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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irit/e—cr—life

지금 여기서 앞으로

by e-bluespirit 2014. 8. 4.





어느 종교를 믿거나

몸성히(健康), 맘 놓이(放心) 바탈 이뤄(成性) 이렇게 세 가지를 가지고 줄곧 우(하나님)로 오르고자 한다. 어떠한 신앙을 갖겠다고 하는 것은 기독교·유교·불교 어느 것을 믿거나 그것은 각자의 할 탓이다. 신앙과 정신은 자유이기에 나로서 무어라 말하지 않는다. 어느 종교를 믿거나 몸은 성해야 하고 맘은 놓여야 하고 바탈을 이뤄야 한다. 

다석 유영모 어록 100쪽.

<풀이>


어느 종교를 믿거나 사람인 다음에는 몸은 성해야 하고 맘은 놓여야 하며 바탈(뜻)을 이뤄야 한다. 이것은 종교, 문화, 국가를 넘어서 신분과 지위, 명예와 업적, 가난과 부, 젊음과 늙음을 떠나서 누구나 힘쓰고 노력할 일이다. 세 가지 가운데 가장 먼저 힘쓸 일은 몸이 성하도록 하는 일이다. 몸은 내게 가장 가까운 것이고 몸을 성하게 하는 것이 가장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몸이 성치 않은 데 맘이 놓일 리가 없기 때문에 맘 놓이기를 위해서도 몸이 성해야 한다. 
그런데 몸이 성하려면 알맞게 먹고 알맞게 자며, 몸과 맘을 곧게 해야 한다. 몸이 놓이지 않으면 몸을 곧게 할 수 없다. 몸을 성하게 하려면 먼저 맘이 놓여서 몸이 곧아야 한다. 맘이 놓이려면 몸이 성해야 하고 몸이 성하려면 맘이 놓여야 한다. 몸이 성하고 맘이 놓이면 바탈을 이룰 수 있고 바탈을 이루면 얼 나가 살아서 줄곧 우(하늘, 하나님)로 솟아오를 수 있다. 우로 솟아오르는 사람은 사람 구실을 하면서 뜻을 이룰 수 있다. 우로 솟아오르면 기쁘고 신이 나며 생명과 정신이 실현되고 완성된다. 

-박재순




지금 여기서 앞으로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다. 지나간 것을 놓아야 살 수 있다. 지나간 것은 아무 것도 붙잡지 말아야 한다. 빈 손, 빈 머리, 빈 맘으로 오직 위로 솟아올라 앞으로 나가야 산다.

지나간 것은 끝난 것이고, 없는 것이다. 어떤 일도 지나간 것은 두렵지 않다. 그리고 어떤 일도 지나가지 않을 것은 없다. 그러니 세상에 두려울 것이 무언가? 삶은 늘 새로 오는 것, 그저 지나가 버리기 전에 붙잡아 참 삶에로 들어가야 산다. 

-박재순







생명진화의 길, 복잡화와 통일

진화의 과정은 복잡화인 동시에 통일에 향하는 노력이다. 복잡화가 밖에 향하는 발산이라면 일화(一化)는 안에 향하는 수렴(收斂)이다. 그러므로 진화가 나가면 나갈수록 생명현상의 내면화는 필연적이다. 정신현상은 물질현상의 복잡화에 의하여 우연히 일어난 것이라고 하는 것은 천박한 의견이다. 진화의 과정이 다화(多化)와 일화(一化)의 교류라고 하면 물질과 정신이 일체를 이루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물질은 정신적 자각에까지 이르지 않고는 마지 않을 것이다.

『성서적 입장에서 본 세계역사』함석헌전집 9. 74쪽.

<풀이>


생명진화는 물질적 신체적으로는 복잡화의 과정이고 정신적 내적으로는 통일의 과정이다. 신체의 복잡화와 정신의 통일화가 맞물려 있다. 신체적으로 외적으로 복잡해질수록 정신적으로 내적으로는 통일의 초점이 더욱 뚜렷해진다. 생명진화가 진전될수록 물질과 정신, 몸과 영은 더욱 깊이 결합되고 일체를 이루게 된다. 몸은 더욱 신령해지고 정신은 더욱 풍부하고 자유로워진다. 사람의 몸 속에서 물질은 정신적 자각에 이르고 정신은 물질 속에서 더욱 깊고 뚜렷하고 통일된 초점을 갖게 된다. 

