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히브리 사람들이 종교적으로 생각한 얼을 제대로 파악했으면 이 땅이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스 사람들이 생각한 참을 찾아서 단단히 파지(把持)했으면 인류의 꿈이 실현되었을지 모른다.
이런 것들이 부실하게 되어서 지금까지 이 꼴이 된 것 같다.
- 다석 어록 82쪽 -
< 풀이 > 히브리 종교와 그리스 철학은 서구문명의 두 기둥이다. 히브리 종교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 영혼의 구원을 추구했고 그리스 철학은 이성의 진리(로고스)를 추구했다. 참(진리)과 얼(靈)을 함께 붙잡았다면 서구문명은 인류를 정의와 평화의 세계로 이끌었을 것이다. 얼과 참을 놓친 서구문명은 물질적 탐욕과 폭력에 빠져 제국주의적 식민지 쟁탈전을 벌였고 결국 1~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세계를 큰 고통과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참을 찾고 얼을 뚜렷이 하는 일은 지금도 인류의 근본 과제다. 예수는 오직 진리와 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가르쳤다. 진리와 영으로 예배하는 예수의 종교는 예배당도 성직자도 교리도 필요 없는 종교였다. 그런데 오늘의 기독교는 예배당 종교, 성직자 종교, 교리 종교로 전락한 것 아닌가? 진리와 영은 생명과 정신의 씨알맹이다. 생명과 정신의 알맹이인 진리와 영만으로 예배하는 종교라야 인류의 꿈을 실현할 수 있다. -박재순-
대학(大學)이 큰 배움터가 되었으면
오늘 학교 교육의 근본문제는 초중등교육이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교육으로 전락한데 있다. 오늘날 교육의 동기와 목적은 대학입학을 위한 경쟁력을 높이는데 있을 뿐, 인성과 정신을 고양 시키는 교육은 사라졌다. 대학교육은 지식을 전달하는 교육에 머물고 대학은 취직을 준비하는 학원이 되고 있다. 사회는 무한 경쟁의 전쟁터가 되고 학교는 경쟁력을 높이는 훈련장이 되었다.
이대로 두면 교육을 망치고 사람을 망치고 사회를 망칠 것이 뻔한데, 경쟁사회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경쟁 교육으로 치닫고 있다. 우리 사회의 구성원 가운데 누구도 경제성장과 경쟁 교육의 굴레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교육 문제를 두고 사회의 합의를 이끌어내기 어렵다.
이 나라의 교육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근본적으로 새로운 생각을 할 필요가 있다. 대학입시 경쟁을 없애버리자. 대학이 민주적인 세계시민의 품성과 자격을 닦아내는 교육기관으로 되게 하자. 대학교는 인성을 기르고 철학과 종교와 도덕을 가르치는 진리의 전당이 되게 하자. 말 그대로 큰 배움을 얻는 대학(大學)이 되게 하자. 인생과 역사와 우주의 큰 하나 됨을 탐구하는 유니버시티(university)가 되게 하자. 대학에서 철학과 종교, 도덕과 문명을 가르치는데 대학입시를 위해 그렇게 치열한 경쟁을 벌일 이유가 없다. 대학교육이 이렇게 바뀌면 초중등교육은 저절로 교양과 인성을 중시하는 전인교육으로 바뀔 것이다.
관심과 재능이 있어서 전문적인 지식 교육을 받고 전문직에 종사하고 싶은 학생들은 대학교육을 받고 나서 전문 대학원에서 교육을 받게 하자. 전문직이 아닌 기술직이나 일반직을 원하는 학생들은 각자 선택하여 대학교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기술교육과 직업교육을 거쳐서 직장 생활을 하게 하자. 난해한 수학과 언어를 모든 학생이 다 배울 필요가 없다. 수학자나 물리학자, 인공위성 기술자가 되고 싶은 학생들에게나 어려운 수학을 가르치고 문학평론가나 철학연구자가 되고 싶은 학생에게나 어려운 어학을 가르칠 일이다. 일반 학생들은 글을 읽고 쓰고 자기 생각을 말하는 기본 훈련을 받으면 된다.
