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순길 "강화도길" 보고> 『 3월2일 약간 쌀쌀하나 쾌청한 날씨. 예정된 시간계획에 따라 진행. 예상하지 못한 뜨거운 호응. 많은 회원이 참석하여 강화터미널 가는 텅 비었던 광역버스가 우리 도반들로 거의 만차 』 매월 첫째 토요일 씨순길을 나설 때마다 가슴이 설렙니다. 소중한 분을 만나러 가기 때문입니다. 나의 가장 소중한 분은 바로 내 안에 계시는 하느님, 참나입니다. 나는 오늘 그 분을, 나 자신을 만나러 순례길을 나섰습니다. 강화터미널에서 심도학사까지 걸어서 10Km의 순례길, 또 그 곳에서 고려저수지 버스정거장 까지 2.5Km, 강화나들길 제5코스 20.2Km의 절반 넘게 걸은 셈입니다. "얼줄, 강화의 역사" 강화도는 우리의 역사가 첩첩히 지층을 이루어 쌓여 있는 곳입니다. 가깝게 구한말 병인양요(1866 프랑스), 신미양요(1871 미국), 운양호사건(1875 일본)과 다음해 강화도조약이 있었습니다. 조선 때, 연산군과 광해군이 유배되기도 했던 강화도는 효종과 숙종 때 강화도를 요새화하여 해안선 전역에 지금의 돈대를 설치하였으며 프랑스군에게 약탈되었던 외규장각이 설치된 것은 정조 때입니다. 한국 양명학의 태두라 할 수 있는 하곡 정제두의 강화도 은거는 1709년 숙종 35년 때입니다. 그의 강화학파 학풍은 200년간 이어지며 구한말과 일제시대 민족사상가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강화도라는 지명은 고려시대 부터입니다. 강화도는 심주(沁洲), 심도라고도 불렸으며 삼국시대에는 혈구라 하였습니다. 항몽(抗蒙) 기간 동안 팔만대장경이 여기서 만들어 졌으며 고려의 왕궁터와 성곽이 남아 있습니다. 삼국시대 관미성이 있던 곳으로 삼한의 패권에 따라 관할권이 백제 고구려 신라로 바뀌었습니다. 강화도에는 많은 고인돌이 북방식과 남방식으로 혼재하여 서 있습니다. 우리가 탐방한 오상리고인돌군은 북방식입니다. 고인돌 뿐 아니라 강화도에서는 빗살무늬토기 등 많은 신석기시대 유물이 발굴되고 있습니다. 마니산에는 상고시대 단군이 쌓은 제천(祭天) 하던 참성단(塹星壇)이 있습니다. 고려 원종 11년(1270) 조선 인조 17년(1639) 숙종 26년(1700)에 고쳐 쌓았다고 합니다. 마니산과 관련있는 재미나는 설화로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옛날 나무꾼 셋이 나무하러 마니산에 올랐습니다. 중턱 숲속에서 범상치 않은 노인들이 바둑을 두고 있는데 재미있어 넋을 놓고 구경을 하였습니다. 노인들이 주는 술 까지 얻어 마시며 구경을 하다가 날이 저물어 집으로 돌아가려고 옆에 놓아 둔 도끼를 찾으니 도끼자루가 썩어 흔적조차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이상히 여기며 마을로 내려오니300년의 세월이 훌쩍 지났다는 이야기입니다. 강화성과 국화저수지를 지나 고려산 산길로 접어 들자 제법 등산하는 기분이 듭니다. 얼만큼 산속을 지나다 보니 크지도 않은 당나무에 붉은 치마가 걸려 있습니다. 이런 당나무 풍습은 우리만의 풍속이 아닙니다. 몽고나 히말라야 고산지대를 여행하다 보면 비슷한 풍경을 자주 만납니다. 일찍이 육당 최남선이 '불함문화론’을 통해 우리 민족의 시원지로 비이칼호수를 지칭하였는데 이런 풍속을 추적하다보면 그곳에 까지 이르게 됩니다. "순례란 絶學損書 하는 것이다" 귀로에 어느 도반과 나눈 이야기입니다. 장자 외편에 공자가 어슬렁거리며 돌아가 학문을 끊고 책을 버리니 제자들이 그 앞에서 더 이상 절을 하지 않았으나 그들간의 사랑은 더욱 두텁게 되었다고 합니다. 徐行翔佯 而歸 絶學損書 弟子 無揖於前 其愛益加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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