-박재순



닭 울음: “꼭 깨요”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올 때 한국민족은 깊은 잠에서 깨어나는 때였다. 왕조시대가 끝나고 민중이 일어서는 때였다. 이승훈과 안창호를 비롯한 민족적 기독교인들은 기독교 신앙이 역사의 깊은 잠에서 민족을 깨운다고 보았다. 

3.1독립운동을 주도했던 남강 이승훈의 종손자였고, 한국사학자 이기백의 아버지였던 밝맑 이찬갑은 홍성 풀무학교의 설립자였다. 그는 기독교 신앙이 민족의 정신을 일깨운다고 믿었고, 일제의 식민통치 기간에 한국 민중이 깨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이찬갑의 아내 김의경이 닭 울음소리가 “꼭 깨요”로 들린다고 했다. 닭 울음소리를 듣지 못하는 도시 생활을 한 지도 오래 된다. 오랜 세월 인류를 깨워 온 닭의 힘찬 울음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 것은 불행한 일이다. 우리 속에서 우리를 일깨우는 닭 울음소리가 살아 있어야 한다. 

-박재순




얼굴은 얼을 드러내는 골짜기

얼을 드러내는 골짜기가 얼굴이다. 누구나 얼굴을 쳐들고 다니는 것을 보면 아마 얼굴만이 영원 생명인 얼이 드러날 것이라는 상징인지도 모르겠다. 얼굴만은 누구나 반듯하게 드러내 놓고 보이려 함은 몸보다 훨씬 중요한 마음이 (얼굴에) 드러나서 그런가 보다. 몸은 옷이요 얼이 임자다. 몸 위에 얼굴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얼굴 밑에 몸이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다석 유영모 어록 100쪽.

<풀이>


뱀의 얼굴이나 늑대 호랑이의 얼굴과 비교하면 사람의 얼굴이 지성과 영성을 드러내는 높은 품격을 지닌 것을 알 수 있다. 누구나 사람은 몸은 가리면서 얼굴은 번듯이 내놓고 다닌다. 몸은 위에 얼굴을 받들고 있으며 얼굴은 아래에 몸을 거느리고 있다. 마음의 지성과 영성은 얼굴에 드러내고 몸 속에 있는 본능과 욕구를 숨기고 싶어서 사람은 얼굴 밑에 몸을 옷으로 가리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박재순




비번식기의 삶

동물은 번식기가 끝나면 죽기 마련인데 사람은 번식기를 지내고도 수명이 크게 늘었다. 50세 이후의 삶은 비번식기에 속한다. 번식을 위한 생물학적 욕망에서 벗어난 몸과 맘으로 어떻게 살까? 

성적 욕망과 열정이 엷어지면 몸과 맘은 편해진다. 이제 정신세계를 풍요롭게 하는 데 힘을 써야 하지 않을까? 진리탐구를 위해 공부하고 영적 깨달음을 위해 몸과 맘을 단련하고 젊은이들을 가르치고, 이웃을 섬기는 일에 힘써야 마땅하다. 


-박재순







생명진화의 동인과 목적

진화의 과정은 하나님에게서 흘러나오는 과정이고, 또 흘러 돌아가는 과정이다. 로고스는 만물의 근원이요, 또 만물의 귀착점이다. 그는 창조자요, 또 통합자다. 그리고 그 로고스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진화의 의미는 ‘사랑’에 있다. 만물을 낳은 것은 이 아가페다. 

『성서적 입장에서 본 세계역사』함석헌전집 9. 76쪽.

<풀이>

그리스철학에서 로고스는 이성, 법, 말, 논리, 계산을 뜻하는데 기독교 성경에서는 로고스가 하나님의 사랑과 말씀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사랑과 말씀이 진리이고 생명과 역사를 형성하고 움직이는 원리라고 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역사와 생명, 이론과 사상의 바탕에는 사랑이 있다. 사랑이 생명진화를 이끌어왔고 역사를 진전시켰다. 생명진화와 역사의 목적도 사랑이다. 사랑 안에서 생명은 자라고 힘을 얻으며, 만물은 존재의 깊이를 드러낸다.

-박재순



행복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예수는 말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몸과 맘에 쓸 데 없는 욕심이 사라진 것을 뜻한다. 욕심이 사라져 맘이 비면, 하나님이 들어오실 것이고, 맘이 맑아지면,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을 보면 정말 행복하지 않겠는가? 

