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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e—intro—intercolumn

칼럼소개 특 41 호> "보헤미안의 독서일기"

by e-bluespirit 2001. 8. 8.


숭산 스님 <선의 나침반> 1.2 "추천"









숭산 스님





1. 5월, 다들 그렇게 살고 있을 안타까운 삶들이,

정든 서울 생활, 10년을 접고 서울을 떠나는 날, 나는 오래도록 사당역 5번
출구와 그 주변의 버스 정류소를 오르내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제 내 삶은
다시 어디로 흘러갈것인가. 91년, 기차를 타고 무작정 상경하여 영등포역에
떨어진 이후, 번지를 십여 번이나 옮기며 애타게 지느러미를 흔들며 살아왔
던 서울. 이 공간의 기억, 무엇이 나를 망설이게 하고 자꾸 되돌아 보게 하
는가. 생각해 보니 그것은 서울, 그 골목골목에 서린 한숨 짓거나 서성이거
나 돌아누웠던, 무릎을 꺾으며 뛰어넘어 왔던 그 삶의 기억 때문이었다. 오
월, 초입내내 나는 슬리퍼를 끌고 골목 골목을 산보하며 내가 두고 떠나야
하는 마음과 버리고 가야 하는 마음과 꼭, 기억해야만 할 몇몇 마음들과 아
주 잊어야만 하는 마음들을 생각했다. 그러한 2001년 오월 십 며칠, 방안의
짐들을 모두 꺼내어 광덕산 아래 새로 마련한 집으로옮겨 놓은후 아직 기한
이 남아있는 사당동집으로 돌아왔다. 뜨겁게 온수를 달구고 락스를 풀어 방
안 구석구석 내 한숨이 묻어있는 묵은 먼지들을 닦아내고 방안을치우며 2년
전, 처음 집에 들어섰던 그때처럼 아무것도 없이 깨끗하게 정돈된, 사각의
텅 빈 방 안에 앉아 반 쯤 남은 바론드 메리약을 마셨고 한동안 쓰지 않았
던 일기장을 정리했다. 뜬눈으로 밤을 샌 나는 다음 날 똑똑 문을 두드리는
이방인들에게 열쇠를 넘겨 주었고 행복하시라는 말을 덧붙이고 서울,그곳과,
서울 그곳의 기억으로부터 떠나왔다. 아주 완전히. 정말 그랬을까?

2. <선의 나침반>이라니?

그러한, 불완전하거나 마음잡지 못하거나 흔들리던 오월, 한 달 내내 나는
<선의 나침반> 한 권을 읽어냈다. 처음 책을 사고 4월 달에 한 번 건성으로
읽어낸것이었지만 책 내용을 정리하자고 생각하니 도대체 어디서 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했다. 그리하여 정독하며 다시 읽어 냈던 것인데, 이사와 더
불어 비교적 오래도록 손아귀에서 놓지 않게 되었던것이다. <그런데 선의
나침반이라니?> 선에 무슨 나침반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이 책은 제목부터
독자들에게 역설적으로 오히려 되묻고 있다. 禪은 선 자체로서의 선일 뿐이
며 이 순간이 선이다.그 선에 나침반이 왠말인가. 그리하여 가만히 들여다
보는 것이다. 지은이(숭산스님)은 슬며시 나타나 이 무슨 말이나 될법한 수
상쩍은 화두를 던지는 것인가.

3. 책의 전반적인 이해를 위한 보충 설명

님들께서는 한번쯤 잡지의 가십이나 티비를 통하여 파란눈의 이국 스님 <현
각>의 이름을 들으셨을 것이다.이 독서일기 목록에 있기도 한 <만행 하버드
에서 화계사까지>를 지은 서양인 승려이다. 세상의 온갖 진리를 찾아 수많
은 철학 사상과 종교를 연구하며 방황하던 현각은 하버드 대학교에서 열린
숭산 스님의 강의를 듣고 비로소 자신의 진리를 찾았다는 생각으로 불제자
가 된 특이한 이력의 사람이다. 숭산스님은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홀몸 단
신 미국으로 건너가 세탁공을 하면서 불법을 펼쳤고 지금은 세계 수십개 국
에 한국식 사찰을 짓고 불법을 전하는 분으로 현존하는 3인의 생불로 일
컬어 지는 분이다. 이 숭산 스님이 불교에 대해 전혀 문외한인 서양인들에
게 알기쉽게 불법을 전하기 위해 강의한 불교안내서가 바로 오늘 이 책 <선
의 나침반>이며 현각스님이 강의록을 모아 영어로 펴냈고 한국에서 허문명
씨가 다시 역으로 번역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의아스런 나침반의 의미는
간결해진다. 한국에서 자란 우리들 정서에서 불교는 아주 친밀한 것이지만
수천년 기독교적 세계관이 몸에 벤 서양인들에게 불교는 아주낯선진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가장 알기쉽게 설명하여 펴 낸 안내서(나침반)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때문에 이 책을 여타의 불교 관련 서적들 중에서도 가
장 초보 수준의, 무척 쉽게 설명된 아주 자세한 해설서이다. 거기에 숭산
스님의 자세한해설과 '예문'들이 들어 있으니 평소에 불교 사상이 어렵거나
고리타분하다고 느끼셨던 분들은 공부 차원에서 한번쯤 읽어 보시기에 부담
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기독교나 다른 종교를 가지신 분들에게 적극
권하고 싶다. 한국 기독교 신자님들이나 목회자님들을 볼 때마다 가장 안타
깝게 드는 생각의하나는 그들이 불교에 대하여 거의 알지 못한 채(불교경전
한번 제대로 읽지 않으셨으면서) 맹목적으로 불교를 우상으로 간주하고 비
판한다는 점이다. 적을 알아야 비판도 할 수 있고 복음도 설득력 있게 전할
수 있으실 것이다.

