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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irit/e—cr—life

서로 이롭게

by e-bluespirit 2012. 1. 7.

 

 

 

 

 

 

 

 

 

 

 

< 서로 이롭게 >

이(利)는 벼 화(禾)변에 칼 도(刀)를 그린 것이다.
씨를 뿌리고 거둔다는 뜻이다.

조 1알이 1천5백 알로 불어난다.
이렇게 이로운 것은 없다.

주역(周易)에서는

서로서로 많은 도움을 준다고 해 이(利)자를 쓴다.
이(利)는 남을 해치는 것의 반대이다.


- 다석 어록 81쪽 -

 

 

 

< 풀이 >
맹자는 ‘이(利)’와 인의(仁義)를 대조시켰다. 그래서 이(利)를 말하면 이기적이고 인의도덕을 외면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본래 이(利)는 벼 화(禾)와 칼 도(刀)가 결합된 것으로 농사에서 나온 글자다. 이(利)는 씨를 뿌리고 거둔다는 뜻을 가진 말이고 씨를 뿌리면 수 십 배, 수 백 배, 수 천 배를 거두니 참으로 이로운 것이다. 생명의 본성은 이처럼 이로운 것이고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게 아니다. 씨알의 삶은 서로 이로운 것이다. 이(利)는 날카로우면서 화(和)하고 통(通)하는 것을 나타내는 글자다. 생명은 날카로우면서 화통한 것이다. 바람과 햇빛, 물과 흙을 받아들여 생명활동을 펼칠 때는 우주만물과 함께 숨을 쉬며 화통하지만, 생명이 아닌 것, 죽은 것과 자기를 구별할 때는 한없이 날카롭다. 씨알은 언 땅과 바위를 뚫고 제 생명을 피어낸다. 날카로우면서 화통하기 때문에 두루 이로울 수 있다. 아첨하고 비벼대면 당장 저에게는 이로울지 모르나 서로 해치게 된다.

 

 

 

< 얼·혼의 참을 증명하는 살·몸 >


살·몸은 얼·혼의 참을 증명하는 도장이다.

내 살 내 몸이 닿지 않은 것,
내 피 내 맘이 배지 않은 것은 내 것이 아니다.


-“씨알의 설움” 전집 4. 57 -

 

 

 

 

< 풀이 >
살은 육체를 나타내고 몸은 육체의 유기체적 전체성을 나타낸다. 얼은 육체를 초월한 정신이고 혼은 육체를 넘어서면서도 육체와 연관된 정신이다. 얼·혼은 살·몸을 초월하는 것이면서 살·몸을 통해서 표현되고 실현된다. 살·몸과 무관한 얼·혼은 허깨비거나 말장난이다. 함석헌은 육체와 몸의 극복과 초월을 강조하고 얼과 정신을 내세움으로써 얼과 몸, 정신과 육체를 대립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살·몸이 얼·혼의 참을 증명하는 도장이라고 함으로써 함석헌은 얼·혼과 살·몸을 뗄 수 없이 결합시킨다. 얼과 혼을 강조하고 앞세우는 함석헌의 씨알사상이 이원론이나 관념론에 머물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씨알사상은 주체적이며 실천적인 생명철학이다. “내 살 내 몸이 닿지 않은 것, 내 피 내 맘이 배지 않은 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보다 살과 몸, 피와 맘을 더 강조할 수 없다.

 

 

 

< 정신의 용광로 >

발달은 결국 정신의 발달입니다.
사람은 줌이요 받음입니다.

산 담에는 그 남는 정신을 훗사람에게 넘겨주는 것이고,
난 담에는 전 사람의 살고 난 정신을 밑천으로 전해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작은 생각이 그것을 원하거나 말거나간에 그것은 그렇게 됩니다.
우리 생각 뒤에 보다 크고 어진 엄청난 생각이 있어 그것을 하고 있습니다.

이 어진 생각이
잘나고 못난 모든 사람의 살고 난 결과를
정신이라는 한 용광로 속에 집어넣어 녹여가지고는
다시 새 세대로 새 사람으로 빚어냅니다.