나도 근심, 걱정에 사로잡히고, 무엇이 되겠다거나 하겠다는 욕심에 차 있을 때는 마음에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나도 언젠가 죽을 텐데 다 이루지 못하고 하고 싶은 일이 있지만, 욕심을 비우고 나를 돌아보면 “행복하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 나서 예수를 알고 예수의 삶의 길을 마음에 품고 살았고, 어려운 때, 어려운 나라에서 살면서 좋은 선생님들을 만나고 가까이 하며, 살았고, 몸은 일그러졌으나 삶과 정신을 이만큼이라도 지켜서 하나님을 생각하며 살아왔으니, “참으로 행복하다.”

-박재순




1923년 일본관동대지진 참상의 가장 생생한 기록은 

1973년9월 씨알의 소리에 게재된 
함선생님의 글 "내가 격은 관동대진재"입니다. 

일본으로 떠나기 전,
이 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8월 9, 16, 23일 토요일 재단 계동사무실에서 
이 글을 읽는 독서회를 갖습니다. 
독서회 후 이번 순례의 오리엔테이션도 있습니다.





함선생님의 말씀입니다. 

"관동대지진의 핵심은 조선인 학살에 있습니다...
                                               ...결국 전체 조선이 학살된 것입니다"

" ...일본의 씨알과 한국의 씨알은 새 시대를 여는데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 저렴한 항공권 구매와 일본 현지 예약을 위하여 서둘러 주시기 바랍니다 >


   1) 기간 : 8월31일 ~ 9월1일(공식 추도일정 1박2일) 
                 귀국 항공권은 OPEN으로 행사 후 개별 연장여행 가능
    2) 비용 : 공식행사(1박2일)은 약 65~70만원 정도에 가능하도록 준비중
    3) 연락 : 함인숙(010-8727-4117) 또는 이창희(010-3524-7483)
    4) 추도행사는 씨순길과 일본 시민단체가 함께 진행합니다.
    5) 계획이 확정 되는대로 추후 상세한 설명과 함께 알리겠습니다.
    6) 참가자 희망자는 이번 씨순길 때 여권사본을 지참바랍니다.
   

< 이번 씨순길에는 ...셋 >


1921년 조만식의 후임으로 오산학교 교장으로 취임한 31세의 다석은 사제의 관계로 함석헌을 만납니다. 함석헌은 생일은 정월23일이었는데 이는 음력으로 양력생일을 알지 못했었습니다. 그때 다석은 산 날짜를 헤아리는 일과 일종식을 하고 있었는데 다석이 가르쳐 함석헌도 그리 해보니 양력생일이 다석과 같은 3월13일로 햇수로는 11년, 날로 해서는 4,017일 차이가 났습니다. 

다석은 교장으로 부임하고 일제교육당국으로부터 교장인준을 받지 못해 1년만에 집으로 돌아갑니다. 다석은 떠나며 함석헌에게 “내가 이번에 오산에 왔던 것은 자네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였던가봐” 하였습니다. 

다석은 51세 되던 1941년 2월17일부터 일일일식(一日一食)을 저녁에 했는데 호를 다석(多夕)이라 함은 세끼 식사를 합쳐서 저녁에 먹는다는 뜻이 있습니다.

해방 후 김흥호는 이십대 이미 대학 강단에 서던 때 그는 춘원 이광수의 소개로 처음 다석을 만났습니다. 공산정권을 피해 고향 평양에서 서울로 내려온 그는 춘원에게 “무엇을 배우더라도 다석이나 위당(爲堂 鄭寅譜)에게 배워라”라는 말을 듣고 다석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다석은 자신의 사망날짜를 정해 놓은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누가 ‘만일 그날 돌아가시지 않으면 어떻게 하시느냐’고 물었더니 ‘살림살이에 예산을 세우는 것처럼 그 날을 내 날로 알고 살아보자는 것이지 꼭 맞히고 못 맞히고가 문제될 것이 없지 않느냐’는 것이 다석의 대답이었습니다. 

65세 되던 1955년 그는 다음해 4월26일 자신의 사망 예정일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작별 강연을 여러 번 했습니다. 목요강좌라고 신문에도 내고해서 백여 명 청중이 모이기도 했습니다. 김흥호는 다석의 마지막 강의를 보존하기 위하여 한 1년 속기사에게 의뢰하여 1년치(1956.10.17~1957.9.13) 강의록을 기록하였습니다. 

