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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irit/e—cr—life

날마다 세 가지로 내 몸을 살피라 日三省吾身

by e-bluespirit 2016. 2. 5.










증자가 말하기를, 날마다 세 가지로 내 몸을 살피라고 하였습니다.(日三省吾身). 몸을 살핀다 하면 머리나 손이나 발 같은 것을 살핀다는 것이 되겠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그렇단 말입니다. 우리가 '집을 살핀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 집을 지을 때 관여한 역사(役事)를 살핀다는 것이겠습니까? 이것을 갖고 집을 살핀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건축물인 집이 아니라, 건축이 다 되어 그 집에 사람들이 모여 살림을 하는 것이 그 집을 살피는 것이 됩니다. 건축물을 살핀다는 것보다는 그 건축물 안에 있는 식구를 살핀다는 말입니다. 식구들이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챙기고 추운가 더운가를 돌보는 것이 살피는 것입니다. 또 이것만 갖고는 집을 살핀다는 것이 안 됩니다. 식구들의 건강과 마음의 평안을 살펴야 하고, 더 나아가서 식구들의 심령(心靈) 상태가 어떠한가 역시 살펴야 합니다. 영원의 세계인 영혼과 연결이 되는지 안 되는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죄다 갖추고서야 집을 살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증자가의 일삼성오신(日三省吾身)에서 내 몸을 살핀다는 것은 몸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몸 속에 있는 정신을 살핀다는 것이 됩니다. 유교에서의 몸은 우리가 가족을 '집'이라고 하는 것과 똑같이 정신(精神)을 가리킵니다. 정신을 살핀다고 해서 몸을 돌보지 않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제 정신을 담는 몸이니 마음을 살피듯 몸을 살피고 잘 돌보는 것이 옳게 자기를 살피는 게 됩니다. 
아직 혼탁하고 이상한 세상에서는 증자가 말한 삼성오신(三省吾身)을 자기 몸을 세 번씩 돌아본다고 해석하여, 손이나 발이 더럽지 않나, 여자라면 어디 분이 밀린 곳은 없나, 눈썹이 잘못 그려지지는 않았나 하고 신경을 씁니다. 이것은 아직 증자의 말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껍데기만 갖고 사는 게 아닙니다. 금수와 같이 몸만 갖고 살면 편하겠는데, 사람은 그런 식으로는 편하게 되지 못합니다. 껍데기도 더럽지 않고 속의 마음도 어지간히 성해야만 살 수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다석강의>38~39쪽


 유영모  



2016년 병신년 첫 씨순길은 1월9일 둘째 토요일입니다.
씨순길을 마치고 재단사무실에서 신년하례식을 갖습니다.

< 2016년1월 첫 씨순길 안내 >

만남 : 2016년 1월9일(토) 10:00 
장소 : 신분당선 양재시민의숲역(매헌역) 5번출구

양재시민의숲역(10:00)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 양재시민의 숲 - 양재천 - 도곡역(12:00) - 안국역(12:40) - 재단사무실(12:50)/4Km


< 2016 첫 순례를 마치고...>

" 사람은 왜 사느냐 이상을 이루기 위하여 산다.
보라 물은 꽃을 피우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나도 이상의 꽃을 피우고 열매 맺기를 다짐하였다.

우리 청년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도 
더 한층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례에 바치는 뜨러운 사랑이다."

- 매헌 윤봉길 -


광복 70년, 지금 우리는 평화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매우 불안정한 평화입니다  아직 나라와 겨례의 통일을 이루지 못했고 핵무기 등 동족을 향한 대량살상의 화력이 강토 안에 쌓여가고 있습니다. 부모의 사랑 형제의 사랑 친구의 사랑 참으로 따듯하고 아련한 사랑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강하고 굳센 사랑도 필요합니다. 나라와 겨례를 위한 강의(剛毅)한 사랑. 우리는 그런 사랑을 잊고 삽니다.

< 2016 첫 씨순길을 걸으며...>

"아직은 우리가 힘이 약하여 외세의 지배를 면치 못하고 있지만 세계 대세에 의하여 나라의 독립은 머지않아 꼭 실현되리라 믿어마지 않으며, 대한 남아로서 할 일을 하고 미련 없어 떠나가오." 의사(義士)의 유언 중 말췌

매헌윤봉길(梅軒 尹奉吉)의사의 본명은 우의(禹儀)이며 봉길은 별명이다. 그는 3.1운동으로 다니던 학교를 자퇴하고(11세) 서당에서 수학했다. 함석헌선생이 그랬던 것처럼.  양재동 시민의 숲에 서있는 매헌기념관은 그의 유물과 독립운동 관련자료를 전시한 박물관이다. 그의 고향 예산 도중도에는 그를 기리는 사당 충의사와 사적으로 지정된 생가, 성장가 그리고 농민계몽활동을 하던 건물인 부흥원이 있다. 

1897년 고종은 아관파천에서 돌아와 대한제국을 선언하고 황제 제위에 등극하였으나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여 나라 이름이 다시 조선으로 되돌려졌다. '대한'이라는 국호는 일본의 침탈에 의해 다시 '조선'이 되었으나 조국광복으로 되찾았다. '대한'은 우리가 선포한 자주독립의 우리 이름이다.  3.1운동은 우리 씨알의 의식을 왕국신민(臣民)에서 민주국민으로 전환시킨 정체성 혁명이다. '민국(民國)'을 탄생시킨 성공한 혁명이다. 의사(義士)는  '대한'  남아의 할 일을 다하고 조국광복의 제단 위에 자신을 불태워 바쳤다. 오늘의 우리 대한민국 국민 모두 그에게 큰 빚을 졌다.



