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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irit/e—Bible—study

Isaiah 이사야 6 - 10 장‏

by e-bluespirit 2009. 8. 2.

 

 

 

 

 

 

 

 

이사야 6장 입니다.

 

유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버림 때문입니다.

말씀을 버리니 어둠과 고난 가운데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하는 사람을 찾고 계셨습니다.

어떤 사람을 찾으십니까?


1. 성전을 찾는 사람입니다. (1절)

웃시야 왕이 다스리던 시대는 솔로몬 시대처럼 나라가 번성하였고,

활력이 넘치던 평화로운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그 왕이 문둥병에 걸려 죽고나자 나라는 점점 어려워지고 소용돌이치며

혼돈속으로 빠져들어가던 국제 정세에 휘말리기 시작했습니다.

즉 유다 나라가 내외적으로 위기에 빠진 것입니다.

이것을 바라보던 이사야는 큰 불안과 절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성전에 올라갔고 거기서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환상을 본 것입니다.

그 환상을 보고 새 희망을 발견합니다.

웃시야 왕은 죽었어도 유다를 통치하시는 분은 하나님 이시라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내 주변 상황이 아무리 좋지 않아도

상황이 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지배하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2.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2-7절)

성전에서 이사야가 바라본 환상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 영광 앞에 이사야는 마치 발가벗겨진 것 처럼 자신의 죄를 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면 제일 먼저 자신의 죄가 보입니다.

그 죄를 자복했을때 하나님은 그 죄를 깨끗케 하셨습니다(6-7절).

아무리 무섭고 흉악한 죄도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면 사함 받습니다.

또 아무리 작은 죄도 용서를 구하면 사함 받습니다. 커도 죄요, 작아도 죄 입니다.

한, 두가지의 큰죄에 무너지는 사람보다,

여러가지 작은 죄에 무너지는 사람들이 훨씬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히 서야 하겠습니다.


3.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입니다. (8-13절)

이사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히 응답하였습니다.

'내가 여기있습니다. 나를 보내소서'.

어떤 사명을 위해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은 큰 은혜입니다.

단 응답이 있을때 입니다.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하면 내게 은혜가 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았다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도 나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응답하시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돌보심 가운데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이사야 7장 입니다.

 

이스라엘 왕 베가와 수리아 왕 르신이 연합군을 결성하여 유다를 침공해 왔습니다.

큰 두려움에 떨고 있던 유다왕과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1. 믿음에 굳게 서 있으라고 격려하셨습니다. (3-9절)

유다왕 아하스와 백성들은 이, 수 연합군의 침공으로 마치 산의 숲들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습니다(2절).

두려움에 쌓여있던 아하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를 통해서 '너는 삼가며 조용히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조용하라는 것은 마음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위기의 때 경거망동 하지 말라시는 것입니다.

또 함부로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위기가 왔어도 하나님을 의뢰하며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수 연합군이 아무리 기세를 올리는 것 같아도 연기나는 타다 남은 부지깽이 그루터기와 같다는 것입니다.

부지깽이로도 쓸 수 없어지면 그냥 아낌없이 아궁이에 던져질 부지깽이를 왜 두려워 하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과 환난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우리를 대적할 수 없습니다 (롬 8:32-37).


2.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음을 보여주셨습니다. (10-17절)

사람들은 때때로 눈앞에 증거를 보아야만 확신이 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실 때, 기드온을 부르실 때,

주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실 때도 어떤 징조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은 보지 않고도 믿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요 20:27-29절).
하나님은 아하스 왕에게 어떤 징조든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저런 그럴듯한 이유로 아하스는 징조를 구하지 않습니다.

이미 앗수르에게 도움을 요청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아하스 왕은  하나님 보다는 세상의 보이는 힘을 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어코 징조를 보이시겠다고 하십니다.

