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irit/e—cr—life
너는 세상의 빛이라
by e-bluespirit
2013. 6. 16.
너는 세상의 빛이라
너는 세상의 빛이라
스스로 타서 세상의 어둠을 밝힌다
어두울수록 빛나는 등불
너는 생명의 빛이라
속에서 타오르는 혼의 불빛
죽음 앞에서 더욱 빛나는 생명의 등불
빛은 저를 태워서 남을 비추고
저를 태워서 하늘을 밝힌다
제 빛을 제게 비추는 것은
등불 위에 됫박을 덮어놓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
등불은 꺼지고 빛은 어둠 속에 갇히네
저를 어둠 속에 버려 두고
제 빛을 님에게 비추면
온 세상이 밝아오네
너를 허공에 버리면서도
너는 속에 무지개 빛 일곱 색깔을 안고 간다
너는 말씀으로 속에서 타오르는 영혼의 불빛
빛은 아름답고 깨끗하네
밝고 따뜻하네
-박재순, ‘삶의 씨앗’ 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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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을 머리에 이고 땅을 발밑에 깔고 >
이용이니 소용이니 하는 생각 없이 사는 것이 정말 사는 것이다. 아무런 욕심 없이 산꼭대기에 앉아 있는 것이 좋지 않은가. 하늘을 머리에 이고 땅을 발밑에 깔고 앉아 있는 것이 좋지 않은가.
(씨알의 메아리 다석 어록. 1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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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풀이 > 자연은 그 자체로서 아름답고 생명은 그 자체로서 존귀하다. 정신은 그 자체로서 자유롭다. 이용이니 소용이니 하는 것은 껍데기와 거죽의 필요에서 하는 소리다. 소유와 권리도 삶의 껍데기에서 나오는 소리다. 생명이나 정신의 알맹이는 물질이 아니다. 물질이 아니면 써 먹을 것도 없고 서로 다툴 것도 없다. 하늘과 땅과 사람의 하나 됨 속에서 생명과 정신의 알맹이를 추구한 다석은 빈탕한데서 놀자고 했고 판자촌에서 빈민들과 함께 더불어 살았던 의인 제정구는 가짐 없는 큰 자유를 말했다.
이용할 생각이 없어야 우정이 깊어지고 써 먹을 생각이 없어야 믿음과 도가 깊어진다. 도인은 아무 욕심 없이 산꼭대기에 앉아 있기를 좋아한다. 하늘을 머리에 이고 땅을 발밑에 깔고 앉아 있으면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로 되고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 길이 열릴 것이다. -박재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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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지금 내 삶을 지탱하고 움직이는 것은 숨이다. '나'를 나타내는 한자 '自'는 '코'의 모양을 그린 글자라 한다. 지금 살아 있는 '나'는 '코 숨'에 달려 있다. 생명은 목숨이다. 이 연약한 숨결이 끊어지면 내 생명의 불길도 꺼진다. 내가 쉬는 이 숨결을 타고 내가 산다. 이 숨결이 내 몸과 마음을 태우는 날개요 하늘바람이다.
몸과 맘이 건강하고 편안하려면 숨을 깊고 고르게 쉬어야 한다. 스트레스를 받아 억눌리거나 병들어 몸이 불편하면 숨이 얕아지고 거칠어진다. 몸과 맘이 짓눌리면 숨도 막힌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쉬어서 몸과 맘을 풀어준다. 숨을 기식(氣息)이라 하고 쉼을 안식(安息) 또는 휴식(休息)이라 한다. 식(息)이란 말로 숨과 쉼을 함께 나타낸다. 息은 自와 心이란 글자로 이루어졌는데 '제 마음'으로 풀 수도 있고 '코와 염통'으로 풀 수도 있다. 코와 허파로 숨쉬고 염통으로 묵은 피와 깨끗한 피를 온 몸에 돌리는데 숨과 피돌기가 잘 되어야 내 몸과 마음과 영혼이 건강하고 편안하다.
숨과 영혼은 하나다. 많은 언어들에서 숨과 영혼을 같은 말로 나타낸다. 히브리어 루아흐, 그리이스어 프뉴마, 프쉬케, 라틴어 스피리투스, 인도어 아트만은 숨(바람)과 영혼을 함께 나타낸다. 숨을 깊고 고르게 쉬면 영혼이 산다. 영혼이 살아 있는 사람은 숨을 깊고 고르게 쉰다. 숨쉼이 영혼의 쉼이다.
