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리산문의 개산조사 적인혜철의 부도(2)
동리산문의 개산조인 혜철은 풍수지리에 풍부한 지식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런 분이었기 때문이었을까? 고려의 태조 왕건에게 "도선비기"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져 사극속에서 끊임없이 이름이 등장하게 되는 도선대사가 적인혜철 스님의 제자이었다는 것은 혜철이 선승으로써의 일면과 함께 풍수에 관하여도 어느 정도 큰그릇이었는가를 간접적으로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당나라 유학 후에 그의 사상을 펼쳐나갈 산문자리를 찾던 중 동리산을 발견하고는 "수많은 봉우리, 맑은 물줄기가 그윽하고 깊으며 길은 멀리 아득하여 세속의 무리들이 오는 경우가 드물어 승려들이 머물기에 고요하다. 용이 깃 들고 독충과 뱀이 없으며,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곳"이라고 했다는 말이 전하고 있다.
이런 태안사 이기에 스치는 바람 한 줌 녹음을 뚫고 쏟아져 내리는 실 날 같은 햇살 한 가닥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능파각에서 일주문까지 오르는 길은 또 얼마나 시원하고 그윽한가? 이 모든 것을 보면서 작은 것 하나에도 소홀히 지나침 없이 사찰을 설계했을 심오했던 적인선사의 안목이 가슴깊이 맺혀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현대의 시대를 이야기할 때 눈부신 과학의 발전을 이야기하곤 하지만 세분화되고 전문화되는 과정에서 상실되어 가는 인간의 감성과 총체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현대인이 되어감을 우리는 또 부인하지 못하는 것이다. 적인혜철의 구상과 행적에서 하나에 치우치지 않는 삶을 살았던 구도자의 삶을 되돌아 볼 수 있다는 것과 어찌 보면 이런 스스로의 자문자답 자체로도 우리에게 주고자했던 한 선승의 삶으로써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보여진다.
다포계집의 화려함이 돋보이는 일주문의 우측에는 태안사를 거쳐갔던 고승들의 부도와 부도비가 가지런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그 중에는 태안사를 크게 중창한 분으로 알려진 광자 윤다의 부도(보물 제274호)와 부도비(보물 제 275호)가 있는데, 그 형태나 느낌이 적인 혜철의 부도를 너무나 쏙 빼어 닮았다.
적인혜철의 부도를 보기 전에는 듬직하면서도 잘 정돈된 비례감이 느껴지는 광자대사의 부도가 어찌나 아름다웠던지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하기도 하였다. 적인혜철의 부도가 있는 태안사가 아니었고, 다른 곳에 있었다면 광자대사의 부도 역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찾았을 것이지만 적인혜철의 부도에 가려 빛을 못 보는 것은 창조적 정신의 바탕아래 수 없이 많은 손길들이 배여 있는 진품과 그것을 모방하여 만든 모조품과의 차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이런 차이도 이분들의 삶과 비교할 때 아주 하잘 것이 없으렴만 문화유적에 투영된 모습으로 보고자하는 내가 너무 죄송할 뿐이다.
이렇듯 닮은꼴의 부도가 한 사찰 내에 있는 예는 이곳 태안사 말고도 다른 곳에서도 발견이 되곤 한다.
가까운 연곡사의 동부도와 북부도, 그리고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 홍척의 응료탑과 수철화상의 능가보월탑, 여주 고달사지의 고달사지부도와 원종대사 혜진탑, 문경봉암사의 지증대사부도와 정진대사의 부도등이 닮은꼴 부도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예가 나타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지지만 그중 가장 내세우는 것은 구산선문 이후의 법통를 중요시하는 전통 때문일 것이다.
태안사는 동리산 영봉이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앉은 끝자락에 한적한 사찰의 모습으로 우리앞에 다가선다.
남향한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측 약간 높은 곳에 적인 혜철의 부도가 모셔져 있고 남쪽 강당 뒤로 푸른색 이끼가 녹색의 물빛으로 상큼한 눈 맛을 주고 있는 연못이 아름다운 곳이다.
동리산문의 중심사찰이면서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머무는 태안사는 사찰의 배치나 놓여진 모습에서 전혀 위엄과 권위가 느껴지지 않는 곳이다.
모든 것을 그저 소박한 눈으로 보게하고 무소유의 가치를 일깨워주는 구조, 이것이 또 하나 적인선사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인 것 같아 그저 엷은 미소만이 눈가에 가득할 뿐이다.
3편에서 계속....
