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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e—intro—intercolumn

칼럼소개 특 12 호> "블랙 엘크의 전언"

by e-bluespirit 2001. 6. 29.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

Guernica. 1937.(7.77m×3.49m)

소피아왕비 미술센터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詩) 중에는 '악마와 천사'라는 것이 있다. 꽤나 길고 상징적인 내용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서, 나는 그 시 자체에는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었더랬다. 그런데 그 지루하기 그지없는 시가 끝나고 다음 장으로 페이지를 넘겼을 때, 나는 시보다 더욱 흥미로운 그의 노트를 발견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노트 : 이제는 악마가 된 이 천사는 나의 특별히 친근한 동무이다. 우리는 지옥적이거나 악마적인 의미에서의 성서를 자주 함께 읽었다.
(Note : This Angel, who is now become a Devil, is my particular friend. we often read the Bible together in its infernal or diabolical sense.)


이 시가 수록되어 있는 시집은 '민음사'에서 출간한 <천국과 지옥의 결혼>이다. 이 시집을 사러갔을 당시, 나는 오히려 랭보의 번역시집중에 완역본이 혹여 있을까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였다. 그러던 중에 우연히 이 시집의 제목을 발견하고는 나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이 시집을 집어들었다. 제목만으로 그 내용을 마음대로 상상했던 탓이다. 그만큼 '천국과 지옥의 결혼'이라는 어구(語句)는 나에게 매우 신선하고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나는 지금부터 그 제목이 무엇 때문에 나에게 신선하고 충격적으로 다가왔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노력해볼 생각이다. 그리고 어쩌면 나는 서두를 시작함으로써 이미 그 모든 설명을 끝내버렸는지도 모른다. 처음 이 시집을 살 당시의 나조차도 궁금해했던 그 이유를 '악마와 천사'라는 시에 부기된 저 블레이크의 노트가 해명해주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자, 이젠 조금 더 압축시켜보자. 나는 저 노트에서 가장 화려하고 매혹적으로 빛나고 있는 어구는 다름 아닌 '지옥적이거나 악마적인 의미에서의 성서'라고 느끼고 있다. 왜냐하면, 우선은 가장 성스럽고 아름답고 고귀한 의미를 담지하고 있다는 '성서'라는 낱말에 '지옥적이거나 악마적인'이라는 모순적인 형용어구가 붙어 있기 때문이고, 나아가 그러한 모순적인 (일견 신성모독적인) 형용이 자아내고 있는 저 깊숙한 '울림' 때문이다.


나는 이상하게도 저 모순형용을 납득하고 있다. 그것은 어린 시절 오랫동안 기독교인이었던 나 개인적인 경험에서 기인하기도 하는데, 솔직히 말해서 '성경'이란 읽으면 읽을수록 두려움과 경이로움으로 가득차게 만든다는 느낌을 아직까지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좀더 단순하게 축약시켜 말한다면 나는 이것을 '지옥에 대한, 혹은 악마에 대한 공포'라고 부르겠다.


확, 실, 히 성경은 인간에게 '경외심'을 가지게 만드는 도구이다. 성경은 결코 이 세계의 열락과 쾌락과 기쁨을 이야기하거나 노래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속에 그려지고 있는 이 세계는 범죄와 불경스러움과 고통과 분노로 가득찬 세계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속성을 지니고 있는 세계는 언젠가 신의 분노로 인하여 멸망당할 것이며, 신의 손길에 의해 재창조될 운명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성경'이 전하는 복음은 과연 '축복의 메시지'인가 '파괴의 전언(혹은 서곡)'인가? 혹은 둘 다가 아닌가?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속성을 지닌 글이란 비단 성경 뿐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매우 주관적인 견해를 여기에 덧붙이자면, 나는 역사적으로 유수한 '명작'으로 꼽히는 글들 (그것이 '시'이건 '소설'이건 간에)은 많은 경우 이렇게 '명백하게 모순적인, 그러나 그럼으로써 너무나 사실적이고 공포스럽고, 그 와중에 아름다운' 이미지와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고 생각이 된다.


그러고 보니 (과연!) 열락과 고통이 함께 공존하는 이 세계야말로 그 자체로서 '천국과 지옥의 결혼'이 아니던가!!


탄생과 소멸, 웃음과 눈물, 사랑과 증오, 끊임없는 애정과 무관심에 이르기까지 이 세계의 복마전은 끊임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작은 일 하나에도 일희일비하며 하루하루, 매 순간 순간을 살아가고 있다. 아아... 그렇다. 어쩌면 '종교'란(더불어 '종교적 속성'이란) 그런 인간과 인간이 둘러싸인 조건에 있어 불가피할지도 모른다.



어느 날 내가 쇼펜하우어의 "인간의 삶은 부분적으로 볼 때는 희극이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는 비극이다"라는 말을 인용하자, 친구가 나에게 물었다. 너는 인간은 결국 비극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느냐고. 당시에 내가 뭐라고 둘러댔는지는 사실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나는 그 친구의 질문에 이후에도 한참을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죽음'이라는 결과에 대해서 '비극적인 일'로 인식한다면, 인간의 삶이란 결과적으로 '비극적'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실제로 '삶'과 '죽음'이란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등을 맞대고 서있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욱 타당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삶'은 삶일 뿐, 죽음과 연결되어 있다고 해서 그 어느 것에 어느 하나가 소급되거나 흡수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나는 '죽음'을 배제한 채 '삶'만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자니, 삶 역시도 그 자체로 행복하고 즐겁기만 한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불행하고 고통스럽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결국 비유하자면 "현실은 미래로 충만해있다"는 라이프니츠의 단선적 진보에 대한 믿음이나, "현실은 끊임없는 과거의 반복일 뿐"이라는 식의 플라톤의 순환론적 역사관이나 그 어느 것이 옳고 그르냐고 싸워봐야 결론이 나지 않을 것임이 자명한 것처럼, 삶도 그것이 결과적으로 '비극적'이냐 '희극적'이냐를 가지고 싸우는 것은 별로 의미 없는 일일지 모른다.


쇼펜하우어의 비극적 세계관에 맞서, 비슷한 뿌리를 지니고 있었던 니체의 철학은 '디오니소스적 삶의 열정'으로 가득차 있었던 것처럼, 이 세계는 언제나 '희극'과 '비극'이 투쟁을 벌여왔으며, 이는 또한 '부부싸움'처럼 그 어떤 싸움보다 심각하고, 진지하고, 끝이 없으며, 결과도 없었다.


'천국과 지옥의 결혼'. 이 세계는, 그리고 우리의 삶은 역시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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