언젠가 김흥호는 『대학』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다석에게 드렸습니다. 다음 『중용』을 번역하여 또 드리려고 다석을 찾았더니 그는 “이 글은 공자님이 번역하셨어도 이 이상은 할 수 없을 것 같군요...이것은 김군이 하기는 했지만 김군이 한 것이 아니요” 하였습니다. 

박영호는 6.25전쟁이 끝난 후 함석헌과 먼저 사제의 인연을 맺었고 1959년부터 다석의 강의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1965년 어느 날 다석은 그를 불러 이제 스승을 떠나 독립하라는 뜻으로 단사(斷辭)라는 말을 꺼냅니다. 다석을 떠난 그는 5년간 홀로 공부하며  『새 시대의 신앙』을 출간하기에 이릅니다. 그는 다석으로부터 “졸업증서-마침보람“이라는 엽서를 받았습니다.

예수가 하느님의 독생자인 것처럼, 다석의 제자들은 누구나 다석과 깊은 감화와 신뢰의 1:1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 이번 씨순길에는 ...둘 >

1890년 3월13일 남대문 수각다리 근처에서 태어난 다석은 13명의 형제자매 중에 맏이였습니다.그러나 모두 일찍 죽고 20세를 넘긴 사람은 다석과 아우 영철 뿐이었고 둘째 영묵은 19세로 다석이 스무살 되던 해 죽었습니다. 다석도 일곱 살 되던 해 콜레라로 거의 죽음에 이르렀으나 어머니 김완전이 혼신 다하여 항문을 막고 미음을 끓여 먹여 살려 냈습니다. 다석은 학문의 재능이 있어 문(文)과 이(理)이 뛰어 났으나 음악과 체육은 잘 하지 못했습니다. 미술에도 재능을 보였으나 노래는 잘 하지 못하여 15세 때 부터 5년동안 다닌 서울 연동교회에서도 그의 찬송가 소리는 없었습니다. 다만 지신이 지은 시에 음률을 붙여 노래하듯 읊었습니다. 다석은 체육은 못했지만 평생 요가와 냉수마찰, 걷기 등으로 몸성히 건강관리를 잘 하여 평생 병원을 찾는 일이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 이번 씨순길에는 ...하나 >

정양모신부의 "나는 다석을 이렇게 본다"의 다석연보에는 "(다석은) 1890년 3월13일 서울 남대문 수각다리 가까운 곳에서 아버지 류명근 柳明根 어머니 金完全 사이에서 태어나다"로 되어 있습니다. 수각교는 남대문 들어와 첫 다리입니다. 조선시대 청계천으로 흘러들던 지천은 거의 복개되어 지금은 흔적을 찾기 힙듭니다. 아마 남산에서 발원하여 시청부근에서 청계천과 합수하는 물을 건너기 위한 다리였던 것 같습니다. 이 다리에는 수각(水閣)이 있어 수각다리 또는 수각교라고 하였습니다. 지금의 주소로는 남대문로4가 1번지 부근 남대문시장 입구입니다. 

조선 정조 때 안조환(安肇煥)이 지은「만언사(萬言詞)」에는 다음과 같은 다리밟기 노래가 있습니다.

춘정월(春正月) 십오야(十五夜) 상원(上元)야 밝은 달에
장안시상(長安市上) 열두다리 다리마다 바람불어
옥호금준(玉壺金樽)은 다리다리 배반(杯盤)이요
적성가곡(積聲歌曲)은 다리다리 풍류(風流)로다
웃다리 아래다리 석은다리 헛다리 
철물(鐵物)다리 판자(板子)다리 두다리 돌아들어
중촌(中村)을 올라 광교(廣橋)다리 
굽은다리 수표(水標)다리
동대문 안 첫다리며 서대문 안 학다리요
남대문 안 수각다리 모든 다리 밟는 다리

다리밟기는 정월 대보름날밤 한양도성의 모든 남녀가 종루(鐘樓)에 모여 종소리를 듣고 청계천과 그지천의 열두 다리를 차례로 밟는 놀이였습니다.

1981년 2월3일 저녁 6시30분 구기동 자택에서 귀천하신 다석의 흔적은 말씀 이외 남아있는 것이 없습니다. 이번 순례는 누구의 기억에도 남아있지 않은 그의 탄생을 생각하며 걷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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