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Life/e—intro—intercolumn

칼럼소개 특 6 호> "도덕의 저편, 깨달음에로"

by e-bluespirit 2001. 6. 26.
옛글입니다.


=============================
<제258호> 하느님과의 약속


살아 오면서, 혼자의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어려운 상황에서 초자연적인 힘을 갈구하는 경험을 누구나 한 두번씩 한다고 생각된다.

나 혼자 무엇이든지 다 해낼것 같은 기분으로 살다가 어느 순간 자신이 무력함을 인정하게 되고,

하느님이나 부처님의 힘을 빌리고자 하는 생각을 진지하게 반추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있었다.

사실 정말 나는 그런 경험을 하고 하느님 이 고비만 무사히 넘기면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을 무엇이든지 하겠다는 등의 독백을 했으며,

그러면서도 하느님과의 약속을 차일피일하면서 지내고 있지 않은가 하는 자책을 종종 한다.

이런 이야기를 나의 친구에게 말을 하니까, 그때 내가 불러 본 하느님이 과연 어떤 하느님인지 불명하지 않은가 하는 반문을 받은 적이 있다.

즉 막연히 우리가 부르는 하느님, 어떤 특정 종교의 하느님, 다 다른 것이 아닌가?

그런데 내가 불러 본 하느님은 어떤 하느님인가?

그런 반문을 받고 사실 그 말이 옳은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하느님이 어떤 하느님이든, 내가 그당시에 진지하게 찾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사연인즉, 옛날에 바다낚시에 빠져 있을 때의 이야기 이다.

남해 미조 앞 바다에 떠 있는 작은 여에서 밤낚시를 할 때였는데, 큰 너울파도가 있다는 것을 눈치채긴 했으나 크게 걱정하지 않고 그 여에 장비를 풀었다.

그러나 날이 어두워지면서 큰 파도가 몇분 간격으로 그 섬을 치기 시작하였다.

그 섬은 만조일 때는 섬의 높이가 50cm 정도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약간 큰 파도는 간단히 그 섬을 뒤 덮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장비를 단단히 약간 높은 곳에 묶어 놓았지만, 몇번씩 휩쓸려 바다속으로 들어 가는 것이었다.

장비가 문제가 아니었다. 사람이 밀려 들어 갈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약간 다행스러웠던 것은 그 섬의 주변에 수많은 여가 발달 되어있어서 파도가 이 섬을 칠 때에는 세력이 약해져 있다는 사실만이 다행스런 것이었다.

그 때 까지 물속에서 어려운 시련을 당한적이 한 두번 있었지만, 이번에는 느낌이 심각했다.

첫째 한 여섯시간 정도는 그렇게 버텨내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간조로 돌아 서면서 섬의 높이는 3m 50cm정도로 변하기때문에 살 수 있다는 기대를 하면서 문제는 6 시간이었다.

그때 이상하게도 물에 휩쓸려 죽을 것 같은 생각은 없었다. 왜냐하면 구명조끼를 착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물에 휩쓸리면 여수 앞 바다로 밀려 갈 것은 예상이 되었다.

그 섬에 같이 내린 내 친구는 바다낚시의 달인이라 할 수 있는 경험을 쌓아 온 친구인데, 이미 섬에 내리면서 우려를 나타내었었는데,

내가 2주전에 비슷한 물때였는데 아무 탈없이 그 섬에서 밤을 보내었다는 사실하나만을 강조해서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그 섬에서 밤을 보내기도 했엇던 것이다.

그러나 사태가 이렇게 되니, 둘다 서로 대화도 없이 마음속에는 후회도 하고 그 친구는 나를 원망하기도 했을 거지만,

현실에 닥친 문제 즉 무사히 살아 남는 문제가 더 급했기 때문에, 몇 시간이고 다른 사람이 또 있다는 것도 의식함이 없이 시간을 보내엇던 것 같다.

그때 간사하게도 평소에는 찾지 않던 하느님이 나의 의식을 지배하기 시작했었다.

그런데 염치없게도 주제넘게도 나의 무사함을 기원하기 시작하엿다.

너무나 급박한 처지였기에, 지금 생각해도 되풀이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지만, 어떻든 그런 상황에서, 어떤 사람이 나를 이 처지에서 구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하느님을 불렀던 것 같다.

그런데 정말 그 고비를 잘 넘기고 새벽 2시경에 위험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직도 특정 종교의 하느님은 받아 들이지 못 하고 있지만, 하느님, 사실 분명히 규정할 수도 없는 존재이긴 하지만,

내가 불러 본 그 하느님은 현재까지 나는 나의 마음속에서 자리 잡고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제259호> 하느님과의 약속(2)


미조 앞 바다에서 경험한 것을 며칠 후, 우리 집에서 아이들과 식사를 하면서, 사실적 보고 형식으로 경험담을 늘어 놓았었다.

