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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irit/e—cr—life

뜻으로 본 한국역사 - 함석헌

by e-bluespirit 2014. 10. 16.









    산을 옮기자 해서 산더러 여기서 일어나 저 바다 속으로 가거라 하고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요, 내가 나더러 옮겨 가라고 명령을 해야 옳은 일이다. 어디로 옮겨 가란 말인가? 하나님께로다. 믿음이란 하나님과 내가 하나됨이다. 내가 산 같은 나를 바다같이 무한한 하나님 속에 던져 하나가 돼버리면 산을 마음대로 하는 것쯤은 문제가 아니다. 믿으면(내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면) 된다(물건이 나와 하나 된다). 다 됐다. <함석헌 전집5: 서풍의 노래> 317쪽>     

- 함석헌





   맨 첨이고 참되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그리워함은 어쩔 수 없는 사람의 본성(本性)이다. 생각은 그리움에서 나온다. 그립고 그리워서 생각을 하게 된다. 이를 사람의 참 뜻이라고 하여 성의(誠意)라고 한다. 이 뜻은 꼭 이루어져야 한다. <다석 유영모 어록> 59쪽  

-유영모






    고난의 역사라니 고난 전에 또 무엇이 있고 고난 후에 또 무엇이 온다는 말이 아니다. 그저 고난의 역사가 스스로 나타났을 뿐이다. 제[自]가 곧 까닭[由]이다. 그러므로 자유(自由), 곧 스스로 함이다. 그러므로 고(苦)는 생명의 근본원리다. 고를 통해 자유에 이른다. 고를 면치 못할 것이요, 선을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려는 사람은 영원히 선을 보지 못할 것이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 22쪽

함석헌 





사람이 하나님 아버지를 그리워함은 막을 길이 없다.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둘이면서 하나이다.
부자불이(父子不二)
이것이 부자유친(父子有親)이라는 것이다. <다석 유영모 어록>, 20-21쪽

유영모





    이 20세기 문명의 인간이 종교요 철학이요 과학이요 하며 떠드는 것도 그 어떤 하나 초정신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것을 향하고 있는 것이리라. 우리말의 ‘한’ 혹은 '얼’이란 것도 그것을 그려보자고 그리는 한 그림(幻像, vision)이요, 그것을 맞혀보자고 던지는 한 돌 던짐인지도 모른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 28쪽

함석헌






씨알순례길... 남한산성


< 11월1일 남한산성 안내 >

일시 : 2014년 11월1일 아침 10시
장소 : 8호선 산성역 (2호선:잠실역/5호선:천호역 환승)

        
진행 :

산성역 -(버스)- 남한산성행궁 - 수어장대 - 서문 - 마천역

* 답사 후 상세한 안내 올리겠습니다 
* 점심은 하산길 마천역 가까운 곳에서 합니다.좀 늦을 것 같습니다(간식 준비)

< 이번 씨순길에는 ...>

고난의 역사, 이것이 함석헌의 역사관입니다. " 고난의 역사라니 고난 전에 또 무엇이 있고 고난 후에 또 무엇이 온다는 말이 아니다. 그저 고난의 역사가 스스로 나타났을 뿐이다. 제[自]가 곧 까닭[由]이다. 그러므로 자유(自由), 곧 스스로 함이다. 그러므로 고(苦)는 생명의 근본원리다. 고를 통해 자유에 이른다. 고를 면치 못할 것이요, 선을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려는 사람은 영원히 선을 보지 못할 것이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1965, 넷째판에 부치는 글> 22쪽

세계문화유산이기도한 남한산성은 우리 '고난의 역사'의 상징과도 같은 곳입니다. 1636년 12월8일 청의 홍타이지 군사는 조선군의 저항을 받지 않고 의주성에 입성합니다. 의주부윤 임경업은 적은 수의 병사로 많은 청군과 맞서기 위해 백마산성에서 농성(籠城)합니다. 성내 백성 씨알들에게 촛불을 들게하고 허수아비를 세워 허장성세합니다. 청군은 백마산성의 저항이 만만치 않자 군사를 돌려 빠른 속도로 남하하여 불과 일주일만에 한양에 들어 닥칩니다. 미쳐 강화로 피난한 조선임금 인조는 남한산성에 들어가 40일간 버티다가 청에게 항복합니다.

 "그리하여 임금 자신이 삼전도(三田渡)에 쌓아놓은 항단(降檀) 밑에 엎디어 여태껏 북로라고 업신여기던 만주 되놈 앞에서 그들의 풍속대로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하고, 임금과 나라를 위해 화친을 반대하였던 내 팔다리 같은 충신을 잡아 그들의 요구대로 그 손에 붙여 죽을 땅으로 보내지 않으면 안 디는 부끄럼을 당했으니, 이것이 타주지 않은 시대의 말의 뒷발로 차던지는 역사의 복수였다. 잡혀갔던 윤집.오달제.홍익한은 모두 만주에서 죽었으니, 이것이 유명한 삼학사(三學士)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 330쪽