숨은 내가 인위적으로 쉬는 게 아니다. 태초부터, 생명체가 창조되던 그 때부터 수 억 만년 이어 이어 내려 온 숨이다. 내가 숨을 쉰다기보다 숨이 나를 살린다. 숨을 쉬다 보면 숨이 내 것이 아니라 이 우주와 대자연의 생명 속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총과 능력에 의존한 것임을 절감한다. 삶은 숨에 달렸고 숨은 하나님의 은총과 능력에 달렸다. 먹고 입고 자고 아이를 낳고 기르는 살림을 잘 하려면 머리와 손과 발을 부지런히 놀려야 하지만, 숨으로 지탱되는 삶을 잘 살려면 삶의 근원인 하나님을 믿고 가까이 모셔야 한다. 내 목-숨에 하나님의 숨을 향한 그리움이 숨어 있다.
-박재순, ‘삶의 씨앗’ 149~1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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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이 하지 않은 것은 민에게 해가 된다 >
우리가 스스로 하지 않은 것은 설혹 하늘에서 왔다 해도 참이 아닙니다. 민중의 손으로 된 것 아니고 누가 가져다 씌우는 통일이면 통일이 아닙니다. 민중 자신밖에 자신을 대신할 놈이 천지간에 없으니, 또 민(民)의 민 됨이 자유함에 있으니 스스로 민의 손으로 아니한 것이면 해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사실은 시대는 늘 민중이 먼저 아는 법입니다. 민심-천심 사이에 직통 전화가 있습니다.
“위선하는 국민” 함석헌 전집 8권 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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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풀이 > 나라와 역사의 주인과 주체는 민중이다. 나라와 역사를 참으로 발전시키는 일은 나라와 역사의 주인과 주체인 민중이 하는 일이다. 주인과 주체인 민중이 하지 않은 것은 나라와 역사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 하늘이 하는 일도 민중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민중을 거치지 않고 나라를 발전시키고 역사를 진전시키는 일은 없다.
나라와 역사가 바르게 된다는 것은 그 주인과 주체인 민중이 주인과 주체의 구실을 제대로 한다는 것을 뜻한다. 나라와 역사의 목적은 민중의 자치에 있다. 아무리 위대한 성인과 현자라도, 뛰어난 영웅과 천재라도 민중의 삶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는 민중을 깨워 나라와 역사의 주인노릇을 하게 할 수 없다. 민중은 하늘과 직통한다. 민중은 마음 속에 하늘을 품고 하늘과 사귀는 씨알이다. -박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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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신학자의 옛날 이야기 : 전쟁과 평화" | | 강사 : 서광선 명예교수(이화여대) 일시 : 2013년 6월20일 목요일 시간 : 오후 7시30분 대상 : 누구나 장소 : 한살림연합 교육장 (서울시 중구 장충단로 200번지 5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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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선 교수는? | | 1931년 평북 강계 출생. 미국 로키마운틴대학과 일리노이주립대학교에서 철학, 뉴욕 유니온신학대학원과 밴더빌트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64∼96년 이화여대 인문과학대학 기독교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1970년대 초반 안병무, 서남동과 함께 민중 신학 운동에 앞장섰다. 80년 해직된 뒤 목사 안수를 받고 현대교회를 잠시 시무했다. 94∼98년 세계YMCA 회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대동강 건너, 요단강 넘어’ ‘기독교 신앙과 신학의 반성’ ‘종교와 인간’ 등이 있다. 현재 재단법인 씨알의 고문이며, 이화여대와 홍콩 중문대학 명예교수로 활동 중이다.
이번 강연과 대화의 시간에 이 시대의 원로이신 서광선 교수님은일제 강점기 항일 목사 집에서 자란 경험에서 6·25 전쟁 세대 할아버지의 한 사람으로 "한국 할아버지 옛날 이야기: 전쟁과 평화 이야기"를 나누려 한다. "우리의 위험한 주억들", 지난 한 세기동안의 우리 민족의 전쟁과 억압의 고난의 역사 속에서 평화와 통일을 희망하는 우리의 간절한 염원을 나누는 시간을 기대한다.