아이들은 그냥 듣기만 했었다.

그리고 한달 후쯤 전라남도 완도항에서 배를 타고 1시간 30분이상을 달려 내려간 곳에 있는 불근도라는 섬에 2박 3일 코스로 낚시를 하러 갔었다.

원래 이런 곳에 갈 때에는 하루를 현지에서 자야하기 때문에 개인 출조를 허락하지 않는다.

적어도 두 사람이 팀을 만들어서 가는 것이 규칙이어서, 참가한다는 사실을 낚시점에 알리면서, 혼자 가야 함을 분명히 했었고, 책임자도 혼자인 나를 다른 팀에 합류시키려는 계획으로, 허락을 한 것이었고, 그래서 그날 같이 따라 가게되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떤 두 사람이 한 조인 팀에 합류하여 현지에 내렸었다. 그러나 그 두사람은 그 곳이 포인트로서 적합치 않다고 생각하고, 우리를 실어다 준 선박이 둘러 보러 왔을 때, 다른 곳으로 가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낮을 즐겁게 낚시를 하면서 보내었다.

그런데 차츰 나는 30만평 이상되는 그 섬이 무인도라는 것 그리고 그 당시 낚시하고 있는 사람이 나 혼자라는 것을 알게 되어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평소에 혼자있는 것의 무서움이라든가 하는 것을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섬의 봉우리에서 울려오는 섬새들의 처량한 울음 소리라든가, 바람소리등등이 들리면서, 뭔가 섬 전체가 그냥 바위이고 나무가 아니고 뭔가 살아 있는 어떤 생물체 같은 느낌도 들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야릇한 두려움 같은 것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었다.

그래서 해가 지기 무섭게 밤낚시고 뭐고, 텐트를 치고 그 안에 들어가서 잠을 청하기로 했었다.

그런데 오히려 문제는 그때부터 더 심각하게 되었다.

나는 텐트안에 갇쳐있고, 내가 어떤 사람들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망상 같은 것에 시달리면서,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멀리서부터 차츰 가까이 다가 오는 것 같은 환청 같은 것도 일어 나기 시작했었다.

그러면서 4주전에 하느님과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아서 내 한테 시련을 주는가 하면서 다시 하느님을 마음속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런 환청과 망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선 잠을 자야 될 것 같았다.

그래서 편안하게 잠을 자게 해 달라고 청했던 것 같다. 정말 신기하게도 나는 모든 것을 다 잊고 잠이 들었다.

그리고 몇 시간을 잤는지 눈을 뜨니 밖이 훤한 것 같아서 날이 벌써 새었나 하고 밖으로 나와 보니, 보름달이 중천에 떠 있지 않은가? 밤 1시경이었다.

정말 난감한 심정이었다. 그래서 낚시 도구를 펴서, 낚시를 하기 시작했었다.

그런데 그 날은 다행히 파도는 없엇지만, 물안개가 섬 주변을 둘러 싸고 있고, 바다 속에는 각종 형광 물질이 섬을 둘러 싸고 있었다.

마음에 여유가 있었다면, 정말 그렇게 아름다운 광경도 없었을 것이지만,

아직 혼자 이 섬에 있다는 두려움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저녁때처럼 되고 있었다.

그런데 밤이 되면서, 새들이 전부 조용해지고 밤공기도 부드럽고, 바람도 거의 없어지면서 소리가 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눈에 보이는 물안개와 바다의 파도에 따라 움직이는 형광물질의 난무가 나를 괴롭히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낚시를 포기하고 다시 텐트안으로 들어 오고 말았다. 그래서 저녁때 처럼 염치없이 하느님에게 또 나의 무사 안전을 빌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잠이 들고 눈을 떴을 때, 새벽 4시 반이었지만, 아침의 조짐이 동쪽에 불그스레 보이는 것 같고 해서 안심하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 오는 길에 그 섬에 내 혼자 밤을 새웠다고 말하니까 낚시꾼들이 전부 놀라는 눈치였다.

그래서 알게 된 거였지만, 그런 경우는 낚시하는 사람들의 금기사항의 하나였던 것이었다.

환청, 환각등이 바다의 신비한 변화속에 인간에게 자주 일어 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말 인간은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체험을 통해 알게 되었으며, 남해미조에서 하느님과의 약속을 했음을 말하고 나서 지키지 않은 상태에서, 또 이 이야기를 우리집 아이들앞에서 흡사 무용담처럼 늘어 놓았다.

