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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원효로 자택지와 절두산 양화진 >
출발 : 3월1일 아침 09:50 효창공원역 3번출구
효창공원역 3번출구 - 1km - 원효로 자택지(원효로4가 70번지) - 1km -한강공원길 - 3.5km - 절두산 성지 - 0.3km - 0.4km - 합정역 7번출구
점심 : 오후 1:00 합정역 부근 식당 "합정 전집" 02-3142-8896
< 이번 3월 씨순길은...>
3월1일 삼일절의 씨순길, 2년 만에 함석헌의 옛 자택 터를 다시 찾아갑니다. 자택 터 원효로4가 70번지(효창원12길 12호)에는 지금 선생의 체취를 찾을 길 없고 낮선 다세대 주택 한 채가 허름하게 들어서 있습니다.
올 3.1혁명 95주년 되는 해입니다. 5년만 지나면 한 세기 100년이 됩니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의하면, 3.1혁명의 규모는 참가자 200여만명, 사망자 7,509명, 부상 15,850명, 체포 45,306명, 불탄 민가 715호, 교회 47개소, 학교 2개소였습니다. 반면 조선총독부의 공식 집계로는 참가자 106만명, 사망자 553명, 체포 12,000명입니다.
3.1혁명은 함석헌과 유영모의 사제지연을 맺게 해준 사건이기도 합니다. 3.1혁명이 없었다면 함석헌과 유영모의 만남도 없었을 것이며 이 시대의 스승이며 빼어난 민주투사요 인권운동가요 민주투사인 함석헌도 다른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3.1혁명 당시 함석헌은 열아홉의 평양고보 학생이었습니다. 유관순(1902년생) 보다 한 살 위였습니다. 함석헌은 평양경찰서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뿌리며 만세시위에 가담하였으며 일본인 학교장이 요구하는 반성문 쓰기를 거부 학교를 자퇴하고 2년 뒤 1921년 오산학교에 들어갑니다.
3.1혁명 당시 유영모의 나이는 서른으로 이광수 최남선 등과 교우(交友)하며 잡지 “청춘”, “농우(農友)” 등에 여러 편의 글을 기고하였습니다. 유영모가 이광수를 만난 것은 20세 되던 오산학교 과학교사로 재직할 때 였으며 그를 통해 최남선도 알게 되었습니다.
함석헌이 오산학교에 입학했던 같은 해 유영모는 조만식의 후임으로 오산학교 교장으로 취임하게 되어 두 씨알스승의 만남은 이루어집니다. 유영모의 교장 재직기간은 단 1년이었습니다.
함석헌은 말합니다.
“ 일본에 가기 전 오산학교에 있을 무렵부터 나는 사물을 생각하는 눈이 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류영모 선생의 영향입니다. 선생은 깊이 사색하는 분입니다. 선생의 대표적인 말씀은 ‘진실’입니다만 생명을 강조하여 그 이야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나도 늦게나마 ‘나’를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 13장 ‘스승과 제자’445~446쪽 함석헌의 말에서
이번 씨순길의 종착지에는 천주교 절두산성지와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이 서로 이어져 있습니다.
천주교 절두산성지는 1866년 병인박해 당시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한 곳입니다. 프랑스 군함3척은 같은 해 9월과 10월 천주교 탄압을 응징한다는 명분으로 이 곳 양화진까지 올라 왔었습니다.
양화진은 1884년 갑신정변(1884년) 김옥균이 10년 뒤 능지처참되어 효시되었던 곳이며 지금은 고종황제의 외교고문으로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던 헐버트,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베델 등등이 묻힌 선교사의 묘역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