“전쟁. 그의 생애는 온통 전쟁의 연속이었다. 일제치하 만주에서, 한국전쟁 당시에 그가 본 것은 폭력과 죽음이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그 잔인한 시절에 빼앗겼다. 선생은 평안북도 강계에서 태어났다. 하늘 푸르고 맑던 그곳에서 비만 그치면 영롱하게 떠오르던 무지개를 보며 ‘소년’ 서광선은 꿈을 꾸었다.
‘이 작고 답답한 시골을 떠나야지. 가난하고 힘든 촌구석을 벗어나 저 무지개를 좇아 도회지로 갈 거야.’ 그럴 만도 했다. 가난한 목사였던 아버지는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한 까닭에 교회에서 쫓겨나 여기저기 떠돌며 장사를, 개척교회를 하며 고생하셨다. 그 와중에 어머니는 영양실조에 폐병까지 걸렸고, 선생이 겨우 열세 살이던 해에 돌아가셨다. 가난이 싫었고 고집스런 아버지가 미웠다. ‘난 절대로 목사는 안 될 테야. 의사가 되어서 목회자 가족들을 평생 공짜로 고쳐주겠어.’ 소년의 꿈은 그랬다. 그것이 첫 무지개였다.
‘소년’ 서광선에게 아버지는 벗어나 자유롭고 싶은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삶의 기조를, 신앙의 뼈대를 형성해준 분이셨다. 절대 신앙을 붙들고 타협할 줄 모르던 분. 하여 일제시대에도 공산치하에서도 모진 고초를 당하셨던 분. 결국은 6·25 직후 대동강가에서 손발 묶여 총살당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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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씨순길 강서습지생태공원과 행주산성>
10:20 방화역 출발 - 10:50 강서습지 생태공원 - 11:40 행주대교 - 11:50 행주성당 - 2:45 행주산성 대첩문 - 행주산성 참관 - 13:50 대첩문 집결 - 14:10 행주내동 (점심 후 노선버스 승차)
전철역 방화역은 5호선의 종점입니다. 서울의 북서단 끝자락인 이곳은 전철이 있어 접근성은 좋으나 역시 도심에서 먼 거리입니다. 예정보다 20분 정도 늦게 출발했습니다. 이른 초여름 날씨이긴 하나 흐린 하늘 덕분에 많은 땀을 흘리지 않고 오늘 순례길을 걸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방화근린공원과 방화대교 아래를 지나 한강변 강서습지생태공원에 도착하였습니다.
강서습지생태공원은 습지와 수풀이 아름다운 한강의 풍광과 절묘하게 어우러진 곳으로 다양한 철새들의 도래지이기도 합니다. 이곳 공원에는 경계심 많은 새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류전망대와 조류독감을 방제하기 위한 시설들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이곳 주변에는 천둥오리, 흰뺨검둥오리, 흰죽지 등 수십여 종의 조류가 서식하나 더운 낮 시간이어서인지 큰 무리들이 관찰되지는 않았고 다만 커다랗고 솥뚜껑같은 자라 한 마리가 이곳이 살아있는 습지임을 말해 주었습니다.공원의 습지는 강우량과 서해바다의 조수간만에 따라 강물이 차 오르기도 하고 빠지기도 하는데 이날은 물이 빠져 제법 넓은 갯벌이 들어나 있었습니다.
우리가 걸은 길은 방화역과 습지생대공원 구간 3Km, 행주대교 2Km, 행주산성과 동네길 3Km의 거리입니다. 행주대교를 건너면 서울에서 명동대성당 약현성당에 이어 세 번째로 오래된 행주산성성당이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일본과 강제로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한 1905년 건립되었습니다. 조그만 어염집을 개조한 건물로 자금은 외부에 벽돌을 쌓아 확장하였으나 내부는 서가래 대들보 기둥 등 옛 것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대들보에는 당시 한글상량문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 융 희 九 년 경 슐 삼 월 팔 일 셩 요 셉 은 보 주 일 립 주 상 량 ”
행주산성은 임진왜란 때 왜군을 크게 물리친 행주대첩의 역사 현장입니다. 현재 성안에는 1603년 세워진 옛 대첩비와 1963년 새로 세워진 대첩비가 있으며 1970년 세워진 권율장군의 충장사가 있습니다.
행주산성의 축조는 삼국시대 초기로 추정됩니다. 성안에서는 삼국시대 토기와 기와의 조각이 발견되고 있습니다.이곳은 한강이 서해바다로 나가고 들어오는 물길의 길목으로 삼국간의 치열한 공방전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며 지금도 서울 방어에 매우 중요한 거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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