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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irit/e—cr—life

얼 나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by e-bluespirit 2014. 4. 10.










<얼 나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 14,6) 하나님이 주신 얼 나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예수는 하나님이 예수의 마음 속에 보낸 얼 나가 예수 자신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깨달은 것이다. 예수는 참 나(얼 나)와 길, 참나와 진리, 참나와 생명이 둘이 아닌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참 나를 길(道)로 표현한 이가 노자(老子)요, 참나를 진리로 표현한 이가 석가요, 참 나를 생명으로 표현한 이가 예수다. 

다석 유영모 어록 97~8쪽.


< 풀이 >

기독교인들은 예수만이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예수만이 길과 진리와 생명을 독점한 것이 된다. 모든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이 길이고 진리고 생명인데 예수가 그것을 독점했다는 것이 이상하다. 사랑과 정의의 님인 예수라면 좋은 것은 함께 누리고 필요한 것은 나누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여기서 ‘나’를 예수의 개인적인 ‘나’로 보면 예수만 구원자라는 독단적인 교리에 빠지고 만다. 그러나 ‘나’를 예수 안에 있는 참 나, 얼 나, 하나님의 생명과 영으로 보면 이 말은 예수의 배타적 주장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보편적 진리 선언이 된다. 예수처럼 나도 얼 나를 가질 수 있고 얼 나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될 수 있다. 내게서 길이 나오고 내게서 진리가 생겨나고 내게서 생명이 만들어진다. 그렇게 보면 이것은 인간과 생명의 보편적인 진리 선언이라서 노자, 석가, 예수의 가르침에 두루 통한다.

-박재순



가운데 길(中道)과 과녁의 가운데를 맞힘(的中)

가운데 길로 가야 서로 죽임과 멸망의 길에서 벗어나 서로 살림과 평화의 길로 갈 수 있다. 가운데 중(中)이란 무엇인가? 먼저 자연물리세계의 가운데를 알아보자. 선분과 평면에서 가운데는 중간(中間)이고 입체공간에서는 중앙(中央)이고 시공간(역사)에서는 앞으로 나아가서 목표와 과녁의 가운데를 맞추는 것(的中)이다. 

생명정신세계에서 가운데 중은 주체의 내적 중심(中心)을 가리킨다. 모든 생명체는 저마다 주체이고 남이 대신할 수 없는 통일적 초점, 중심을 가졌다. 제가 제게 중심이다. 생명과 사회의 관계는 개인과 집단의 주체와 주체의 관계다. 저마다 자기중심을 가진 주체와 집단이 직선과 평면에서 만나면 부딪치고 깨질 수밖에 없다. 어느 한쪽의 중심만 남고 다른 중심은 제거되거나 짓밟히고 만다. 입체 공간의 중앙에서 만나는 경우에도 저마다의 중심은 전체 하나의 중앙에 있는 중심 속에 해소되어 사라지고 만다. 시공간 세계에서 과녁과 목표의 중심을 향해 나아가듯이, 저마다 제 중심을 가진 주체와 집단들이 새로운 미래의 공동 이념과 목표 속에서 하나의 중심을 향해 나아갈 때 비로소 저마다 제 중심을 지키고 살리고 실현하면서 전체 하나의 중심에서 만날 수 있다.

서로 다른 주체와 집단이 공존과 상생의 평화세계에 이르려면 서로 다른 주체와 집단의 중심을 넘어서 서로 하나가 될 수 있는 새롭고 큰 중심에 이르러야 한다. 서로 다른 주체 사이에서 서로의 중심과 경계를 넘어서 솟아올라 앞으로 나아가서 전체 하나 됨의 새로운 중심을 열어야 한다. 서로 살림과 평화의 이념과 목적을 가지고 하나의 중심을 향해 나아갈 때 비로소 서로 저마다 저답게 될 수 있다. 또한 나는 나답게 너는 너답게 됨으로써 보다 높고 더 나아간 자리서 하나 됨에 이를 수 있다. 

서로 살림과 평화의 새로운 큰 중심에 이르려면 저마다 저답게 되면서 저를 넘어서, 욕심과 집착, 편견과 감정을 버리고 솟아올라야 하고 낡은 과거의 전통과 이념에서 벗어나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다석은 서로 다른 주체와 주체의 사이에서 가운데로 솟아올라 나아가라고 했다. 서로 다른 주체와 주체의 사이에서 가운데로 솟아올라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가운데 길로 가는 것이다. 솟아오름은 자기의 중심을 넘어서 너와 나의 사이 경계에서 새로운 큰 중심에로 솟아오르는 것이다. 욕망과 감정, 물질적 이해관계와 권력관계를 뛰어넘어 너와 내가 하나로 되는 깊고 높은 중심에 이름이다. 나아감은 낡은 과거에서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는 것이고 낡은 관념과 체제, 인생관과 세계관에서 새로운 가치와 이념과 미래상에로 나아가는 것이다. 새로운 가치와 이념을 향해 서로 살림과 평화공존을 위한 목표와 과녁의 한 가운데를 향해 곧게 나아가야 한다. 

