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Spirit/e—cr—life

선(善)의 씨

by e-bluespirit 2012. 3. 4.

 

 

 

 

 

 

 

 

 

 

 

 

< 선(善)의 씨 >

우리 속에는
선(善)의 씨가 살아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받은 것이요,
우리 조상들의 마음 밭을 거쳐서
그 특징이 생긴 것입니다.

그것이 있어서
우리가 있고 우리나라가 있습니다.

그것은 몇 해, 몇 십 년의 나쁜 정치로
결코 없어질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낙심하거나 겁을 집어먹어서는 아니 됩니다.

그 씨 속에는
거의 무한대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떻게 시들었다가도
비만 오면

곧 파랗게 살아나는 이끼 모양으로
씨알의 마음은 죽지 않는 것입니다.


-“같이 살기 운동의 알파 오메가”,
72년 8월 씨알의 소리. 52쪽 8권 -

 

 

< 풀이 >
생명을 살리고 키우려면 어질고 의로운 착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생명을 살리고 키워온 오랜 생명진화의 역사에서 어질고 의로운 착한 마음이 길러졌다. 그래서 사람은 저마다 속에 선의 씨를 품고 있다. 특히 한국인들은 자연과 어우러진 마을공동체에서 고난을 이겨내며 살아오는 동안 착한 마음을 길러왔다. 한국 사람처럼 정이 많고 서로 통하는 것을 좋아하는 민족도 드물 것이다. 착한 마음이 한국인의 의식 밑바닥에서 깊은 지하수처럼 흐르고 있다. 바쁘고 각박한 현실의 생활에서 잊고 지내다가도 어려움을 당할 때면 한국인의 착한 마음이 놀랍게 모습을 드러난다. 5천년 민족사를 통해 우리의 마음 밭에 심어온 선의 씨앗이 싹트고 자라서 활짝 꽃 피고 열매 맺는 때가 올 것이다. -박재순

 

 

 

< 영생 >

예수교 신앙에는 영생하겠다는 입지(立志)가 들어 있다.

신앙이 영원한 생명(얼나)으로 영생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런 길이 있으면 꽉 붙잡고 끝까지 가봐야 한다.

적어도 영생하겠다고 염원하는 것만이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이것을 다른 사람이 업신여기더라도 나는 해야 한다.
내가 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내 대신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다른 말이 아니다.
얼나로 솟나 영생하도록 하나님만 생각하라는 것이다.

얼나를 깨달아 영생의 길을 한 번 붙잡으면
죽어도 놓지 않겠다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것이다.

- 다석 어록 82쪽 -

 

 

< 풀이 >
기독교 경전인 신약성경에는 영생이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넘어서 영원한 생명에 이르려는 염원과 확신이 기독교 신앙에 담겨 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이 부활에 대한 교리 신앙으로 머물면 죽은 신앙이 되고 만다. 교리는 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믿는 사람의 몸과 맘속에 영원한 생명이 살아 있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살아 있던 영원한 생명이 오늘 내 속에도 살아 있어야 한다. 영원한 생명이 살아 있게 하는 것은 하나님과 영으로 소통하고 연락하는 것이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하나님만 생각하여 하나님과의 소통과 연락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얼 나’로 솟아나서 영생하는 것이다. 내 속에서 얼 나를 깨달아 나와 너와 그가 함께 길이 사는 길로 가야 한다. -박재순-

 

 

 

 

 

학교 폭력의 책임, 학부모인가, 교사인가?

 

최근에 경찰이 학교 폭력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았다고 현직 교사를 직무유기죄로 입건하고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학교 폭력의 책임 문제를 놓고 안타깝고 딱한 논쟁이 벌어진다. 교사단체의 대표는 “경우에 따라 학생 폭력에 대해 학부모에게 사법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학부모 대표는 “아이들의 교육을 학교 교사들에게 맡겼으니, 학교 폭력을 방지하고 인성교육을 제대로 시킬 책임이 교사에게 있다.”고 주장한다. 교사 단체의 대표는 교사에게 사법적 수사권과 처벌권을 달라고 요구하기도 한다.