이러한 교육 개혁을 위해서는 두 가지가 요구된다. 첫째 학교교육은 국민과 시민의 권리와 의무가 되게 해야 한다. 학생에게 비싼 등록금을 내게 하여 학생을 빚쟁이로 만들면서 하는 교육이 제대로 된 교육이 될 리 없다. 고등학교까지는 의무교육이 되게 하고 대학교육은 원하는 사람이 선택할 수 있게 하자. 어떤 경우에도 학생들에게 지나친 경제적 부담을 주는 교육을 해서는 안 된다. 교육은 공적인 것이므로 나라와 지역자치단체가 교육비용을 감당해야 한다. 철학과 종교, 역사와 문명을 공부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자. 이 나라 국민이고 세계시민이라면 누구나 공부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지원하자.
둘째 전문가집단이 누리는 지나친 특권을 없애고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없애야 한다. 대학교육과 전문가교육이 특권을 얻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사회봉사와 헌신을 위한 훈련과정이 되어야 한다. 실무교육을 받고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존중하고 우대하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사람다운 사람이 존경받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학교는 사람다운 사람을 만드는 교육을 하고 사회는 사람다운 사람이 중심에서 이끌어 가야 한다. 교육의 기본은 사람이 지닌 가능성과 잠재력을 깨닫게 하고 자존감을 가지고 남을 존중하고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 참 교육은 저마다 저답게 되어 저 자신과 남을 존중하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 -박재순
2012.2.4 순례보고
씨알순례자의 소통
2011.12.8
구경각(究竟覺)길
[소감]
다석을 따라 나선 하늘원정(天遠征)길이었습니다.
과연 북악마루에 올라
몸을 활짝 펴니 하늘 원기(元氣)가 휘감기고
申身瞻撤極元氣
맘을 가다듬으니 땅의 축력(軸力)이 느껴집니다.
沈心潛透地軸力
씨알의 발걸음이
하늘을 정복합니다. 세상을 바꿉니다.
북촌마을과 인사동거리
씨알의 발걸음이 세상의 새 역사를 씁니다.
씨알 모두의
몸성히 맘놓이 바탈태움을 빕니다.
언제나 하늘 뜻이 씨알과 함께 하기를...
[보고]
-16~7도 추위가 물러가고 청명하고 화창한 날씨로 더 없이 좋은 순례행사를 가졌습니다.
13명 참가하였고 음식나눔 11명이었습니다.
< 잘 사는 법: 알뜰하고 잘게 살아야 >
씨알은 속알이 들어야 씨알입니다.
정말 속알이 차도록 들면 대적에게 먹혀도 걱정이 없습니다.
속알은 죽음을 이기는 생명입니다.
대자연을 스승과 벗으로 삼는 여러분은 뱃속을 통과해 나온 거름에서 수박·참외가 나는 사실을 잘 아실 것입니다.
다만 겨자씨같이 잘더라도 속알이 들어야 하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큰 고깃덩이가 되지 말고 잘더라도 알이 들어야 합니다.
사실 잘게 사는 것이 잘 사는 일입니다.
큰 것을 숭배하는 이 육식동물의 세상에서 잘게 살지 않고는 속알을 야무지게 채울 수가 없습니다.
