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서울 청담동 카이스갤러리를 찾은 관람객들의 반응은 이랬다. “어∼ 전시 공간이 텅 비어 있네. 작품은 어디 있죠?” 하며 의아해한 경우, “매우 의미 있는 좋은 전시로군” 하며 고개를 끄덕인 경우, “집에 가서 따라해봐야겠다”라고 작은 소리로 또는 마음 속으로 중얼거리며 회심의 미소를 지은 경우. 전시장을 들어서면 텅 빈 공간에 잠시 당혹스러울 수도 있었겠지만, 흔히 전시 공간에 ‘설치’되지 않은 다음에야 전시장의 벽면에 ‘걸려’ 있게 마련인 작품들이 눈에 보이지 않았을 리 없고. 왜 사람들은 큐레이터를 향해 “작품은 어디 있죠?”라는 황당한 질문을 던졌을까. 이 싱거운 수수께끼는 ‘콜럼버스의 달걀’과 같은 이치로, 미술품에 대한 편견을 깨고 나면 역시 싱거운 답을 얻을 수 있다. 바로 전시장의 벽면 자체가 작품이었던 것. 하지만 전시된 작품들을 최대한 돋보이게 하기 위한 숙명적인 흰색의 벽이 아니라, 정말 ‘따라하고 싶다’는 욕구를 불러일으킬 만큼 이색적인 벽들이었다. 이 전시의 제목은 ‘Wall Works Ⅰ’. 미니멀리즘, 개념 미술, 비디오 아트, 포스트모더니즘 등 각자 추구하는 바가 다른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이 ‘벽’이라는 하나의 테마 아래 7개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었다.
이 밖에 조셉 코수스는 문학 작품을 ‘귀여운’ 네온사인을 이용해 미술의 언어로 바꿨으며, 토마스 그룬펠트는 마치 소파 등의 가구를 연상시키는 질감의 오브제를 동일한 색채로 분할된 벽면 위에 설치했고, 마지막으로 백남준은 텔레비전의 시험 방송용 7색깔 줄무늬의 벽면 모서리에 4대의 비디오 모니터를 설치했다.
그 전시 작가의 면면만으로도, 갤러리의 벽면들이 바람막이·파티션·작품 지지대라는 일상의 기능을 넘어 미술 작품으로 탈바꿈하는 흥미로운 경험만으로도, 전시는 주목받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것은 전시된 작품들이 판매를 위한 것이라는 점. 벽화를 판다? 벽화의 경제적인 측면을 떠올려보면 흔히 원하는 장소(벽)에 주문, 제작되는 방식을 생각하게 된다.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가끔 볼 수 있는 벽화 작품들의 경우에도 전시가 끝나면 하얀 페인트로 덧칠해지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갤러리 벽면이라도 떼어 팔 생각일까? 카이스갤러리는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Wall Works Ⅰ> 전시를 통해 벽화에 판화나 사진처럼 ‘에디션(edition)’ 개념을 도입했다. 각각의 작품들은 10개 안팎의 에디션이 정해져 있어, 제한된 수량 내에서 재생되어 판매될 수 있다는 것. 그 가격은 판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에디션이 올라갈수록 비싸진다. 그런데 판화나 사진처럼 ‘대량 생산’의 메커니즘을 갖고 있지 않은 벽화의 경우 어떻게 재생될까. 작가가 일일이 구매자를 찾아가 원하는 장소에 손수 제작이라도 해주는 걸까? 예를 들어 누군가가 이미 크노벨의 작품 <Mennige(다각형)>의 구매자로 나섰다고 하자. 갤러리는 작품 자체이기도 한 벽면을 뜯어내지는 않으며, 작품을 구매한 사람이 원하는 장소로 찾아가 똑같이 벽화를 그려준다. 하지만 갤러리가 작가를 대동하지는 않는다. 이미 크노벨은 작품을 제작할 수 있도록 상세한 매뉴얼을 제공할 뿐이다. 언뜻 거대한 오렌지색 ‘M’으로 보이는 작품을 재생할 때는 그 매뉴얼에 따라 정확한 ‘M’의 형태와 정확한 ‘오렌지’의 컬러 데이터 등 작가가 정한 규칙을 지켜야 한다.
카이스갤러리는 이 흥미로운 벽화의 에디션 개념을 최초로 국내 작가들에게 도입해, <Wall Works Ⅱ> 전시를 열고 있다. 3월 11일~4월 24일까지 열리는 이 전시에는 회화, 사진, 영상 등 서로 다른 작품 세계를 추구해온 8명의 작가가 참여한다.
기존의 테이핑 기법을 응용한 서혜영은 벽돌의 이미지를 기호화해, 벽돌의 본래 기능과 달리 열려진 벽면을 만들고, 성낙희는 발랄하게 튀어나가는 잉크의 흔적을 슬라이드 프로젝션과 페인트 작업으로 구현하고 있다. 이 밖에도 빨간색 의자와 색면 벽화를 결합한 이미경, 춤추는 남녀의 사진을 벽지로 전사한 정연두, 픽셀 단위로 정교하게 계산된 ‘유기적 기하학’ 추상을 추구하는 홍승혜 등이 갤러리의 흰 벽들을 이야기 가득한 벽화 작품으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참여 작가 중 서혜영은 “언젠가 갤러리 외벽에 벽화 작업을 한 적이 있었는데, 전시 기간이 지나도 철거되지 않아 당혹스러웠던 적이 있어요. 여러 번 항의를 했지만 끝내 무시하더라구요. 소유권에 대한 문제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손상돼 가는 벽화를 전혀 관리하지 않는 것에 더욱 화가 났었죠.”라고 말한다. 그리고 덧붙여 “달리 생각해보면 벽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 거죠. 건물 외벽이 벽화로 장식돼 있으니까 보기에 좋았던 거예요.” 한다. 작가들은 하나같이 벽화 작품에 대해 이해가 부족한 국내 현실에 아쉬움을 표하면서, 이번 전시가 벽화의 제작과 유통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계기가 되기를 바랐다.
미술 작품은 작가의 손에 의해 완성된다. 하지만 드물게는 작가는 아이디어만을 제공하고, 그 설치나 제작은 제3자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 이번에 전시된 작품들이 제3자에 의해 제작되었고, 또한 판매되는 작품이 제3자에 의해 제작될 것이며, 이후 같은 방법으로 매매가 가능한 것처럼. 이렇듯 <Wall Works Ⅰ,Ⅱ>전은 미술 작품에 대한 새로운 정체성 찾기이며, 고대의 동굴 벽화가 그랬듯 벽화를 다시 생활 속으로 돌려놓으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
출처 : [fl the Style] |
'Blue > e—art—exhibit' 카테고리의 다른 글
Handling Works of Art (0) | 2004.05.25 |
---|---|
“L.A. Woman” (0) | 2004.05.20 |
일상의 연금술전 Alchemy of Daily Life (0) | 2004.05.09 |
Ray Carofano III (0) | 2004.05.07 |
컬러 & 데코展 (0) | 2004.05.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