학교 폭력의 책임은 누가 져야 할까? 폭력을 휘두른 학생 자신이 일차적 책임을 져야 할 것 같다. 그러나 미성년자들인 학생은 몸과 마음이 아직 여물지 않아서 학생에게 책임을 다 물을 수도 없다. 가정에서 학생교육을 제대로 못 시킨 학부모가 학교 폭력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교육을 책임진 교사가 학교 폭력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도 잘못된 말이 아니다. 다 책임이 있는 것 같은데 누구에게 책임을 지우기가 마땅치 않다.

폭력을 휘두르는 미성년 학생은 본성이 폭력적인가 아니면 사회의 폭력적 가치관과 행태에 물든 것인가? 폭력이란 물질이 정신을 지배하는 것이고 물질에 대한 탐욕과 집착에 휘둘려 행동하는 것이다. 정신은 스스로 하는 것이고 자발적인 것이다. 물질은 타율적이고 법칙적인 것이다. 스스로 하는 자발적인 정신이 타율적이고 법칙적인 물질을 이성과 영성에 따라 움직이고 이끄는 것이 자연스럽고 마땅한 것이다. 타율적이고 법칙적인 물질이 자발적인 정신을 지배하는 것이 폭력이다.

물질에 대한 탐욕과 집착에 휘둘리는 것이 탐욕과 사나운 감정과 어리석은 편견으로 나타난다. 사람 속에 깊이 박힌 탐욕과 사나운 분노와 어리석은 편견이 폭력의 뿌리다. 사나운 탐욕과 감정과 편견은 사회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사회뿐 아니라 수 천 년, 수 백 만년 인류 역사 속에 그리고 수 십 억 년 생명진화의 역사 속에 뿌리 박혀 있다. 폭력의 뿌리가 이렇게 깊다. 폭력의 뿌리는 쉽게 뽑히지 않는다.

사람에게 탐욕과 사나운 감정과 편견의 뿌리만 이렇게 깊이 박혀 있다면 인간은 절망적인 존재요, 학교 교육은 허망한 노력이 될 것이다. 그러나 생명 속에 사람의 마음 속에는 그것보다 더 깊고 오랜 사랑과 평화의 의지와 본성이 박혀 있다. 생명의 본성은 사랑과 정의다. 사랑 속에서 생명은 기쁘고 자라며, 정의 속에서 힘차게 뻗어나간다. 생명은 상생평화의 길을 걸어서 상생평화의 삶에로 진화해왔다. 사람의 손톱, 발톱이 부드럽고 연약하게 된 것이나 이빨이 뭉툭해진 것은 평화로운 삶에로 진화한 것을 말해 준다. 말하고 생각함으로써 서로 소통하고 협력하여 사회생활과 문명을 이룩한 것은 사람이 평화로운 존재임을 보여준다. 사람의 이성과 영성은 사람이 평화로운 존재요 고귀한 정신과 영혼을 지닌 존재임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사람은 정신교육과 철학교육이 필요하다. 제대로 교육하면 폭력에서 벗어나 상생평화의 삶을 살 수 있다. 생명진화와 인류역사 자체가 폭력적인 탐욕과 감정과 편견을 벗고 평화로운 정신과 삶에 이르는 인류의 자기 교육과정이다. 인류의 평화교육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절망적인 것은 결코 아니다. 생명진화와 인류역사는 교육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것임을 말해준다. 다만 평화교육은 자기에게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폭력의 가장 깊은 뿌리는 사람의 속에 있다. 그러므로 먼저 제 속에서 폭력의 뿌리를 뽑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학교 폭력의 책임은 ‘나’에게 있다고 선언하는 일에서부터 학교 폭력의 뿌리를 뽑는 일이 시작되어야 한다. -박재순

 

 

 

 

 

 

< 민이 스스로 한 것만이 참이다 >

우리가 스스로 하지 않은 것은
설혹 하늘에서 왔다 해도 참이 아닙니다.

