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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irit/e—cr—life

하나님

by e-bluespirit 2014. 3. 30.













하나님

철학자 막스 쉘러는 한국의 '하나님'이 세계적으로
매우 의미 깊은 신(神) 명칭이라고 했다. 서구언어
에서 신을 나타내는 God, Deus는 말 자체로는 특별
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 그런데 '하나님'에서
'하나'와 '님'은 매우 의미 깊고 소중한 말뜻을 
지닌다. '하나'는 하나됨, '하나임'을 뜻하고 '님'은 
그리운 이를 뜻한다.

'하나'는 단순히 숫자 '하나'를 뜻하지 않고 갈라지
지 않은 전체를 나타낸다. 갈라진 상대세계에서 누
구나 '하나됨'을 갈망한다. '하나됨'은 모든 철학과
종교, 정치와 교육, 예술과 문화의 목적이기도 하다.
'하나됨'을 이루기는 어렵다. 나누어지지 않은 전체를
이성이나 개념을 가지고 생각할 수도 없다. 나뉠 수 
없는 '하나'의 세계는 궁극적 절대적 신비의 세계이다.

하나님, 하느님, 한우님, 한울님, 하날님의 뿌리말은
'한님'이다. '한'은 겨레를 나타내는 말인데 '하나'
(一), '하늘'(天), '우'(上)를 뜻한다. 또 '한'(=환)은 
'밝고 환함'을 뜻한다. '하나님'이란 말 속에 이렇게 
깊은 뜻을 담아주신 '한님', 너무 고맙다. '하나님'을 
부를 때마다 서로 하나로 되고 영혼은 하늘 위로 솟아
오르고 밝고 환한 삶이 시작된다.


-박재순







<생명의 존재 이유>

이 우주는 하나님의 로고스가 자기를 포기하고, 그 영원하고 무궁한 자리에서 내려와 만물 속에 거하심에 의하여 성립된다. 과연 이 우주는 하나님의 로고스의 죽음에 의하여 사는 우주다. 그러나 그 죽으심에 의하여 저는 그 영원히 살으심을 가진다. 저는 스스로 낮아지는 가운데서 높임을 가지는 것이며, 스스로 고난 받음에 의하여 자유로운 것이며, 스스로 죄에 거함에 의하여 거룩함을 가지는 것이며, 죽는 일에서 살으시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이 사랑의 도가 우주의 도다. 그러므로 생명의 기원은 이 하나님의 사랑 곧 아가페에 있는 것이요, 그 존재이유도 이 아가페로써 일하는 하나님의 즐거움에 있는 것이다. 

『성서적 입장에서 본 세계역사』함석헌전집 9. 47쪽.



< 풀이 >

하나님의 로고스는 하나님의 사랑과 뜻, 말씀과 계명이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자기를 포기하고 비워서 만물 속에 들어와 만물을 살린다. 하나님이 자기를 부정하고 포기함으로써 스스로 죽음으로써 우주도 살고 하나님도 영원히 산다. 스스로 낮아짐으로써 높아지고 스스로 고난 받음으로써 자유로워지고 스스로 죄에 거함으로써 거룩하고 죽음으로써 산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이 사랑의 도가 씨의 도고 우주의 도다. 
사랑의 도는 인과율이 지배하는 물질세계와 자연과학의 영역에서는 성립할 수 없는 원리다. 이것은 인과율을 뛰어넘는, 모순과 역설이 지배하는 심층적이고 입체적인 존재의 세계인 생명과 정신의 길이고 원리다. 생명과 정신의 기원은 하나님의 사랑에 있고 생명과 정신의 존재이유도 사랑으로 일하는 하나님의 즐거움에 있다. 생명의 기원인 사랑은 기쁘고 즐거운 것이다. 생명의 근원은 사랑이고 생명의 본성은 기쁨과 즐거움이다.

-박재순





금욕의 사람 예수

개신교 신학에서는 예수를 믿음의 대상,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만 보거나 먹고 마시기를 즐기는 자유로운 인간으로 보았다. 여기서 예수는 신이거나 율법과 제도에 매이지 않는 자유인이었다.예수가 진리를 몸으로 깨달아간 자기훈련의 과정이나 자기를 극복하고 하나님과 하나 되는 영적 과정이나 노력은 생각하지 않았다.

예수도 역사 속에서 몸을 지니고 살았던 인간이다. 30세까지 가족과 함께 먹고살았던 생활인이었고, 스스로를 일깨워갔던 깨달음의 사람이었다. 빈들에서 40일 동안 금식한 후에 공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예수가 40일 동안 금식했다는것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철저히 자기를 부정했다는 것을 뜻한다. 