그런데 그때 중학교 3학년 정도였던 우리집 아이가 한 마디 거들었다.

"아버지, 하느님을 놀려 먹으면 안됩니다."

지금도 이 말은 잊지 못하고 있다. 아들이 아버지를 가르친 것이었다.

그 후,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는 좀 더 친근한 것으로 되어왔다.

그러나 여전히 남이 보기에는 별 변화가 없는 그대로일 것이지만.


도덕의 저편, 깨달음에로


 
 
 
07/12 틈 메우기 27


틈 메우기  2001년 07월 11일  



틈이란 말을 우리가 쓸 기회가 많지 않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 보면 틈이란 말이 우리의 깊숙히 침투한 어떤 특징을 가리킬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생물로서의 신진대사란 소모와 공급의 과정이다.

소모된 부분을 메우려는 끊임없는 작용이 우리의 몸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생물들이 지향하고 있는 homeo-stasis의 법칙으로 부터 해방될 수 없다.

그것이 파괴되면 생물의 기능이 장애를 받고 생물로서의 자격을 박탈 당 한다.

우리는 욕구를 가진다. 그것은 그 욕구의 대상이 나에게 없든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식욕도 적당히 포만되면 더 이상의 식욕를 갖지 않는다.

정신적인 차원에서 보더라도 이상과 현실의 격차 즉 틈이 우리를 불만족케 하고,

그 결과 그틈을 메우려는 노력이 시작된다. 즉 이상을 실현하려는 노력이 일어나는 것이다.

인간행위의 동기는 대개 이런 메카니즘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 같다.

생물학적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현실적 조건의 불만족은 이상적 상태의 가상적 설정과 관련되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 불만족이 많은 사람은 바로 이상적 상태가 너무 커창하게 그려진 것과 관련이 있고,

같은 조건의 사람인데도 별로 큰 불만이 없는 사람은,

이상적 수준이 적당히, 낮게 설정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어느 쪽이 더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삶을 자기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과 연결되는 것이다.

모든 것에 만족하면서 사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와 비슷한 사람을 우리가 꼭 부러워하지는 않는다.

왜냐면, 그는 아주 형편없는 수준에 만족하기 때문이다.

그를 나무랄 수는 없지만, 부러워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삶을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현명한지는 한 마디로 말할 수는 없지만,

꿈이 큰 것은 좋지만, 그것을 감당할만한 능력과 자질이 없는 데도,

그것에 매달려 일평생 살아 간다면, 우리는 그를 부러워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문제에도 中庸之道가 나서야 할 곳인 것 같다.

그런데 모든 것에 만족하는 모습을 젊을 때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나이가 든 사람들은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겪은 일들을 생각하면서,

욕구에 치중하기 보다는 모든 것을 수용하려는 자세를 자연히 갖게 된다.

젊은 이들은 그것을 늙은 이들의 패배의식이라고 지적할 수도 있겠지만,

늙은 이들의 인생의 지혜라 할 수도 있다.

더 이상의 시간이 남아 있지 않으니까 불확실한 것에 시달리기 보다는,

모든 것을 운명처럼 받아 들이는 것을 택하게 된다.

죽음의 순간도 모든 현실적 조건들을 다 받아 들이지 않으면,

이 세상을 하직하면서 불만족스럽고 남겨 논 모든 것이 안타까울 뿐이라면,

그는 분명 불행한 삶을 살아 온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을 하면서 어떤 희곡이 생각난다.

꼭 같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틈에 관한 어떤 메시지가 있는 것같다.

다름 아닌 Ionesco의 70년대 말의 작품인 "Gap",즉 "틈"이란 단막인데,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대학자가 여든 고개를 내다 보면서, 자기가 살아 온 삶을 회상하면서,

하나 하나 그 과정을 검토하다가 자신의 학력에 틈이 있음을 발견한다.

즉 대학졸업시험을 치면서 몇개의 과목이 과락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 당시에 그가 진학할 수 있었던 것은 졸업예정자의 자격으로 우선 대학원에 진학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차후에 정식으로 졸업하였다는 증명서가 첨부되어서 입학이 확정되어야 하는데,

그런 과정이 누락되어 그는 자신이 과락인 줄도 모르고 계속 학문의 길에 정진하여서,

그 당대의 최고의 석학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때 그는 그런 틈을 자기에게는 치욕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중대한 결심을 한다.

다시 그 시험을 치르려한 것이다.