민중의 손으로 된 것 아니고
누가 가져다 씌우는 통일이면 통일이 아닙니다.

민중 자신밖에 자신을 대신할 놈이 천지간에 없으니,

또 민(民)의 민 됨이 자유함에 있으니
스스로 민의 손으로 아니한 것이면
해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사실은 시대는 늘 민중이 먼저 아는 법입니다.
민심-천심 사이에 직통 전화가 있습니다.


- 51쪽 전집8 72. 6·7호 “위선하는 국민”-

 

 

< 풀이 >
하늘과 땅 사이에 아무도 민중을 대신할 수 없다. 민주(民主), 민이 주체다. 민은 자유로운 존재요 스스로 하는 주체다.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하는 것만이 역사를 새롭게 짓고 사회를 변화시킨다. 그래서 석가는 오직 스스로 깨달으라고 했고 예수는 다만 십자가에 달렸을 뿐이다. 민을 위해 구원의 길을 열었던 예수와 석가가 민을 대신해서 한 일이 무엇인가? 민이 구원받는 유일한 길은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사는 것밖에 없다. 민이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살도록 하기 위해 안창호, 이승훈은 겸허하게 정성을 다해 민을 섬김으로써 민을 깨워 일으켰다. -박재순

 

 

 

 

학교 폭력의 뿌리

 

정부와 경찰이 학교 폭력의 뿌리를 뽑으려고 달려들었는데 쉽게 뽑힐 것 같지 않다. 학교 폭력의 뿌리는 고구마 줄기처럼 한없이 뻗어 있는 것 같다. 폭력을 휘두르는 학생들이 학교당국이나 사법당국의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교사들은 학교 폭력 문제를 맡아서 처리하는 데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교사들이 학급 담임 맡기를 꺼린다고 한다. 폭력을 휘두르는 학생들은 거리낌이 없고, 그 학생들을 선도할 교사들은 두려워하고 거리낀다니 학교교육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학교 폭력은 단순히 학교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문제이고 이 시대 문명의 문제다. 학교 폭력의 뿌리는 사회 속에, 문명 속에 깊이 박혀 있다. 우리 사회와 문명의 폭력이 학교에서 연약한 학생들의 몸과 맘으로 표현된 것뿐이다. 우리의 폭력적인 생활양식과 폭력적인 사고방식이 바뀌기 전에는 학교 폭력의 뿌리는 뽑히지 않을 것 같다.

폭력이란 무엇인가? 물질이 정신을 지배하고 강제하는 것이다. 생명과 정신은 내적 힘으로 움직이는 것이므로, 주체적이고 자율적이다. 물질과 기계는 외적 힘으로 움직이는 것이므로, 법칙적이고 타율적이다.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생명과 정신이 타율적이고 법칙적인 물질과 기계를 움직이고 이끄는 것이 자연스럽고 평화로운 것이다. 거꾸로 물질과 기계가 생명과 정신을 강요하고 지배하는 것은 억압적이고 폭력적이다. 정신 위에 물질을 놓고 정신보다 물질을 존중하는 것 자체가 폭력이다. 사람보다 돈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이미 사람을 모독한 것이요, 정신보다 권력을 존중하는 것은 이미 정신을 짓밟고 정신에게 폭력을 휘두른 것이다.

맘씨보다 외모를 존중하고 정신보다 돈을 소중히 여기는 사회는 폭력이 지배하고 폭력이 움직이는 사회다. 우리 사회가 이런 폭력으로 가득 찼다면 아무도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사회의 폭력은 가장 먼저 가정공동체를 깨트린다. 사람보다 돈이 중하고 맘씨보다 사회의 위신과 지위가 존중되는 사회에서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의 가정이 어떻게 지탱될 수 있겠는가? 가정과 사회에서 상처받고 모독당한 아이들이 학교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당연하다. 돈과 외모와 권력이 가장 강하고 힘 있는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폭력을 휘두르는 셈이다. 그런 확신을 담은 말이나 생각이나 감정이나 행실은 모두 폭력이다. 그런 폭력에 오염된 아이들이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당연하다.