4. 책의 전반적인 내용

1권과 2권을 합하여 목차를 들여다 보면 이 책은 총 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데 1장은 불교의 교리와 목적 분류와 구성같은 한 개의 종교의 기치관과 정
체성을 보여 줄 수 있는 상징적인 내용들이며 2 장인 소승불교의 태동과 중
심사상이, 3장은 대승불교의 태동과 중심 사상이, 4장은 마지막으로 선불교
의 중심사상이 일목 요연하게 정리 설명되고 있다. 그렇다면 좀 더 들어가
보자. 불교면 불교지 이 무슨 해괴한 나눔질인가.

우리들은 살아오면서 불교의 세 나눔, 소승 대승 선불교에관한 이야기를 어
렴풋이 들었을 것이다.하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고 왜, 나뉘어야 하
는지, 수없이 귀동냥을 하며 살았어도 막연한 말들이었다. 책에 의거하면,

처음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후 펴신 설법은 대승불교 사상이었다. 그러
나 그 진리가 너무 막연하여 대중들이 이해하지 못하였고 그리하여 먼저 펼
친것이 소승불교사상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소승 대승 선불교의 나눔은 불
교의 종파적 나눔이 아니라 교리를 체계적으로 학습하기 위한 하나의 단계
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소승은 대 진리인 대승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떠
먹는 스프와 같다.

소승 불교의 핵심 사상은 모든 우주 만물에 영원한 것은 없다. 라는 [무상
관]이며 모든 일체는 더러운 것이다 라는 [부정관]이며,'나'라는 존재는 우
주 공간에서 일시적으로 버릇 습관 감정 인식, 바람 공기, 수분 따위가 만
나져 조합된 유기체이며 사실상 존재하지않는, 무존재하는 [무아관] 사상이
다. 모든 고통은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착각에서 비롯되며 생각을함으
로써 욕망이 생기고 욕망이 생김으로 인해 생노병사의 고통이 따르니 생각
을끊고 생각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면 모든 인과의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다
는 사상이다. 책에서는 이러한 과정을 과학적으로 설명해 놓았는데, 2천 5
백년 전에 이미 오늘날 과학 이론과 한 치의 오차도 보이지 않는 만물의 생
성원리를 석가모니는 먼저 깨닫고 남은 대중을 구하기 위해 설법을 편 것이
다. 이런 깊이있는 대 진리를 가지고 -- 우상이니 귀신이니하는 초등생만도
못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으니 더불어 살고는 있지만 참 가슴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대승불교는 바로 이 소승 불교의 마지막에서 시작된다. 마음을 끊고 열반에
들게 되었을 때, 깨달음에 도달한 사람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열반에 들지
말고 이웃과 중생이 한 사람이라도 구제될 때까지 열반에 들지 않는다는 대
자대비의 가르침인 것이다. 천국에 가기 위해 기도하고 박수치고 신을 이름
을부르며 광란의 몸부림을 치는 것이 아니라, 비록 자신이 천국(열반)에갈
조건이 되었다고 해도, 그 열반의 행복을 떨쳐 버리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
수처럼, 지장 보살처럼, 끝없이 인간 세상에 되태어 나는 달라이라마들처럼,
고통과 괴로움이 가득한 이 인간 세계에 머물며 최후의 한사람의 영혼이 모
두 깨달음을얻고 구원받을 때까지 함께 고통 받고 그들을 위해 일하겠다는
사상이다. 하아, 이 얼마나 눈물나는 아름다움인가.