이에 대해 후배들이 말리기도 했지만, 고집을 부렸다.

그 시험의 결과 또 한 과목이 과락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까지 누렸던 학자로서의 자격 그자체 까지 의심을 받아서,

주변의 친구들까지 그를 비난하는 사태로 발전하게   되는 이야기였다.

Ionesco가 이 드라마를 통해 무엇을 전달하려고 했었는가?

나의 생각으로는 우선 우리 사회의 기득권의 엘리트들이 과연 내실적으로 충분한 자격을 갖고 있는 것인가?

하는 반문이었다고 생각된다.

미국의 어떤 대학에서 교수들  자신이 출제한 문제를 스스로 답안지를 작성해 보니,

학생들의 성적보다 더 나을게 없었다는 가십을 읽은 적이 있다.

누군가가 교수가 되기 위해서는 적당한 형식적 절차를 거치면 가능하다.

교수자격을 얻은 사람은 학생에게 강의를 해야 하고, 할 수 있다.

학생은 그것을 듣고 시험을 쳐야 한다는 의무를 갖는등의 형식적 조건들이 지배하게 된다.

과연 교수가 학생에게 가르칠 만한 내용을 가졌느냐 하는 의문을 가진 적이 있었다.

Ionesco는 이 틈을 사회의 부끄러운 것이 내재한 곳이라 생각한 것 같다.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되기 위해 틈을 메우려는 노력은,

결국 자기의 함정을 파는 것이 될 것이라는 경고속에는 비극적 단서가 보인다.

이것이 Ionesco의 해학이다.

틈이란 과연 인간에게 무엇인가? 끊임없이 틈을 메우려는 노력을 포기할 수도 없고,

그러나 그 때 그때 그렇게 해가면서 틈이 메워진 처럼 믿어 버릴 수 밖에 없는 것인가?

========================
---이글 내용에 대해서 새로운 보충을 합니다---


07/11  "틈은 무시해도 좋은가?"  


우리의 삶의 과정은 한 단계 한단계 완벽하게 겪으면서 올라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제도를 예를 들면, 정규적인  교육체계인 초중등학교의 과정을 밟지 않고, 검정고시를 치르고 학력을 인정받아서 대학에 들어갈 수도 있음을 안다.

그렇다고 대학에 들어가는데 어떠한 하자나 불리한 대접을 받지도 않는다.

모든 일에는 그 일을 시작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을 갖추면 된 것이다.

물론 내용적으로 똑 같은 능력과 경험을 가질 수는 없지만, 그 부족한 부분은 스스로 메워가면 되는 것이다.

물론 완벽하게 메꾸어낼 수도  없고, 꼭 그러해야 하는 것도 아닌 것이다.

학교가 다 단계별로 배워야 할 것이 있지만, 상급학교에 가기 위한 자격을 갖추기 위한 조건으로서의 역할만을 기대한다고 나쁠 것도 없다.

중학교 교과과정의 내용을 그 나이에 배워야 하고 거쳐야 할 것들에 관해서 정한 것은 일종의 가상적인 전제나 학문적인 이론 혹은 실천적 변용등을 감안하여 가설적으로 정한 것일 뿐이다.

완벽하게 준비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진급자격만을 중요시 한다고 크게 나무랄 일은 아닐 것 같다.

교육체계와 관련하여서 완벽한 진행에 대한 지나친 요구란, 일종의 결벽주의적인 발상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냥 최소한의 필요한 자격만으로는 완벽한 자격에 모자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다음단계를 위해 충분한 것이다.

그런 방향으로 이오네스코의 갶에 대한 해석의 실마리를 잡아 보았다.

그가 대학졸업자격도 얻지 못한 상태에서 그 다음 단계로 진행하게 된 것이 제도적인 결함인지 담당자의 의무소홀이었는지 모르지만,

현실적으로 볼 때, 수십년이 지난 상태에서 그 원초적인 장면으로 소급하여서 바로 잡으려는 것은 의도는 나무랄 때가 없지만,

모든 것이 환원되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시험을 패스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을 통해서 학자로서 지금까지 남긴 업적을 무화시키지는 못할 것이고,

또한 그 다음단계의 대학원 졸업의 무효가 가능한지는,  법적으로 따져가야 할 문제가 될 것이다.

학자로서 인간적으로 그가 쌓아 온 것이 하나도 손상을 입지는 않을 것 같다.

그것으로 만족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08/09 비어있는 틈이 있어 답답하지 않음을 8




비어있는 틈이 있어 답답하지 않음을

(2001년 4월 경기도 현리)

칼럼 "느낌의 이삭줍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