하루 종일 메마른 황톳길을 걸어 다니며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하나님의 자녀들로 일으켜 세우는 일을 하다가 밤이면 홀로 산으로 들어가 밤 새워 기도하신 예수. 이른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신 예수. 가족을 떠나 결혼할 생각도 않고 오로지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신 예수. 섬김을 받으러 온 게 아니라 섬기러 왔다며,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예수.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고 손이 죄를 지으면 손을 잘라버리고 눈이 죄를 지으면 눈을 빼버리라고 이르신 예수. 예수는 철저히 자기를 비운 금욕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금욕주의자는 아니었다.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하신 것은 삶의 바람을 인정한 것이며, 병을 고치고 밥을 함께 먹은 것은 몸의 삶을긍정한 것이다. 

-박재순






<움직이면서 움직이지 않는 중심 축>

은하 우주는 수레처럼 움직여 돈다. 상대세계에서는 움직이지 않는 정(靜)이란 없다. 움직이지 않는 것이 있다면 수레의 축(軸)일 것이다. 그러나 축이 참으로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축이란 한 긋(點)이다. 움직이는 상대세계에서는 머무르고 싶어도 머무를 수 없는 무주(無住)이다. 이 상대세계에 축과 같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 얼나(靈我)이다.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생명이라 얼 나는 없는 곳이 없는 절대(絶對)이다. 그러므로 갈 곳이 없고 올 곳이 없다. 따라서 머무를 곳도 없다.(無去無來亦無住)

다석 유영모 어록 97쪽.


< 풀이 >

지구도 돌고 태양계도 돌고 은하 우주도 돌아간다. 생성 소멸하는 물질들로 이루어진 상대세계에서는 움직이지 않는 것이 없다. 움직이지 않는 것이 있다면 수레의 축이 있다. 축은 가만히 있는데 수레바퀴가 축을 중심으로 돌아감으로써 수레가 앞으로 나아간다. 수레바퀴가 볼 때는 수레 축이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수레 축도 수레와 함께 움직여 나아간다. 그리고 태풍은 격렬한 힘으로 움직이지만 태풍의 중심에는 태풍의 눈이 있어 진공처럼 고요하고 정지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태풍의 눈도 태풍과 함께 움직이는 것이다.
사람은 움직이는 상대세계에 살면서도 영원히 머무르고 싶어 하고, 생성 소멸하는 물질세계에 살면서도 영원히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움직이는 상대세계에서는 머무르고 싶어도 머무를 수 없고 생성 소멸하는 물질세계에서는 영원히 살고 싶어도 살 수가 없다. 상대세계와 물질세계의 중심 축과 같고 태풍의 눈과 같은 것이 ‘얼 나’이다. ‘얼 나’는 물질적 상대세계를 초월하고 본능적 생명세계를 초월하고 마음의 감정과 지성을 초월한 절대의 존재다. 하나님의 생명인 얼 나는 시간과 공간에 매이지 않아서 갈 곳도 없고 올 곳도 없으며 머무를 곳도 없다. 얼 나가 살아 있으면 영원히 살 길이 열린다. 

-박재순






<생명은 자기를 포기하는 사랑으로 산다>

절대자가 자기 스스로 즐겨 자신을 한정하여 만물 속에 거하신다. 그러므로 사랑이다. 사랑이란 자기 스스로를 포기하는 일이다. 자기를 포기하므로 생명이다. 자기가 만일 영원히 자기를 주장한다면 영원의 죽음이 있을 뿐이요, 생명은 없다. 생명은 자기가 시시각각으로 자기를 포기함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성서적 입장에서 본 세계역사』함석헌전집 9. 47쪽.


< 풀이 >

생명은 거룩한 신성과 닿아 있고 만물에는 초월적 절대자가 깃들어 있다. 남을 위해 자기를 낮추고 버리는 것이 사랑이다. 남을 위해 자기를 포기하는 것이 자기를 참으로 초월하는 것이고 남을 사랑하는 것이다. 물질이 자기를 포기하고 초월함으로써 생명이 될 수 있었다. 만일 물질이 영원히 자기를 주장했다면 영원히 물질로 남았을 것이고 생명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생명은 시시각각 자기를 포기하고 버리고 초월함으로써 존재할 수 있고 진화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저 자신에게 달라붙고 저 자신을 고집하는 생명은 더 이상 생명이 될 수 없다. 

