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 좋아하는 사람.
♧
시장에 고춧잎이나 호박잎이 나오면 살아생전 엄마는 꼭 나를 들먹이셨다고 했다.
"아이구, 우리 둘째가 저걸 잘 먹는데."
--------------------------------------------------------------------------
4남매 중에 내가 식성이 가장 좋은 편이다.
형님은 생선회를 무지 좋아하지만 다른 음식에는 입이 짧은 편이고, 누님이야 여윈 몸이라
먹는 양이 적고, 동생은 막내라 그런지 어려서부터 군것질을 많이 하더니 커서도 일정한 시
간에 식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시도 때도 없이 먹는 타령을 하곤 했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
어갈 듯 밥을 재촉해서 급히 차려주어도 밥상앞에 앉으면 얼마 먹지 않고 숟가락을 놓아 엄
마는 동생을 늘 쓸개빠진 놈이라고 핀잔을 놓으셨다.
나는 동생과는 달리 어려서부터 돈이 생기면 주로 만화책을 보는데 썼지, 군것질을 한 기억
은 별로 없다. 지금도 하루 세끼 일정한 시간에 먹는 밥 외에는 간식은 물론이고 거의 주전
부리를 하지 않는다. 고추나물이나 호박잎쌈같은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이 몇 가지가 있지만
대체로 가리지 않고 잘 먹는 편이다. 다만, 육류나 생선회가 있으면 꼭 술을 찾는 게 흠이라
면 흠이다.
내 이름에 <국>자가 들어가서 그런지 나는 국을 참 좋아한다.
엄마는 사시사철 밥상에 국을 놓으셨다. 된장국이나 시락국, 미역국, 콩나물국, 북어국... 국
을 끓이기 힘든 여름철이라도 오이 냉국, 가지 냉국, 미역 냉국, 하다 못해 급히 사온 콩국
이라도 놓으셨는데, 결혼이라고 해보니 그게 아니었다.
우리 집에서 아내가 거의 끓이지 않는 국이 된장국이다.
신혼 초에 된장국을 끓였는데 맛이 영 내 입맛에 맞지 않았다.
"어때요?"
"............"
"맛없어요?"
"응. 영.... 파이다."(안 좋다)
나는 순간적으로 잔머리(?)를 굴렸다.
맛있다고 하면 또 이렇게 끓여줄 것 같아서 딴에는 솔직하게 말했는데, 그 말이 섭섭했던지
아내는 밥도 안 먹고 물러앉아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아차! 싶어서 달래어 보았지만 그 날 내가 한 말은 오랫동안 아내의 가슴을 아프게 한 모양
이었다.
얼마 후, 동생이 외항선을 타고 외국을 도는 동안 제수(弟嫂)씨가 시집에 들어와서 시집살이
를 하고 있었는데, 엄마가 계신 본가에 다녀오는 길에 혼잣말처럼 한 마디 한 것이 또 아내
가슴을 건드린 꼴이 되었다.
"역시 시엄마 밑에서 살림을 살아야 해. 조금이나 따나."
"왜요?"
"된장을 푼 시락국말이야. 형수님도 잘 끓이고, 이젠 제수씨도 잘 끓이네."
"................"
"그럼 우짜노. 말은 바로 해야지. 맛있는 걸 맛없다고 할 수도 없고."
아내의 얼굴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는 달랜다고 한 말이 또 자기가 끓인 국은 맛없다는 걸
강조한 꼴이 되고 말았다. 하여간 그 날 이후로 아내의 손으로 끓인 된장국이 식탁에 오르
는 날은 드물었다.
♧
세월이 약이란 말처럼, 아내의 된장국도 흐르는 세월 따라 그런대로 먹을만해졌다.
내년 2월이면 결혼한지 만으로 20년, 강산이 두 번 바뀔 시간에 내 입맛이 변한 것이 아니
고, 내가 하는 말이 조금 바뀌었다.
딸애는 미역국이 아니면 별로 먹지 않는데 비해서 국 좋아하는 것은 아들녀석이 나를 닮았
는데, 된장국이 오른 날, 이놈이 겁도 없이 한 마디 했다.
"엄마, 이 국 누가 끓였는데요?"
"왜? 맛있나?"
"예. 엄마 솜씨 안 같애. 외할머니 솜씨 같은데?"
"에라이, 이놈의 자슥이. 그런 말 하다가 엄마한테 다시는 국 얻어먹을라 카나, 말라 카나."
아내가 눈을 흘기며 아들 녀석을 야단칠 때, 나는 한 발 슬쩍 뒤로 물러났다.
"얌마! 엄마 솜씨 걸지 마라. 니도 나중에 결혼하면 엄마 솜씨가 그리울 때가 있을 게다."
"아빠! 그래도 엄마보다는 외할머니가 국 잘 끓이지요?"
"그래, 잘 끓이지. 하지만 아빠 입에는 돌아가신 할머니 국이 제일 맛있더라."
"그럼 나도 나중에 엄마 국이 제일 맛있을랑가?"
"글쎄다. 그건 나도 모르겠다."
"부자지간에 자알 한다. 자꾸 그러면 아예 국물도 없을 줄 아소."
"아들아, 그만하고 이거라도... 줄 때 먹자, 음 먹을만하네."
♧
지난 8월 초순 어느 날 저녁, 아내가 모처럼 시원한 조개국을 끓였는데 밥을 차리기도 전에
아들놈은 국 냄새를 맡고 국을 한 그릇 비웠다.