1월9일 씨순길 사진입니다. 매헌기념관 - 양재시민의숲 - 양재천, 마지막 사진은 재단 사무실에서의 2016 신년하례 시루떡 커팅















<소식지 씨알>을 계승하여 웹진을 발간합니다. 이름을 <e소식 씨알>이라 정했습니다. 애초 <미디어씨알>로 할까했었는데  '미디어'라는 꾸밈말이 가지고 있는 매체권력이라는 정치공학적 함의를 떠올리면 미디어씨알>은 우리 씨알운동의 격에 맞지 않고 자칫 오해를 불러올 생뚱스런 군더더기 같다는 판단으로 떼어내 버렸습니다. 단지 매체가 인쇄에서 디지털로 바뀌어 “소식지_“가 ”e소식_“으로 바뀐 것 뿐 입니다. 씨알운동은 어디까지나 시민영성운동이며 진리운동입니다. 정치이념에 오염되어서는 안 됩니다.

<소식지 씨알>은 씨알재단의 출범 이래 재단회원의 소통채널의 역할을 해 왔습니다. 월간(月刊)으로 출발해 격월(隔月)로 또다시 계간(季刊)으로 발간주기를 늘였지만 휴간과 복간을 반복하다가 결국 마지막 휴간한지 1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모든 것을 재능기부와 자원봉사에 의존한 발간이기에 지속성을 유지하기가 그만큼 힘들었던 것입니다.

<e소식 씨알>이 <소식지 씨알>의 역할과 기능을 승계하여 다시 출발합니다. <e소식 씨알>은 이메일과 포탈 카페라는 디지털 미디어에 기반하여 출발합니다. 이 역시 재단회원의 자발적 재능기부와 자원봉사에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e소식 씨알>은 일인(一人)의 헌신으로도 유지가 가능하므로 <소식지 씨알>과 같은 휴간과 복간이 반복되는 사태는 어느 정도 배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날로그 인쇄매체처럼 많은 인적 재정적 자원의 투입 없이도 지속적인 발간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e소식 씨알>의 출발은 작고 조용합니다. 일인(一人) 작업하여 우선 씨알재단의 내부 소통을 목적으로 출발합니다. <e소식 씨알>은 ‘씨알사상’이라는 향을 싸는 향종이(香包紙)입니다. 아무리 내부 소통이라 하여 향을 꼭꼭 쌌더라도 그 향은 천만리(千萬里) 전달될 것입니다. <e소식 씨알>은 그 출발이 작고 조용하더라도 시대의 예언자 역할을 해야 합니다. ‘예언자 역할‘ 그것은 <e소식 씨알>이 품고 있는 씨눈(胚芽)입니다. 그 씨눈을 티우고 키우고 피우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천명일 것입니다.


씨알의 역사는 치민(治民)에서 훈민(訓民) 목민(牧民)으로, 훈민(訓民) 목민(牧民)에서 민주(民主)시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일제강점과 독재시대의 압민(壓民)을 겪기도 했습니다. 아직 북녘에는 참혹한 압민(壓民)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또한 지금 우리나라도 민주주의가 아직 계몽주의에 머물러 있습니다. 계몽(啓蒙)이란 몽매하고 어리석은 사람을 가르쳐서 깨우치게 한다는 뜻입니다. 씨알을 어리석다하면 민주주의를 할 수 없습니다.

다석은 “씨알어뵘”을 말했습니다. 씨알(民)을 어버이처럼 뵙는다는 뜻입니다. 계몽주의 춘원(春園)이 <민족개조론 民族改造論>에서 나라의 독립보다 민족성 개조가 먼저라고 했을 때 다석(多夕)은 대학삼강(大學三綱)의 "在親民"을 "씨알어뵘"으로 풀이했습니다. 씨알을 가르칠 것이 아니라 씨알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씨알이 곧 어버이이며 스승입니다.

현대는 분열과 갈등의 시대입니다. 증오와 폭력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사회 곳곳에서 날카로운 금속성 파열음이 들립니다. 그래서 상생과 화합, 관용과 평화를 외치는 백가(百家)의 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소리는 공허할 뿐입니다. 왜 그럴까요? 어느 한쪽에 치우쳐 있기 때문입니다. 편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독선의 공염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는 관용과 상생이 없습니다. 화합과 평화가 없습니다. 

누군가 분열과 갈등의 제삼지대(第三地帶)에 서서 중재해야합니다. 높고 먼 하느님의 자리에서 문제점을 헤아려야 합니다. 그것이 너무 높고 멀다면 적어도 분열과 갈등의 중립지대, 경계역(境界域)에 서서 공정하게 두루 보고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다원주의적인 관용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생각이나 의견이나 이념이나 말씀의 다양성이 담보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수평주의 원칙이 지켜져야 합니다. 수직으로 매이고 종속되어서는 참 소리가 나 올 수 없습니다. <e소식지 씨알>이 기꺼이 분열과 갈등의 제삼지대(第三地帶)에 서겠습니다.

<e소식지 씨알>은 다양하고 다원적인 생각의 지평을 넓은 마당 위에 펼쳐 나가려합니다. <e소식지 씨알>은 시민영성운동으로 우리 사회의 분열과 갈등과 폭력의 과잉된 부분은 깎아내고 사랑과 화합, 영성과 진리의 결핍된 부분은 채워 넣어 씨알어뵘의 시대를 열어야 합니다. (얼줄)

" 적어도 생각하는 이는 높고 멀고 큰 것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 머리보다 더 높고 멀고 큰 것을 생각해야 한다. 이 상대세계에서 솟아나가야만 산다는 뜻이 우리에게는 줄곧 있다. 이게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다. 그런데 간다고 해야 알아듣기가 쉽다. 참나가 예서(상대) 계로(절대) 가고 있다. 차(車)는 벌써 탔고 예서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석어록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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