-박재순





살다-사르다

우리말 '살다'는 '움직이다'를 뜻한다. '살살', '살랑살랑'
에서처럼 '살'은 움직임을 뜻한다. 또 '살다'는 '사르다'
(불사르다)와 통하는 말이다. 삶은 물질에너지, 생명에너
지를 '사르어' 움직이는 것을 나타낸다. 

코와 허파로 숨 쉬는 것은 밥(생명에너지)을 불살라 삶의 힘
을 얻는 것이다. 밥을 먹고 색이고 코와 허파로 숨 쉬고 염
통으로 피를 맑게 하는 것은 먹이를 불태워 힘을 얻는 일이
다. 숨은 생명의 불길을 지피는 풀무질이다.

목숨은 스스로를 불태우는 제사이고, 스스로를 정화하는 불
이다. 생명(生命)은 '살라는 명령'이다. 살림은 살리려는 
애씀이며 다른 생명체를 살리고 돋우고 힘주는 거룩한 섬김
이다. 우리말 속에 우리 선조의 깊은 생명철학이 담겨 있
다. 

-박재순






씨알순례길



<함석헌 쌍문동 자택과 4.19민주묘지 >

출발 : 4월5일 아침 09:50 쌍문역 4번출구

쌍문역4번출구  0.6Km - 함석헌쌍문동가  쌍문동공원 2Km - 연산군묘  왕실묘역길(20구간) 1.6Km -  우이령길입구  소나무숲길(1구간) 2.8Km  솔밭공원  0.5Km 4.19민주묘지 : 총거리 7.5Km

점심 : 오후 1:30 4.19민주묘지 앞 "옛날 한우 소머리국밥" 02-996-1230








<4월의 씨순길은...>

“ 한마디로 요약해서 4.19는 무엇이고, 5.16은 무엇이냐? 4.19는 지성(知性)의 발로요, 5.16은 물성(物性)의 발로다. 4.19 후에 5.16이 왔다는 것은 지성과 물성의 충돌이다. 그리고 물성이 한때 지성을 덮어누른 것이다.” - 『뜻으로 본 한국역사』 1965 넷째 판 

함석헌은 우리 역사의 실패원인을, 특히 해방 후 실패를 거듭하여 어려운 지경에 빠지게 된 이유를 첫째 가난, 둘째 외국의 간섭, 셋째 정치인의 잘못, 넷째 국민정신의 약함, 다섯째 국민적 판단의 잘못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실패의 실례로 38선을 지적합니다.

함석헌은 다시 말합니다. 

“나라를 바로 잡기 위하여 한번 모험을 할 전략적인 지점이 셋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부(富)가 그 하나요, 권(權)이 또 하나요, 그 다음은 지(知)다. 그러나 이 셋 중에 반드시 골라야 하는 것은 지란 말이다.”

1960년의 4.19와 1961년의 5.16, 그리고 1965년 함석헌의 평가. 그 후 50년이 지났습니다. 지금 우리는 가난의 터널을 이미 지났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경제력과 힘이 커진 만큼 외국의 간섭에 대하여 주체적으로 대처할 능력도 갖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함석헌이 남기고 간 미완의 원고를 계속 쓰는 일입니다. 우리가 4월의 첫 토요일 씨순길을 걷는 뜻은 함석헌의 미정고를 이어 쓰기 위함입니다.


                                                ***************


< 이번 4월 씨순길에는...> 생각 넷

함석헌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역사는 “되풀이와 자람“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역사운동은 수레바퀴나 나선운동에 비유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습니다. 17세기 비코(Vico 1668~1744 이태리)도 역사는 나선형으로 진보한다고 하였습니다. 역사는 반복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자비하지 않습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떼어내어 합병했습니다. 러시아군대가 변복을 하고 들어가 점령해버린 것입니다.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접수하기 위하여 한발의 총알도 필요 없었습니다. 단지 합병조약에 서명하는 펜 한 자루로 족했습니다. 우크라이나 군대는 크림반도에서 철수하여 사실상 항복을 하였습니다. 

우크라이나에는 김구도 안중근도 유관순도 없었습니다. 국제사회는 말로만 러시아를 질타할 뿐 속수무책으로 우크라이나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의 법적절차는 러시아 상원의 비준만 남았으며 내년 1월1일 이뤄질 예정입니다.  