중도통합과 중도통일을 말하는 사람들은 먼저 참된 가운데와 가운데 길을 찾아서 그 길로 가야 한다. 가운데 길로 가려는 이들은 마땅히 개인과 집단의 중심과 이해관계를 넘어서 솟아올라 새로운 존재와 정신의 지평을 열어야 하고 낡은 관념과 감정, 낡은 시대와 가치에서 벗어나 새로운 이념과 정신, 새로운 시대와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박재순





연애감정이 오래 못 가는 까닭

생명진화 과정은 생명의 껍데기 속에서 껍데기를 넘어서 알맹이를 심화시키는 과정이다. 물질적 신체 속에서 본능적 생명을 길러내고 생명의 본능에서 감정을 빚어내고 감정 속에서 의식과 지성을 닦아내고 의식과 지성에서 하늘의 영성과 신령이 떠오르게 했다. 생명진화과정과 인간 생명의 내면화과정은 일치한다. 

연애감정이 오래 못 가는 까닭은 육체와 감정의 공명에 머물기 때문이다. 육체와 감정은 인간의 생명에서 겉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육체와 감정은 변하기 쉽고 영속적인 것이 못 된다. 연애감정만으로는 생각과 지성의 공명에 이르지 못한다. 비록 생각과 지성의 공명에 이르더라도 그 공명이 영속하지는 못한다. 생각은 감정과 욕망에 따라 바뀔 수 있고 지성은 생명과 영의 깊이와 높이를 다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개인의 감정과 생각을 초월한 환희와 지복의 공명, 슬픔과 고통의 자비로운 공명도 영원하지는 않다. 환희와 지복도, 슬픔과 고통도 영원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환희와 슬픔, 없음과 있음을 넘어서 영원한 하나에 이른 하나님 앞에서만 참 나가 될 수 있고 참 나만이 영원할 수 있다. 참 나만이 너와 나를 함께 살리고 세우고 높일 수 있다.
-박재순







씨알순례길

<함석헌 쌍문동 자택과 4.19민주묘지 >

출발 : 4월5일 아침 09:50 쌍문역 4번출구

쌍문역4번출구  0.6Km - 함석헌쌍문동가  쌍문동공원 2Km - 연산군묘  왕실묘역길(20구간) 1.6Km -  우이령길입구  소나무숲길(1구간) 2.8Km  솔밭공원  0.5Km 4.19민주묘지 : 총거리 7.5Km

점심 : 오후 1:30 4.19 민주묘지 앞 "옛날 한우 소머리국밥" 02-996-1230





< 이번 4월 씨순길에는...> 생각 다섯

함석헌은 호(號)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 호 아닌 호로 스스로 바보새, 신천옹(信天翁)이라고 하는 때”가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발길에 채여 하늘만 믿고 사는 자신의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신천옹은 날개를 펴면 길이가 3~4미터가 됩니다. 한번 날면 큰 날개로 쉬지 않고3,200Km를 날 수 있지만 지상에서는 동작이 느려 작은 새에게 자신의 먹이를 빼앗기기도 합니다. 그래서 ‘알바트로스‘라고도 하는 신천옹은 ‘바보새’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함석헌이나 유영모는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박사‘학위는 ’논문제출‘ 없이도 취득이 가능합니다. 특히 대통령이 되면 자의 타의로 여럿의 명예박사학위를 갖게 됩니다. 박근혜도 지난 3월28일 독일 드레스덴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오는 6월4일 지방선거가 있습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풍경이지만 옛날 선거철이면 “박사꼬리”를 붙인 공직 출마자들의 포스타가 거리에 나붙기도 했습니다. 

<함석헌> 이름 석 자만 남기고 훌쩍 떠나신 선생님, 우리 그분의 사자후를 들으러 4월의 순례를 떠납니다. 







< 이번 4월 씨순길에는...> 생각 넷

함석헌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역사는 “되풀이와 자람“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역사운동은 수레바퀴나 나선운동에 비유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습니다. 17세기 비코(Vico 1668~1744 이태리)도 역사는 나선형으로 진보한다고 하였습니다. 역사는 반복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자비하지 않습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떼어내어 합병했습니다. 러시아군대가 변복을 하고 들어가 점령해버린 것입니다.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접수하기 위하여 한발의 총알도 필요 없었습니다. 단지 합병조약에 서명하는 펜 한 자루로 족했습니다. 우크라이나 군대는 크림반도에서 철수하여 사실상 항복을 하였습니다. 

우크라이나에는 김구도 안중근도 유관순도 없었습니다. 국제사회는 말로만 러시아를 질타할 뿐 속수무책으로 우크라이나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의 법적절차는 러시아 상원의 비준만 남았으며 내년 1월1일 이뤄질 예정입니다.  