그 징조의 내용이 14절 입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임마누엘'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유다를 위해 예루살렘 안에 현존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3. 말씀에 불순종 하므로 환난을 당하게 하셨습니다.(18-25절)

앗수르와 애굽을  의지한 유다는 바로 그 앗수르와 애굽에 의해 큰 수치와 고난을 당합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때일수록 사람 보다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저버리고 세상을 의지하는 우를 범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승리하세요.

 

 

 

 

 

 

 

이사야 8장 입니다.

 

이사야 선지가 아들을 낳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라고 지어 주십니다.

그 뜻은 '빠르게 노략하다', '전리품을 향해 급히 달려 들다'라는 뜻입니다.

당시 남 유다를 침략했던 북 이스라엘과,

아람이 앗수르에 의해 신속히 멸망당하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담겨 있는 이름이었습니다.

이 아이의 이름은 당시 유다 백성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위로가 됩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1. 역사를 진행하시는 분은 하나님 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이가 엄마,아빠라는 말을 채 하기도 전에

그러니까 당시로부터 2-3년이 못되어서 이 예언이 이루질 것이라 하셨습니다.

실제로 이 예언이 말씀이 주어진 후 3년이 못되어

이스라엘과 아람은 앗수르의 디글랏빌레셋 3세에 의해 멸망 당합니다.

역사의 주관자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십니다.

개인의 역사의 한 민족이나 나라의 역사건 아니 온 우주의 역사의 주관자도 하나님 이십니다.

개인이나 나라가 겸손히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의 의지할 때 평안과 소망의 복을 받습니다.


2. 우리의 유일한 보호자는 하나님 이십니다.(5 -8절)

실로아 물은 예루살렘 성전 남쪽 티로페온 골짜기 입구에 있는 연못으로,

이 물은 성전에 공급되어 제사를 드리는에 사용되었습니다.

'실로아 물을 버렸다'는 말씀은 성전 예배를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 신앙을 포기한 것입니다.

그 대신에 7절의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는 앗수르를 의미합니다.

즉 저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앗수르를 택했다는 것입니다.

잔잔한 실로아 물 같은 하나님을 저버리고

더 강력해 보이고 위엄있는 것 같은 앗수르를 의지하는 것은

유다 사람들 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 또한 그렇습니다.

눈에 보이는 화려함, 많은 사람들의 모임, 강력해 보이는 어떤 힘들,

매력적 입니다. 의지가 됩니다.

그러나 바로 그것들에 의해서 유다가 쓰러지고 말았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보호자는 오직 하나님 한분 뿐이십니다.

승리하세요.

 

 

 

 

 

 

 

이사야 9장 입니다.

 

특별히 6절에 탄생하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에서 그분을 가리켜 '평강의 왕'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평강'은 우리가 잘 아는 단어 즉 '샬롬' 입니다. '샬롬'은 히브리인들의 인삿말 이기도 합니다.

그 깊은 뜻은 '하나님과 그 대리자 사이의 평화의 언약'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사용된 의미는 '싸움이나 다툼, 분쟁이 없는 상태'의 의미가 강합니다.

그러나 '샬롬'은 단순히 외적인 분쟁이 없는 것만이 아니라

내적인 갈등이나 마찰, 분쟁이나 상처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저 싸움이 그쳐버린 그런 '평강' 보다

훨씬 높고, 깊은 의미의 '평강'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1. 하나님과의 평화 입니다.
 
첫 사람 아담의 범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갈라 놓았습니다.

한쪽에는 정죄를 한쪽에는 심판을 가져왔습니다.

하나님과 갈린 상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계속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인간 사이에는 진정한 평화가 없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오실 메시아를 가리켜서 '평강의 왕'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불화가 해결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전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8:1).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세상에서 화평을 누릴 수 있는 첫 단추인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야 말로 진정한 의미의 평화요 모든 평화의 근거가 됩니다.

 
2. 영적인 평화 입니다.
 
죄는 우리 안에 혼란을 조성합니다.

불화를 만들어 냅니다.

끊임없이 원망과 불평을 쏟아지게 합니다.