1880년경 청나라 황준헌은 <조선책략>을 김홍집에게 지어주며 친중(親中).결일(結日).연미(聯美)‘하여 러시아의 남하를 막아야 한다는 균세책(均勢策)을 권유했습니다. 이 작은 책자에 대하여 조선의 보수 유생들은 척사상소를 하며 격렬히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로써 조선은 문을 열고 개방으로 나가는 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다시 중국 일본 미국 러시아와 대면하고 앉았습니다. 조선말 그 때 우리는 실기(失機)하여 자강(自强)하지 못했으나 지금은 다릅니다. 결코 자비하지 않은 역사와 대결할 힘, 어느 정도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이 우리 자신을 지키고 우리의 문화력을 유감없이 꽃 피울 만큼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힘을 더 키워야 합니다. 그래서 함석헌이 말하는 역사의 바퀴를 앞으로 나가게 하고 반복하는 역사의 나선형을 한 단계 상승시켜야 합니다.
                       

< 이번 4월 씨순길에는...> 생각 셋

이번 4월 씨순길에는 김수영문학관과 손병희묘소도 지납니다.


푸른 하늘을
                           - 김수영 -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왔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革命)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김수영이 419가 있었던 1960년 6월에 쓴 시입니다. 당시 각 집단의 욕구가 절제없이 쏟아지고 정치가들은 혁명에 무임승차하여 혁명의 본질을 왜곡하며 사회는 혼돈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시인은 경고의 노래를 합니다. 피의 냄새없는 자유는 없고 혁명은 고독할 수 밖에 없다고...

함석헌 쌍문동집을 방문하고 쌍문공원을 지나면 연산군묘 바로 전 김수영문학관이 있습니다. 잠시 들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소나무 숲길에 접어들기 전 손병희의 묘소도 지나게 됩니다. 일제치하에서의 항일광복운동과 419민주혁명은 한뿌리 씨알정신의 발로입니다. 4월의 씨순길은 김수영이 노래한 노고지리의 비상을 묵상하며 걷습니다.

                                     
< 이번 4월 씨순길에는...> 생각 둘

“ 한마디로 요약해서 4.19는 무엇이고, 5.16은 무엇이냐? 4.19는 지성(知性)의 발로요, 5.16은 물성(物性)의 발로다. 4.19 후에 5.16이 왔다는 것은 지성과 물성의 충돌이다. 그리고 물성이 한때 지성을 덮어누른 것이다.” - 『뜻으로 본 한국역사』 1965 넷째 판 

함석헌은 우리 역사의 실패원인을, 특히 해방 후 실패를 거듭하여 어려운 지경에 빠지게 된 이유를 첫째 가난, 둘째 외국의 간섭, 셋째 정치인의 잘못, 넷째 국민정신의 약함, 다섯째 국민적 판단의 잘못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실패의 실례로 38선을 지적합니다.

함석헌은 다시 말합니다. 

“나라를 바로 잡기 위하여 한번 모험을 할 전략적인 지점이 셋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부(富)가 그 하나요, 권(權)이 또 하나요, 그 다음은 지(知)다. 그러나 이 셋 중에 반드시 골라야 하는 것은 지란 말이다.”

1960년의 4.19와 1961년의 5.16, 그리고 1965년 함석헌의 평가. 그 후 50년이 지났습니다. 지금 우리는 가난의 터널을 이미 지났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경제력과 힘이 커진 만큼 외국의 간섭에 대하여 주체적으로 대처할 능력도 갖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함석헌이 남기고 간 미완의 원고를 계속 쓰는 일입니다. 우리가 4월의 첫 토요일 씨순길을 걷는 뜻은 함석헌의 미정고를 이어 쓰기 위함입니다.
                                       

< 이번 4월 씨순길에는...> 생각 하나

지난 3월 3.1혁명과 함석헌을 생각하며 한강길을 걸었습니다. 이번 4월에도 함섯헌을 생각하며 함석헌의 쌍문동집과 4.19민주묘지를 잇는 신록의 숲길을 걷습니다. 

함석헌의 쌍문동집 방문이 이번으로 세번째입니다. 첫번째 우이령을 넘어 쌍문동집을 방문하였고 두번째 먼저 쌍문동집을 찾은 후 북한산둘레길 19구간을 걸어 무수골로 갔습니다.

이번에도 먼저 쌍문동집을 찾습니다. 그리고 북한산둘레길19구간(왕실묘역길)과 1구간(소나무숲길)을 걸어 4.19민주묘지로 갑니다.

함서헌은 4.19를 미완의 혁명, 가련한 혁명이라고 하였습니다. 4.19혁명은 얼마 후 무참히도 5.16의 군화발에 밟히고 맙니다.그러나 불멸의 그 생명력은 절대 녹을 것 같지 않던 두꺼운 어름장 밑에서도 혹한의 계절을 이겨내고 자라고 자라 결국에는 민주화의 꽃을 피웠습니다.

역사는 언제나 미정고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은 4.19의 미정고, 씨알정신을 이어 이어 키워나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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