그렇다면 여러분은 질문하실 것이다.
수만억조의 우주적 시간 가운데 아주 잠깐의 찰나와 같은 6-70년의 인간의
짧은 삶은 기실 순간의 삶에 불과하며 그것은 실상은 존재하지 않는 없는
삶이라는 무상관은 맞는 말이다. 모든 것이 욕망에서 비롯되었음으로 모든
것이 더럽다는 부정관도 맞는 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마음을 끊고
어떻게 대승의삶을 살아야 하는가. 여러분들께서는 혀를 끌끌 차시며 이 못
난 글을 끼적여 올리고 있는 제게, 혹은 책의 저자인 숭산 스님에게, 혹은,
아주 오래된 "사람", 석가모니에게 질문을 던지실 것이다. 소승불교-- 대승
불교-- 의 차례로 이어진 가르침은 그러함으로 마지막 선불교에서 합일을
하는 것이다.선불교는 여러분들의 그와 같은 질문에 답을 던지는 깨달은 자
석가모니의 마지막 가르침인 것이다.

마음을 끊는것은 어렵지 않다. 본래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
면 그것이 곧 무상관을 득한 것이다. 우리 모든 삶의 바둥거림이나 남녀 이
별의 고통이나 그 모든 것이 욕망과 집착에서 비롯됨을 여러분이 안다면 이
미 부정관을 득한 것이다. 그러함으로 영원한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천국이
나 지옥조차 우리 마음이 만들어낸 말장난임을 이해하면 그것이 곧 무아관
을 터득한 것이다. 즉, 이 모든 진리의 마음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
리들이 살고 있는 우리들이 이 삶, 바로 이것이 진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세 개의 깨달음 끝에 출발되는 대자대비의 대승적 삶은 무엇인가. 내가
한 끼를 굶어도 이웃을 위해 한 끼 식사를 내어 놓을 수 있다면 그것이
곧 대승이다. 내 한 몸 사리지 않고 수많은 이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 놓을
수 있다면 그것이 곧 대승이다. 어렵게 휴지나 폐품을 모아 더 어려운 이웃
을위해 돈을 쓰며 땀흘려 일할 때, 바로 그것이 진리이며 대승인것이다. 여
기까지 이 불완전한 말의 끝자락을 좆아 글을 읽어오신, 옳음을 향한, 혹은
갈구하는 마음, 그것이 대승이다. 가마터에서 옹기 굽는 장인은 잘못 구
워진 옹기를 탓하지 않는다. 바람과 불과 흙을 탓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
신의 욕심 탓으로 돌린다. 그것이 대승이고 그것이 선이다.

5. 그러한 오늘, 당신의 발걸음은 어디로 가고 있나

이사 이후에도 나는 버릇처럼 이 동네 골목골목을 산보한다. 토요일, 혹은
일요일, 사람들이 모두 돌아간 하오의 거리를 걷는다. 저녁이면 거리중간에
있는 공원과 약수터까지 어쩔 수 없이 걸어본다. 새벽이면 아주 멀리, 전철
역이 있는 도시 중앙까지 걸어가 본다. 하지만 속절없이 돌아와야 하는, 돌
아온 신새벽, 생각에 잠기다. 당신은 아직 거기, 그 거리를 내닫고 있을까.
내 삶은 지금 어디로닫고 있는가. 모진 결심끝에 이 촌읍까지 찾아들지 않
았던가. 나는 무엇을 위해 발버둥치고 있나. 왜, 무엇 하나 제대로 버리지
못해 뒤돌아보며 뒷걸음치는가.

그러면서 또 가만히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인연 아닌데 만나느라 서로 고생했던 사람들이랑 인연인데, 선천적인 무심
함 때문에 놓쳤을지 모르는 사람들이랑 인연일 수 있었는데, 부끄러워서,서
툴러서, 귀찮아서, 피곤해서, 그냥 그날 기분이 안 좋아서, 나보다 그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너무 일찍 만났거나 너무 늦게 확인했거나 그래서
떠나왔거나, 떠나 보냈거나, 그 자리에서 서성거리면서 짐짓 우리가 무슨
관계였느냐 취했던 제스처들, 그 모든 햇빛 속의 기억들이여.

그리고 또또 생각에 사무치는 것이다.

새벽 안개 속으로 잠들지 못하고 또 걸어 나가야 하는 내 삶은, 이 글을 읽
고 계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익명의 우리들, 쓸쓸하거나 사랑하거나, 짓
쳐 있거나, 힘겨워 하거나, 남은 생이 막막하거나, 할.... 그들의 삶은, 지
금 저기, 저쪽으로, 골목길을 뚜벅뚜벅 걸어나가는 저 두꺼운 발짝 소리의
주인공은, 길 건너 아카시아 숲 사이로 밤이면 슬피 들려오는 접동새는, 사
람이 마냥 두려우면서도 사람 사는 동네를 쉬이 벗어나지 못하는 노인정 뒤
켠, 고양이 일가족의 삶은,

어디서 와서 다시 어디로, 제 삶과 죽음도 알지 못한 채 가련히 떠밀리는지.

2001년 5월 25일 금요일 새벽 02:08 권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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