구영이의 기차로 떠나는 문화유적답사
동리산문의 개산조인 혜철은 풍수지리에 풍부한 지식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런 분이었기 때문이었을까? 고려의 태조 왕건에게 "도선비기"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져 사극속에서 끊임없이 이름이 등장하게 되는 도선대사가 적인혜철 스님의 제자이었다는 것은 혜철이 선승으로써의 일면과 함께 풍수에 관하여도 어느 정도 큰그릇이었는가를 간접적으로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당나라 유학 후에 그의 사상을 펼쳐나갈 산문자리를 찾던 중 동리산을 발견하고는 "수많은 봉우리, 맑은 물줄기가 그윽하고 깊으며 길은 멀리 아득하여 세속의 무리들이 오는 경우가 드물어 승려들이 머물기에 고요하다. 용이 깃 들고 독충과 뱀이 없으며,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곳"이라고 했다는 말이 전하고 있다.
이런 태안사 이기에 스치는 바람 한 줌 녹음을 뚫고 쏟아져 내리는 실 날 같은 햇살 한 가닥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능파각에서 일주문까지 오르는 길은 또 얼마나 시원하고 그윽한가? 이 모든 것을 보면서 작은 것 하나에도 소홀히 지나침 없이 사찰을 설계했을 심오했던 적인선사의 안목이 가슴깊이 맺혀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현대의 시대를 이야기할 때 눈부신 과학의 발전을 이야기하곤 하지만 세분화되고 전문화되는 과정에서 상실되어 가는 인간의 감성과 총체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현대인이 되어감을 우리는 또 부인하지 못하는 것이다. 적인혜철의 구상과 행적에서 하나에 치우치지 않는 삶을 살았던 구도자의 삶을 되돌아 볼 수 있다는 것과 어찌 보면 이런 스스로의 자문자답 자체로도 우리에게 주고자했던 한 선승의 삶으로써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보여진다.
다포계집의 화려함이 돋보이는 일주문의 우측에는 태안사를 거쳐갔던 고승들의 부도와 부도비가 가지런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그 중에는 태안사를 크게 중창한 분으로 알려진 광자 윤다의 부도(보물 제274호)와 부도비(보물 제 275호)가 있는데, 그 형태나 느낌이 적인 혜철의 부도를 너무나 쏙 빼어 닮았다.
적인혜철의 부도를 보기 전에는 듬직하면서도 잘 정돈된 비례감이 느껴지는 광자대사의 부도가 어찌나 아름다웠던지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하기도 하였다. 적인혜철의 부도가 있는 태안사가 아니었고, 다른 곳에 있었다면 광자대사의 부도 역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찾았을 것이지만 적인혜철의 부도에 가려 빛을 못 보는 것은 창조적 정신의 바탕아래 수 없이 많은 손길들이 배여 있는 진품과 그것을 모방하여 만든 모조품과의 차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이런 차이도 이분들의 삶과 비교할 때 아주 하잘 것이 없으렴만 문화유적에 투영된 모습으로 보고자하는 내가 너무 죄송할 뿐이다.
이렇듯 닮은꼴의 부도가 한 사찰 내에 있는 예는 이곳 태안사 말고도 다른 곳에서도 발견이 되곤 한다.
가까운 연곡사의 동부도와 북부도, 그리고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 홍척의 응료탑과 수철화상의 능가보월탑, 여주 고달사지의 고달사지부도와 원종대사 혜진탑, 문경봉암사의 지증대사부도와 정진대사의 부도등이 닮은꼴 부도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예가 나타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지지만 그중 가장 내세우는 것은 구산선문 이후의 법통를 중요시하는 전통 때문일 것이다.
태안사는 동리산 영봉이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앉은 끝자락에 한적한 사찰의 모습으로 우리앞에 다가선다.
남향한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측 약간 높은 곳에 적인 혜철의 부도가 모셔져 있고 남쪽 강당 뒤로 푸른색 이끼가 녹색의 물빛으로 상큼한 눈 맛을 주고 있는 연못이 아름다운 곳이다.
동리산문의 중심사찰이면서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머무는 태안사는 사찰의 배치나 놓여진 모습에서 전혀 위엄과 권위가 느껴지지 않는 곳이다.
모든 것을 그저 소박한 눈으로 보게하고 무소유의 가치를 일깨워주는 구조, 이것이 또 하나 적인선사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인 것 같아 그저 엷은 미소만이 눈가에 가득할 뿐이다.
3편에서 계속....
구영이의 기차로 떠나는 문화유적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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