉, 보아뱀과 그곳에 먹혀버린 코끼리를 모두 보여주는 그림 말이다.

이렇게 보면, 상상은 불가능한 것 혹은 이 세상에는 없는 것을 관념 속에 가능케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또한 현실에 기반하며, 결국 보이지 않는 이 세계의 또 다른 진실을 보게 하는 기능을 갖기도 하는 것 같다.

나는 다시 파란 코끼리를 생각한다. 나에게 파란 코끼리와 그 녀석의 방귀는 이 세계의 무엇을 말해주고 싶었던 것일까? 그저 한가한 어느 가을날, 푸른 하늘을 바라보던 한 실없는 사람의 시답잖은 상상일 뿐이었을까?

분명한 것은, 이왕에 떠올린 '파란 코끼리'에 대한 상상을 조금은 더 해보고 싶다는 것이다. 나는 왠지 이 사회에 내던져질 스스로를 위해,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 녀석을 발견해 낸 것 같기 때문이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