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시론] 난쟁이 어깨 위에 올라탄 난쟁이
******************************************************************** 난쟁이 어깨 위에 올라탄 난쟁이 : 지적 인프라 결핍... 한국인의 초라한 자화상 학생 시절 어느 역사학자로부터 우리 시대에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사상가가 나타나지 않는 이유에 대한 설명을 들은 적이 있다. 예컨대 20세기 전반기만 해도 토인비, 슈바이처, 러셀 같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사상적 거인들이 있었는데, 왜 이런 인물이 우리 시대에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 역사학자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가 사는 시대가 패러다임이 전환되는 시기이기 때문에 위대한 지적 거인이 나타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근대 이후 20세기까지 지배적 사조로서 유지되었던 과학주의의 패러다임은 이미 무너지기 시작했는데, 이를 대신할 새로운 패러다임은 아직 형성되지 않았고, 이렇듯 패러다임이 교체하는 시기에는 ‘인물’이 나오기 힘들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논의의 범위를 우리나라로 한정시키면, 인물 부족 원인을 밝히기 위해 구태여 그런 거창한 패러다임 이론까지 끌어들일 필요도 없어 보인다. 특히 우리나라의 출판문화와 번역문화, 그리고 지적 인프라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면, 우리나라 정계, 관계, 학계, 언론계, 종교계 등 여러 분야에 존경할만한 지도자, 지도자다운 지도자가 턱없이 부족한 이유, 특권층은 있어도 지도층은 찾아보기 힘든 이유가 따로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책에 관해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우리나라에는 서양 고전은 말할 것도 없고, 동양 고전마저도 제대로 번역된 것이 드물다. 동양철학자인 김용옥 교수, 한학자인 홍승균 선생(홍승균 선생은 김용옥 교수의 『논어』 해석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한학자이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지만, 조선왕조 5백년 유교국가라면서 제대로 된 사서오경(四書五經) 번역본마저 갖지 못한 게 우리나라 형편이다. 서양 고전의 경우는 더욱 한심하다. 정치학자가 그렇게 많아도 정작 근대정치사상의 문을 연 토머스 홉스, 마키아벨리 등에 대한 제대로 된 번역본을 찾기가 힘들다. 교육학자는 많아도 제대로 된 루소의 『에밀』(페스탈로치가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책이다)번역본도 찾을 길 없다. 20세기 영국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2천년에 달하는 서양 철학의 역사는 플라톤 철학에 대한 주석(註釋)에 불과하다고 지적했건만, 우리에게는 제대로 번역된 『플라톤전집』도 없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전집』도 없다. 사정이 이 지경이니, 우리나라의 지도자 연 하는 사람들이 젊은 날 읽었다는 책의 ‘질’과 ‘양’이 어떤 것인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이 어린 시절 읽은 동화책은 일본어 번역본을 중역한 엉터리 동화책이고, 그들이 학창시절 읽은 소설책들 역시 일본 번역을 재탕한 오역 투성이였다. 동서양의 주요 고전들 중 대부분은 우리에게 제대로 소개조차 되어 있지 못한 딱한 현실이다. 물론 소개가 되어 있다고 해도 그 품질을 믿기가 힘들다. 젊은 날 고전 읽기를 통해 정신적 눈이 활짝 열리는 경험을 하지 못한 그들 ‘지도층’에게서 공동체와 사회에 대한 식견이나 통찰 또는 헌신적 자세를 기대할 수 없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그저 날이면 날마다 사리사욕에 당리당략에 이전투구 아닌가? 역사의식도 방향감각도 없는 갈지(之)자 행보가 난무하지 않는가? 잘난 지도층이 ‘정신적 영양실조’에 걸려 그 지경들이니, 우리 민초들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한국 최고의 대학인 서울대가 전 세계 대학들 가운데 800위 바깥으로 밀려나는 수모를 당하는 원인 중 하나도 이런 맥락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오래 전의 일로 기억된다. 당시 청소년 비행 문제가 사회적으로 불거지자, 아기들에게 모유 대신 우유를 먹인 것이 그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된 적이 있었다. 사람 자식에게 동물 새끼에게 먹이는 음식을 먹였으니 사람 노릇 못하고 탈선을 일삼는다는 것이다. 우스개 소리로 지어낸 말이라고 생각되기는 하지만, 여하튼 먹는 음식이 그 몸을 형성한다는 점만은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그가 읽고 배운 것으로 사람의 정신이 형성된다는 것 또한 부정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우리 국민이 섭취하는 정신적 음식이 불량식품이거나 함량미달의 식품이 아닌지 관심을 가질 일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소설의 무대가 되는 수도원에서 유리 세공 일을 하는 니콜라라는 사람이 윌리엄 수사(修士)에게 말하길, 그보다 2세기 전에 만들어진 유리창과 같은 걸 자신들은 만들 수가 없다고 했다. 겨우 고치는 정도인데도 굉장히 어렵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옛날의 그 색깔을 낼 수 없거든요. ‥‥‥ 맥이 빠집니다. 우리에게는 이제, 옛날 사람들 같은 재주가 없는 모양입니다. 거인의 시대는 가 버린 것이지요.” 그러자 윌리엄 수사가 이렇게 응수한다. “그래요, 우리는 난쟁이들입니다. 그러나 실망하지는 마세요. 우리는 난쟁이는 난쟁이이되, 거인의 무등을 탄 난쟁이랍니다. 우리는 작지만, 그래서 때로는 거인들보다 더 먼 곳을 내다보기도 한답니다.‥‥‥(하지만) 우리 시대의 식자(識者)들은, 대개 난쟁이의 무등을 탄 또 하나의 난쟁이일 경우가 많습니다.” 거인의 어깨 위에 선 난쟁이’라는 표현은 12세기 프랑스의 수도사 베르나르 드 사르트르가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윌리엄 수사가 인용한 말에서 ‘거인’이란 곧 ‘전통’을 뜻한다. 난쟁이는 물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비록 우리는 난쟁이처럼 작지만, 위대한 전통(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쳐다보기에 거인보다 더 멀리 내다볼 수 있다는 말이다. 이 거인을 ‘지적 인프라’라는 말로 바꿔 표현해도 문맥에는 별 손상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가 올라탄 어깨는 과연 거인의 어깨라고 할 수 있을까? 만일 우리에게 그런 ‘전통’, 그런 ‘지적 인프라’가 있었다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그 치욕적인 역사를 겪었을 리 없었을 것이고, 20세기 말의 경제 위기를 치를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윌리엄 수사의 말은 고스란히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우리 시대의 식자(識者)들은, 대개 난쟁이의 무등을 탄 또 하나의 난쟁이일 경우가 많습니다.” ⓒ 박상익 *** 난쟁이 어깨 위에 올라탄 난쟁이: 지적 인프라 결핍... 한국인의 초라한 자화상 “우리 시대의 식자(識者)들은, 대개 난쟁이의 무등을 탄 또 하나의 난쟁이일 경우가 많습니다.” 박상익의 역사 읽기 'Life > e—intro—intercolumn'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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