1880년경 청나라 황준헌은 <조선책략>을 김홍집에게 지어주며 친중(親中).결일(結日).연미(聯美)‘하여 러시아의 남하를 막아야 한다는 균세책(均勢策)을 권유했습니다. 이 작은 책자에 대하여 조선의 보수 유생들은 척사상소를 하며 격렬히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로써 조선은 문을 열고 개방으로 나가는 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다시 중국 일본 미국 러시아와 대면하고 앉았습니다. 조선말 그 때 우리는 실기(失機)하여 자강(自强)하지 못했으나 지금은 다릅니다. 결코 자비하지 않은 역사와 대결할 힘, 어느 정도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이 우리 자신을 지키고 우리의 문화력을 유감없이 꽃 피울 만큼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힘을 더 키워야 합니다. 그래서 함석헌이 말하는 역사의 바퀴를 앞으로 나가게 하고 반복하는 역사의 나선형을 한 단계 상승시켜야 합니다.



          

< 이번 4월 씨순길에는...> 생각 셋

이번 4월 씨순길에는 김수영문학관과 손병희묘소도 지납니다.


푸른 하늘을
                           - 김수영 -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왔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革命)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김수영이 419가 있었던 1960년 6월에 쓴 시입니다. 당시 각 집단의 욕구가 절제없이 쏟아지고 정치가들은 혁명에 무임승차하여 혁명의 본질을 왜곡하며 사회는 혼돈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시인은 경고의 노래를 합니다. 피의 냄새없는 자유는 없고 혁명은 고독할 수 밖에 없다고...

함석헌 쌍문동집을 방문하고 쌍문공원을 지나면 연산군묘 바로 전 김수영문학관이 있습니다. 잠시 들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소나무 숲길에 접어들기 전 손병희의 묘소도 지나게 됩니다. 일제치하에서의 항일광복운동과 419민주혁명은 한뿌리 씨알정신의 발로입니다. 4월의 씨순길은 김수영이 노래한 노고지리의 비상을 묵상하며 걷습니다.
                                     




< 이번 4월 씨순길에는...> 생각 둘

“ 한마디로 요약해서 4.19는 무엇이고, 5.16은 무엇이냐? 4.19는 지성(知性)의 발로요, 5.16은 물성(物性)의 발로다. 4.19 후에 5.16이 왔다는 것은 지성과 물성의 충돌이다. 그리고 물성이 한때 지성을 덮어누른 것이다.” - 『뜻으로 본 한국역사』 1965 넷째 판 

함석헌은 우리 역사의 실패원인을, 특히 해방 후 실패를 거듭하여 어려운 지경에 빠지게 된 이유를 첫째 가난, 둘째 외국의 간섭, 셋째 정치인의 잘못, 넷째 국민정신의 약함, 다섯째 국민적 판단의 잘못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실패의 실례로 38선을 지적합니다.

함석헌은 다시 말합니다. 

“나라를 바로 잡기 위하여 한번 모험을 할 전략적인 지점이 셋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부(富)가 그 하나요, 권(權)이 또 하나요, 그 다음은 지(知)다. 그러나 이 셋 중에 반드시 골라야 하는 것은 지란 말이다.”

1960년의 4.19와 1961년의 5.16, 그리고 1965년 함석헌의 평가. 그 후 50년이 지났습니다. 지금 우리는 가난의 터널을 이미 지났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경제력과 힘이 커진 만큼 외국의 간섭에 대하여 주체적으로 대처할 능력도 갖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함석헌이 남기고 간 미완의 원고를 계속 쓰는 일입니다. 우리가 4월의 첫 토요일 씨순길을 걷는 뜻은 함석헌의 미정고를 이어 쓰기 위함입니다.
                                       





< 이번 4월 씨순길에는...> 생각 하나

지난 3월 3.1혁명과 함석헌을 생각하며 한강길을 걸었습니다. 이번 4월에도 함섯헌을 생각하며 함석헌의 쌍문동집과 4.19민주묘지를 잇는 신록의 숲길을 걷습니다. 

함석헌의 쌍문동집 방문이 이번으로 세번째입니다. 첫번째 우이령을 넘어 쌍문동집을 방문하였고 두번째 먼저 쌍문동집을 찾은 후 북한산둘레길 19구간을 걸어 무수골로 갔습니다.

이번에도 먼저 쌍문동집을 찾습니다. 그리고 북한산둘레길19구간(왕실묘역길)과 1구간(소나무숲길)을 걸어 4.19민주묘지로 갑니다.

함서헌은 4.19를 미완의 혁명, 가련한 혁명이라고 하였습니다. 4.19혁명은 얼마 후 무참히도 5.16의 군화발에 밟히고 맙니다.그러나 불멸의 그 생명력은 절대 녹을 것 같지 않던 두꺼운 어름장 밑에서도 혹한의 계절을 이겨내고 자라고 자라 결국에는 민주화의 꽃을 피웠습니다.

역사는 언제나 미정고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은 4.19의 미정고, 씨알정신을 이어 이어 키워나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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