신비입니다. “얼음은 녹습니다”


- 씨알의 소리 1972. 2·3월 전집8 37~8 -

 

 

 

 

< 풀이 >
물질적 유산이 아무리 엄청나고 찬란해도 그것을 지탱하고 발전시킬 정신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피라밋, 만리장성, 베드로 성당, 거대한 궁전, 불상과 불탑들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을 지킬 의지와 열정, 새 문화와 종교를 창조할 정신력이 없으면 무슨 힘이 되고 자랑이 되겠는가? 지나간 역사가 우리에게 남겨준 것은 정신뿐이다. 우리가 죽은 다음에 후대에 남겨줄 것도 정신뿐이다. 정신이 살아 있어야 전통문화도 살리고 새 문화도 지을 수 있다.
이 우주에는 거대한 정신의 용광로가 있는 것 같다. 한 시대가 살아낸 삶의 결과를 이 우주적 정신의 용광로 안에서 녹여서 새 세대 새 사람으로 빚어낸다. 스스로 정신을 잃고 스스로 정신을 버리지 않는 한 정신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스스로 모욕하고 스스로 쫄지 않는 한 정신은 결코 죽지 않는다. 또 어떤 정신도 제 몸 안에, 시간과 공간 안에 갇히는 법이 없다. 제대로 살아 있는 정신이라면 반드시 다른 정신에 영향을 미친다. 정신은 주체이고 전체이기 때문이다.

 

 

< 줄곧 숨 쉬고 줄곧 생각하라 >


쉬지 않는 것이 불식(不息)이다.
숨을 쉰다는 식(息)이다.

자(自)는 사람의 코를 그린 글자이다.
나의 대표가 코이다.

코는 숨쉬는 기관으로
숨쉬는 생명이 자기이다.

숨은 코로만 쉬는 것이 아니다.
정신으로 숨을 쉰다.

정신의 숨 쉼이
생각이다.

줄곧 숨쉬고 줄곧 생각하여 하늘에 다달아
내가 나가 되는 것이다.

거짓나(제나)가 참
나(얼나)가 되는 것이다.

멸망의 나에서
영생의 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곧이 곧장 나아가는 것이다.


- 다석 어록 81~82쪽 -

 

 

 

< 풀이 >
식(息)은 숨을 쉰다는 뜻과 일을 그치고 쉰다는 뜻을 함께 가지고 있다. 숨은 쉼 없이 쉬어야 하는 것이다. ‘나’를 나타내는 자(自)는 사람의 코를 그린 것이다. 생명의 숨을 쉬는 코가 ‘나’다. 숨은 코로만 쉬지 않고 정신으로도 쉰다. 정신으로 숨 쉬는 것이 생각이다. 코로 쉬거나 정신으로 쉬거나 숨은 하늘과 통하고 하늘로 나가는 것이다. 줄곧 숨 쉬고 줄곧 생각하여 하늘에 다다르는 것이 내가 나로 되는 것이고 참 나가 되는 것이고 멸망의 나라에서 영생의 나가 되는 것이다. 다석은 이것을 ‘곧이 곧장 나가는 것’이라고 한다. -박재순-

 

 

 

 

 

학교의 폭력과 자살, 어떻게 할까?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학교의 폭력이 심각하다. 지난 5년 동안 학교폭력을 견디다 못해 자살한 학생수만 750명이 넘는다. 학교당국과 교사들도 손을 놓고 있는 실정이다. 학생들과 교사들 사이에도 폭력 사태가 자주 일어난다. 폭력을 당한 학생은 너무 괴로워 스스로 목숨을 끊는데, 폭력을 행한 학생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가해학생들은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고 한다. 흔히 하는 일을 자기도 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폭력이 몸과 맘에 밴 것이다.

전쟁과 폭력으로 얼룩진 현대사와 폭력이 난무하는 영화, 드라마, 게임이 젊은 학생들의 생각과 삶을 폭력으로 오염시킨 것 같다. 그러나 오늘 어린 학생들이 이처럼 폭력의 늪에 깊이 빠진 진정한 까닭은 한국현대사나 폭력적인 영화와 게임에 있는 것 같지 않다. 우리 사회 자체가 폭력을 숭배하고 폭력에 의지한다. 영혼을 가진 인간이 돈에 집착하고 숭배하는 것 자체가 인간에 대한 학대고 폭력이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부당하고 불의하게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폭력이다. 그러나 부당하게 남을 괴롭히고 남을 갈취하는 것만이 폭력이 아니다. 돈과 권력을 써야 할 곳에 쓰지 않고 엉뚱한 곳에 쓰는 것도 폭력이다. 돈과 권력을 꼭 필요한 곳에 쓰지 않아서, 사람이 고통을 겪고 목숨을 잃는다면 돈과 권력을 쓰지 않은 것도 폭력이다. 그렇게 보면 학생들뿐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가 이미 폭력적인 삶에 깊이 빠져 있다. 우리사회는 폭력숭배에 빠져 폭력을 휘두르는 사회다.