불의와 이기심, 헛된 탐욕과 쾌락을 추구하게 하고,

지혜와 분별력, 거룩한 열심등를 사라지게 하고

세상의 명예와 재물을 하나님으로 섬기게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심령에 새로운 질서가 생깁니다. 

죽었던 심령이 살아나 영적인 능력이 제자리를 찾게 되고

그때 참된 평강과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여러분 심령에 평강이 있으십니까?

세상이 아무리 막가도, 경제적으로 아무리 어려워도,

그 무엇으로도,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내적인 평강을 누리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평화를 심령에 담고 계신 것입니다.
 


3. 사회적 평화 입니다.
 
이것은 강대국을 물리친 후에 오는 평화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이 아님을 뼈져리게 체험했습니다.

일제가 물러가면 평화가 올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님들은 일제가 물러간 후 한달동안 잔치를 동네마다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남, 북이 갈리고, 좌, 우 대립의 극심한 혼란속을 헤메다가

결국 채 5년이 되지못해 같은 조상, 같은 글, 같은 말을 하는 단일민족이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던 것입니다. 

샬롬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나타난 사랑(요 13:34, 35),

화해(마 5:25), 관용(마 5:43-48), 인내(살전 5:14)등을 의미합니다.

이런 것들이 진정한 평화를 만들어내는 조건이요 근원인 것입니다.
 
이 '평강'은 먼저 나에게 찾아옵니다.

그리고 나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 갑니다. 

온 세상이 평화로와도 내가 평안치 않으면 내가 사는 세상은 평안이 없는 것입니다. 

구원자, 평강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모심으로

진정한 평강을 누리시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주님 안에서 평안하시길 빕니다.      

 

 

 

 

 

 

이사야 10장 입니다.

 

본문은 앗수르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앗수르는 B.C. 8세기 초부터 7세기 말까지 200년 가까이 고대 근동 전지역을 지배했던 대 제국이었습니다.

앗수르 군대에 의해 당시 수많은 근동의 나라들과 왕들과 방백들이 짖밟혔습니다.

그 대제국 앗수르가 갑자기 그 힘을 잃고 무너져 버렸습니다.

왜 그토록 강하고 광대한 나라가 멸망했을까요? 

앗수르와는 비교할 수 없이 작은나라

유다의 한 선지자의 예언을 통해서 그 이유를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1. 자기를 강하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알지 못하는 자는 패망합니다. (5절)
 
세상의 모든 역사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구속사를 중심축으로 전개됩니다.

이것은 앗수르가 왜 근동의 패자로 군림했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던 북 왕국 이스라엘을 징벌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앗수르는 이 사실을 알지도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자기들의 힘을 가지고 주변 나라들을 정복하는 일에만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영원할 것 같았던 그들은 그러다가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행한 결과를 얻게 됩니다.
 


2.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을 멸시하는 자는 패망합니다. (8-9절)
 
자기 힘이 강대해진 앗수르는 결국 유다라는 작은 나라가 섬기는 하나님을 얕보기 시작했습니다.

자기들이 능히 하나님과 싸워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8-9절).

이런 일은 지나간 역사속에, 그리고 지금도 우리의 삶속에서 얼마든지 나타나는 일입니다.

두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지 마십시요. 

앗수르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3. 교만하게 행하는 사람은 패망합니다.(12절)
 
'앗수르 왕의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을 벌하시리라'(12절) 고 했습니다. 

그들의 교만한 언사를 보십시요 (13-14절).

하나님 앞에 교만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넘어짐의 앞잡이라고 했습니다 (잠 16:18절).

우리는 조금만 잘되도, 남들보다 조금더 안다고, 배웠다고 스스로 교만해 집니다.

때로는 알면서 때로는 모르면서 말입니다.

교만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간 앗수르 기억합시다.
 


하나님 앞에 겸손한 우리 모두가 되십시다.

 

 

 

 

 

 

 

 

 

 

 

 

 

 

http://sahnsem.com by Pastor Joseph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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