돈과 외모와 권력(사회적 위신)보다 소중하고 가치 있는 생명과 정신이 사람에게 있다는 것을 학교에서 누가 가르치고 있는가? 학생들 속에 영원한 생명과 고귀한 정신이 있다는 것을 형식적인 빈말로가 아니라 진심으로 맘에 와 닿게 가르치는 사람이 학교에 있어야 한다. 교사들 자신이 생명의 신성함과 정신의 존귀함에 대한 신념을 가져야 하고 상생평화의 철학을 몸과 맘에 익혀야 한다. 학교에 생명과 평화의 철학이 없으면 학교폭력의 뿌리를 자를 수 없다. -박재순-

 

 

 

 

 

 

 

 

나꼼수와 여성의 성적 대상화

 

막말을 곁들이며 걸쭉하게 정치풍자와 비판을 하고 비리를 까발리는 ‘나꼼수’가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나꼼수의 일원인 정봉주 17대 국회의원이 감옥에 갇히자 한 젊은 여성이 비키니를 입고 가슴에 “가슴이 터지도록, 나와라 정봉주”란 문구를 써 놓은 사진을 올렸다. 나꼼수에 출연하는 사람들은 이 사진에 대해 성적인 언급을 하면서 격려했다. 여성인권단체와 일부 여성들은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 했다고 비난하고 나섰다.

나는 나꼼수의 도덕성 문제나 성희롱 논란에 끼어들고 싶지 않다. 나꼼수는 막말과 욕설의 자유를 맘껏 누리는 자유로운 방송이니까 도덕적인 시비를 하거나 품위를 따지는 것은 온당치 않아 보인다. 다만 나꼼수의 일원인 김어준이 한 말이 문제로 느껴져서 나도 말을 섞게 되었다.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했다는 비판에 대해서 김어준은 "인간이 자신 외 인간을 대상화하지 않는 경우도 있나."라고 당당하게 되묻고 있다.

김어준의 당당함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의 당당함이 인문학적 무지에서 나온 것이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의 말대로 사람은 자연적 욕망을 품고서 사람을 보고 만나고 관계한다. 그러나 사람은 욕망을 가진 존재이면서 이성과 영성을 가진 존재다. 철학이나 종교는 자연적 욕망을 넘어서 사람이나 사물을 보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칸트가 사람을 수단으로 대하지 말고 오직 목적으로 대하라고 한 것은 다른 사람을 대상으로 보지 말고 주체로 보라는 말이다. 선불교에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고 한 것도 산이나 물을 대상화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라는 것이다. 상대를 주체로서 있는 그대로 보자는 것이 모든 철학과 종교의 목적이다. 사람이 자연적 욕망을 넘어서는 차원을 갖지 못하면 사람다운 공동체를 이루며 살 수 없다. 자연적 욕망을 넘어서는 일이 어려운 일이지만 어려운 일을 하려고 애쓰는데서 사람은 사람답게 되는 것이다.

김어준의 당당함은 자신뿐 아니라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타인을 대상화할 뿐이라는 확신에서 나온 것으로 여겨진다. 김어준의 당당함이 사회적 근거를 가졌다고 여겼기 때문에 나는 섬뜩함을 느꼈다. 뼛속깊이 산업자본주의에 물든 우리사회는 자연적, 사회적 욕망을 가지고 모든 것을 소비의 대상으로 생각한다. 문화도 종교도 철학도 다 소비의 대상일 뿐이다. 욕망과 허영에 따라 자신의 취미와 욕구에 따라 책을 읽고 강의를 듣고 교회를 다닌다. 지식도 사상도 진리도 자신의 취미와 욕구에 따라 소비되는 것 아닌가?