잘고 잘아서 그 살인귀들의 모진 이빨 새로 빠져나가고
영글고 영글어서 그 독한 창자의 즙 속에서도 녹지 않고 나와서
뜯어먹고 짓밟아 다 거칠어진 동산에 다시 푸른 낙원을 일으키는 것이 바로 씨알의 덕입니다.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 전집8. 13~4쪽 -
< 풀이 > 쭉정이 낟알에는 생명이 없다. 알뜰하고 아무지게 속알 든 씨알에는 무궁한 생명력이 있다. 속알 들어 성숙한 사람은 어떤 역경을 만나거나 대적에게 먹혀도 죽지 않는다. 마치 속알 든 씨앗이 짐승들에게 먹혀서 위장과 대장을 거치면서도 살아남아 푸른 들을 만드는 것과 같다. 속알은 죽음을 이기는 생명이라 평화로운 생명세계를 이루고 만다. 씨알이 고통스러운 역경과 가혹한 대적을 이기고 정의와 평화의 생명세상을 이루려면 잘게 살아야 한다. 욕심과 허영에 들뜬 맘으로 크게 살다 보면 생명을 지키기 어렵고 생명세상을 이룰 수 없다. 권력과 부에 대한 욕망과 집착을 버려야 자유와 평등의 세상이 오지 않겠는가? 작은 것에 충실하고 만족하며 잘게 살아야 생명에 충실하게 살 수 있고 이기는 삶을 살 수 있다. -박재순-
학생인권과 체벌금지
학생인권과 체벌금지 문제를 두고 교육계에서 논란을 벌이고 있다. 학교교육의 주체는 학생과 교사다. 참 교육의 전제는 학생과 교사가 존중받으며 자유롭고 떳떳해야 한다는 것이다. 참 교육을 위해 체벌을 금지하고 학생인권을 확립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학교교육의 일차적인 주체와 목적은 학생이기 때문에 학생의 인권과 자존감을 세우는데서 문제를 풀어가는 것도 백번 옳은 일이다. 참 교육의 시작과 끝은 학생에게 있기 때문이다. 학생이 있기 때문에 교사도 있고 학교도 있다. 학생의 인격과 지성이 자라지 못한다면 교사가 아무리 노력해도 쓸 데 없다.
문제는 학교에 질서가 없고 교권이 확립되어 있지 못한 상태에서 학생들의 권리와 자유만을 내세우면 교사와 학교가 학생들을 교육적으로 지도하기 어렵다는데 있다. 교권이 확립되지 못했고 학교가 학생들을 자유롭게 인격적으로 교육할 능력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 않아도 학생들이 다른 학생들뿐 아니라 교사들에게도 폭력을 휘두르는 상황이니까 체벌금지와 학생인권조례가 당혹스럽게 느껴지는 교사들과 학교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체벌을 하고 학생인권조례를 거부하는 것은 교육문제의 해결을 포기하거나 체념하는 것이다. 학교에서 가장 약하고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학생들에게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 체벌을 금지하고 학생인권을 선언한 다음에 거기에 맞추어 교사와 학교가 자기 개혁을 서둘러야 한다. 학생인권을 확립한 다음에 교사의 교권을 선언하고 확립해야 한다.
학생들이 폭력과 자살로 죽어 가는데, 학생인권은 제처 놓고 교권을 먼저 확립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염치가 없는 일이다. 교권을 먼저 확립하고 다음에 학생인권을 확립한다는 것은 문제를 거꾸로 푸는 것이며 그렇게 해서는 결코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 지금 당장 아무리 학생들이 거칠고 못 돼 보여도 학생들의 인권을 선언하고 확립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 다음에 교권을 선언하고 확립해야 한다. 학생인권과 교권에 맞추어 학교당국 교육부 당국 사회학부모들이 참 교육 실천을 위해 자기 개혁을 해나가야 한다.
어린 생명을 살리고 존중하는 데서부터 교육문제를 풀어야 한다. 학생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데서부터 참 교육은 시작되어야 한다. 교사와 학교의 형편과 처지가 어렵다고 체벌금지와 학생인권을 거부하는 것은 작은 침대에 맞추어 사람의 몸을 자르는 것과 같다. 당연히 학교와 교사가 바뀌어야 한다. 학교와 교사가 좀 더 높은 도덕과 정신을 가지고 진지하게 자기 개혁을 하면 학생들도 제 자리를 찾고 참 교육이 시작될 것이다.-박재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