중국대륙에 명.청 세력의 교체기에 제대로 국제정세를 읽지 못해 스스로 자초한 고난이었습니다. 연산군의 페위 명분은 "패륜"이었으나 광해군을 물러나게한 인조반정의 명분은 "부모의 나라 명을 배신하고 오랑케 후금과 화친하는 것"이었습니다.  매우 멍청한 일입니다. 참으로 얼이 빠진 일이었습니다. 당시 반정의 명분이 약했던 인조는 명 황제의 인준을 받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반정의 명분이 친명사대(親明事大)였으니 파국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병자호란 당시 계획은 강화도로 피난하는 것이어서 남한산성에는 식량과 물자 등 장기전의 준비가 되어 있지않아 임금조차 겨우 죽 한 그릇으로 하루 끼니를 이어가는 상황에 이르렀고 기근과 추위로 오래 버티리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임금이 그러했는데 일반백성 씨알들은 어떻겠습니까? 병자 호란 때 임경업의 백마전투 등 조선군의 승전으로 기록된 전투가 여럿 있었으나 의미 없는 우리 스스로의 위안일 뿐입니다.

< 10월 씨순길 보고>

10월4일 수원화성 보고

일시 : 2014년 10월4일 1호선 아침 10시
장소 : 수원역 6번출구 앞 관광안내소
        
진행 :

팔달문(10:20) - 화성행궁(10:50/해설 60분) - 서장대(12:30) - 화서문(13:-00/점심40분) - 장안문(14:00) - 화룡문(14:20) - 동장대(14:40) - 창룡문(15:50) - 남수문(15:20) - 팔달문(15:30)


수원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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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은 도로와 시장이 들어찬 팔달문 주변을 제외하고는 40여 개의 망루와 누각이 연이은 전모가 복원되어 있습니다. 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서쪽 팔달산(八達山/143m)에 걸쳐있고 동쪽으로 펼쳐진 평지에 쌓은 평산성(平山城)입니다. 

일제시대 조선문화 지우기 정책으로 행궁을 헐고 지어졌던 도립병원 등 건물들을 철거하고 1970년대 복원하여 행궁 오른편 신풍초등학교터만 남겨두고 거의 원형에 가깝게 재현되었습니다. 

아무리 원형에 가까운 복원물이라 할지라도 원래 유산이 아니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지 않는 것이 유엔의 원칙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조선시대 뛰어난 기록문화가 있었기에, “화성성역의궤”라는 고증 가능한 기록이 있었기에 유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수 있었습니다. 


장안문

수원화성의 정문인 장안문은 높이 13.5m, 너비 9m로 국보1호 한양도성 숭례문보다 더 큰, 우리나라 최대 성문입니다. 장안문의 윗부분은 둥근 무지개 모양으로 아름다운 단청의 2층 누각을 올렸고 수원화성의 다른 성문과 같이 바깥쪽에 벽돌로 반원형의 옹성(甕城)을 갖추고 있습니다. 한양도성의 성문은 동대문인 흥인지문만 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조 임금이 입성하는 첫 문으로 북쪽을 향해 서 있습니다. 


정조의 치세

“...마지막 부르짖음은 한국을 알자는 운동이다. 영-정 두임금 때는 문운(文運)이 성하기가 서종조 이래 처음이라 하는 시대로서, 제도에서, 산업에서, 학문에서 볼만한 것이 많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특별히 빛난 것은 학문의 연구요, 모든 연구 중에서도 더욱 의미 있는 것은 한국 연구가 성했던 것이다.“(뜻으로 본 한국역사 348쪽)

정조는 할아버지이며 선왕이 영조의 유지를 받들어 탕평을 하며 왕권을 강화합니다. 임금의 친위부대 장용영을 설치하였고 초계문신제를 통해 규장각의 인재를 육성했습니다. 수원화성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되었습니다.


정조의 꿈

정조의 꿈은  1)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예를 회복하고 왕으로 추존하는 것과 2) 왕권강화였습니다. 그러나 선왕이며 할아버지인 영조는 정조에게 엄명한 사도세자를 거론하지 말라는 뜻을 거스를 수 없어 아버지 세도세자의 복권을 아들 순조에게 미룰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정조는 부친의 고혼을 위로키 위해 양주 배봉산으로부터 유해를 수원 남쪽 화산으로 천봉하고 수원화성을 짓기 시작합니다.

화성건설 완공이 계획되었던 1804년는 세자 순조가 15세 되는 해입니다. 그 때가 되면 정조는 왕위에서 물러나 선왕 영조의 뜻 때문에 할 수 없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복권을 아들 순조로 하여금 이루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화성건설은 착공 2년만인 1796년 세워졌고 정조는 1800년 원인불명의 병으로 붕어합니다. 향년 49세로 세자 나이 불과 11세 때입니다. 정조의 꿈이 이뤄진 것은 조선말 1899년 고종 때로 1899년 사도세자는 장조로 추존되고 현륭원은 융릉으로 격상됩니다.

* 11월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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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산성의 늦가을 절저의 단풍길을 걷습니다.

11월1일(토) - 남한산성

남한산성 : 안창도씨알께서 길안내 합니다





사진설명 : 
화성행궁, 장안문 성곽길, 팔달문 순례 순서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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