너를 너로서 보지 못하는 사회는 참된 사귐을 모르는 사회요 참된 사귐이 없는 사회는 불행하다. 산을 산으로 보지 못하고 꽃을 꽃으로 보지 못하는 사회는 시가 없는 사회요 시가 없는 사회는 삭막하다. 나는 나답게 너는 너답게 살려고 애쓰는데서 사람은 사람 구실을 하게 된다. 모든 인간이 자기 이외의 사람을 대상화할 뿐 주체로 인식하고 주체로 대접할 수 없는 사회는 평면적이고 일차원적 삶에 빠져서 결국 해체되고 몰락할 것이다. 나는 김어준이 당당함을 잃었으면 좋겠다. -박재순

 

 

 

 

 

 

 

 

 

 

북악성벽 따라...

사적 10호인 한양도성(서울성곽)의 길이는 18.8Km 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추진되고 있다. 2월4일 우리의 순례길은 창의문에서 시작하여 숙정문에 이르는 한양도성의 산악성벽을 걷고 삼청공원으로 내려와 북촌한옥마을을 지나 다석이 30년 넘게 연경반을 지도했던 종로YMCA 까지였다. 창의문에서 시작하여 가파른 계단에서 30분 땀을 흠뻑 흘리고 나면 북악마루(백악마루)에 도달하게 된다. 이곳에서 다석은 1943년 2월5일 금요일 음력설날 아침에 究竟覺을 얻었다. 과연 하늘의 원기(元氣)와 땅의 축력(軸力)이 느껴지는 곳이다. 창의문은 한양도성의 북소문이며 숙정문은 북대문이다.

 

 

 

2012.3.3 순례안내

씨알순례자의 소통

2011.12.8

함석헌

[안내]

------

인생은 찾아가는 것이다.

보고 듣고 맡고 먹고 부딪치고
생각하고 하는 모든 것이다.

오직 찾는 일이요,
가는 일이다.


함석헌의 글 “진리에의 향수”에서


삼월의 씨순길
함석헌 자택지를 찾아 갑니다.

선생이 사시던 자택지에는
지금 조그만 표지석도 없이
낮선 다세대 주택 한채 앉아 있습니다.

" 삶은 살아감에 있고
참은 찾아감에 있다 "

선생이 살아가신 삶의 궤적을 더듬으며
선생이 찾아가신 참의 향기를 맡으려고

우리 순례자는
삼월의 함석헌길을 걸어 갑니다.


[진행]

-------

3월3일(토)

집합 : 10시 당산역 6~7출구

10:00 당산역 출발
11:00 양화진(망원지구)
12:00 원효로길 나들목
12:20 함석헌 자택지
13:00 용문해장국(☎712-6290)
13:40 효창공원역(음식나눔 후)

알림

-----

다음 4월의 씨순길
4.19길을 검토 중입니다.
의견 부탁드립니다.

4.19 길,
정릉 명상길에서 시작하여
419국립묘지 까지 약 6Km

4.19혁명은 씨알혁명입니다.

한때 의거, 학생운동 등
미완의 혁명으로 그 의미가
축소되기도 했지만

폭력적 탄압의 독재에 항거하여
반만년 역사상 처음으로 성공한
씨알에 의한 씨알의 혁명입니다.

올해 4.19혁명 52주년이 됩니다.
씨알영웅들이 잠든 4.19국립묘지
진혼위령의 기도를 바치러 갑니다.

우리 순례자
그곳 4.19국립묘지에

 

 

 

 

 

 

 

 

 

 

 

www.crlife.org

'Spirit > e—cr—life'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음의 심지가 꼿꼿하고  (0) 2012.03.26
성불 成佛  (0) 2012.03.12
참과 얼  (0) 2012.02.12
양생법 養生法  (0) 2012.02.04
하늘을 향해 곧게 나가는 사람  (0) 2012.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