이 폭력사회 폭력 학교에서 어떻게 벗어날까? 이미 기축시대의 스승들, 예수, 석가, 공자, 노자, 소크라테스가 폭력에서 벗어나는 길을 가르쳤다. 기축시대 정신의 핵심은 자연만물이나 국가권력이 아니라 사람의 내면에서 신적 생명과 영원한 가치를 발견한 것이다. 한 마디로 물질이나 권력이 아니라 정신이 고귀하고 영원하다는 것이다. 기축시대의 정신이 내놓은 윤리는 단순하다. “내가 싫은 것을 남에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 인류를 평화의 지름길로 이끄는 황금율이다. 서로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가르침과 윤리는 누구나 실행할 수 있는 쉬운 것이다.

사람은 평화를 위해 준비된 동물이다. 사람은 이빨도 뭉툭해지고 손톱발톱도 부드러워지고 눈도 맑아졌다. 신체의 변화 자체가 평화의 길로 들어선 것을 말해 준다. 이성과 감정이 발달하고 말을 하게 된 것도 사람이 평화롭게 사는 길로 진화한 것을 나타낸다. 다만 사람의 정신과 생각이 한없이 깊어지고 무한대로 확장되어서 제멋대로 전체를 휘두르고 싶은 충동도 커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에게 다른 길은 없다. 사람이 살 길은 오직 하나 평화의 길뿐이다. 마음, 생각, 삶, 행동으로 평화의 길을 익히고 배우는 것이 사람이 할 일이다.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사납고 거친 맘을 삭힐 철학과 사상을 익히는 것이다. 교사부터 학생까지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철학, 맘을 닦고 씻으며 깊이 파서 서로 돌보고 보살피는 철학과 사상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다. 일찍이 유영모는 “큰 나라 아메리카가 벌이를 잘 하고 작은 나라 덴마크가 실속을 차려도 맘 삭힐 철학(맘 삭힐 줄)이 없으면 제대로 된 나라를 이룰 수 없다.”고 했다. 아무리 경제가 발달하고 아무리 훌륭한 복지제도를 만들어도 사납고 거친 맘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면 자기를 학대하거나 남을 괴롭히는 폭력에 빠지고 만다. 거칠고 사나운 맘을 삭혀서 맑고 깊은 맘에 이르러야 한다. 맘이 맑고 깊지 못하면 바른 나라를 세우지 못하고 건전한 문명사회를 이룰 수 없다.

둘째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고 실행하는 것이다. 사람은 평화를 위해 준비된 존재요 평화의 가능성을 가진 존재다. 서로 입장을 바꾸어서 조금만 생각을 고치고 조금만 서로 이해하면 폭력에서 벗어나 평화로 갈 수 있다. 교육방법을 바꾸고 새 교육방법을 찾으면 평화의 길은 있다.

최근에 청주 동주 초등학교 5학년 담임교사 김미자 선생님은 학교 폭력을 극복하기 위해 공부모임을 하면서 노르웨이 교육에서 ‘멈춰’ 교육법을 배우고 이 방법을 자신의 학급에 적용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폭력을 행하거나 남을 괴롭히는 말이나 행동이 있을 때 학생이 ‘멈춰!’라고 소리치게 했다. 처음에는 소리를 치지 못했으나 자꾸 격려하고 노력하여 피해 학생이 큰 소리로 ‘멈춰!’라고 말하게 되었다. 이 소리가 나면 당장 전체 학급회의를 열고 토론하게 했다. 그리고 연극을 통해서 상황을 재현하게 하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역할을 바꾸어서 상황을 재연하게 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이 학급은 폭력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그래서 10개의 다른 학급들도 이 방법을 받아들여서 학교폭력을 극복하는 데 큰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한다.

서로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면 많은 문제가 풀린다. 이것이 기축시대의 성현들이 깨닫고 가르쳐준 길이 아닌가? 나를 벗어나서 남의 자리에 서 보는 것이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길이다. 사람다운 사람이 되고 사람다운 사람을 만드는 교육철학을 정립하고 평화를 실현하는 구체적인 교육방법들을 개발하면 폭력학교가 평화학교로 될 수 있을 것이다. -박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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