자식들이 맛있게 음식먹는 모습이 부모 눈에 큰 기쁨이란 말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간만에 아내 손으로 차려주는 푸짐한(?) 저녁 식탁을 마주하고 나는 국을 한
숟갈 뜨면서 한 마디 툭 던졌다.
"나중에 다시 태어나 결혼한다면, 국 잘 끓여줄 수 있는 지 물어보고 결혼해야지."
농담삼아 던진 말인데 나중에 들으니 그 말이 아내 가슴에 비수가 되었다고 했다.
아내는 그 말에 아주 섭섭한 얼굴이 되더니
"그냥 내가 가고 나면... 국 잘 끓여주는 여자 하나 데리고 사시구려."
그리고 나서 다음날 아침부터 아내는 몸이 안 좋다고 이 더운 여름날씨에 약 열흘간 집에
누워 있었다.
나는 국은커녕 밥도 못 얻어먹었다.
----------------(2001. 8. 26)--------------------------------------------
♧
결혼 운운했던 말에 아내가 왜 그렇게 섭섭했느냐하면, 지난해인가? 아내가 다니던 교회에
서의 일이다.
2,000명이 넘는 어른들이 모인 자리에서 목사님이 물어보시더란다.
만약 다음에 다시 태어난대도 지금의 짝이랑 결혼하고 싶은 사람 솔직히('솔직히'라는 말을
몇 번이고 강조했다고 한다.) 손들어보라고 하라는 말에, 자기를 포함해서 단 세 사람이 손
을 들었다고 했다.
그 날 집에 와서는 내게 물었다.
"나는 그런데... 당신은 어쩔건데?"
"쓸데없는 걸 왜 묻노?"
"아니제? 아니제?"
"그렇게 아닌 줄 알면, 머할라꼬 자꾸 묻노?"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 하기사 내가 당신이라도 안 하겠다."
"왜?"
"몰라서 묻남?"
서상국의 글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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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에 고춧잎이나 호박잎이 나오면 살아생전 엄마는 꼭 나를 들먹이셨다고 했다.
"아이구, 우리 둘째가 저걸 잘 먹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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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남매 중에 내가 식성이 가장 좋은 편이다.
형님은 생선회를 무지 좋아하지만 다른 음식에는 입이 짧은 편이고, 누님이야 여윈 몸이라
먹는 양이 적고, 동생은 막내라 그런지 어려서부터 군것질을 많이 하더니 커서도 일정한 시
간에 식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시도 때도 없이 먹는 타령을 하곤 했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
어갈 듯 밥을 재촉해서 급히 차려주어도 밥상앞에 앉으면 얼마 먹지 않고 숟가락을 놓아 엄
마는 동생을 늘 쓸개빠진 놈이라고 핀잔을 놓으셨다.
나는 동생과는 달리 어려서부터 돈이 생기면 주로 만화책을 보는데 썼지, 군것질을 한 기억
은 별로 없다. 지금도 하루 세끼 일정한 시간에 먹는 밥 외에는 간식은 물론이고 거의 주전
부리를 하지 않는다. 고추나물이나 호박잎쌈같은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이 몇 가지가 있지만
대체로 가리지 않고 잘 먹는 편이다. 다만, 육류나 생선회가 있으면 꼭 술을 찾는 게 흠이라
면 흠이다.
내 이름에 <국>자가 들어가서 그런지 나는 국을 참 좋아한다.
엄마는 사시사철 밥상에 국을 놓으셨다. 된장국이나 시락국, 미역국, 콩나물국, 북어국... 국
을 끓이기 힘든 여름철이라도 오이 냉국, 가지 냉국, 미역 냉국, 하다 못해 급히 사온 콩국
이라도 놓으셨는데, 결혼이라고 해보니 그게 아니었다.
우리 집에서 아내가 거의 끓이지 않는 국이 된장국이다.
신혼 초에 된장국을 끓였는데 맛이 영 내 입맛에 맞지 않았다.
"어때요?"
"............"
"맛없어요?"
"응. 영.... 파이다."(안 좋다)
나는 순간적으로 잔머리(?)를 굴렸다.
맛있다고 하면 또 이렇게 끓여줄 것 같아서 딴에는 솔직하게 말했는데, 그 말이 섭섭했던지
아내는 밥도 안 먹고 물러앉아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아차! 싶어서 달래어 보았지만 그 날 내가 한 말은 오랫동안 아내의 가슴을 아프게 한 모양
이었다.
얼마 후, 동생이 외항선을 타고 외국을 도는 동안 제수(弟嫂)씨가 시집에 들어와서 시집살이
를 하고 있었는데, 엄마가 계신 본가에 다녀오는 길에 혼잣말처럼 한 마디 한 것이 또 아내
가슴을 건드린 꼴이 되었다.
"역시 시엄마 밑에서 살림을 살아야 해. 조금이나 따나."
"왜요?"
"된장을 푼 시락국말이야. 형수님도 잘 끓이고, 이젠 제수씨도 잘 끓이네."
"................"
"그럼 우짜노. 말은 바로 해야지. 맛있는 걸 맛없다고 할 수도 없고."
아내의 얼굴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는 달랜다고 한 말이 또 자기가 끓인 국은 맛없다는 걸
강조한 꼴이 되고 말았다. 하여간 그 날 이후로 아내의 손으로 끓인 된장국이 식탁에 오르
는 날은 드물었다.
♧
세월이 약이란 말처럼, 아내의 된장국도 흐르는 세월 따라 그런대로 먹을만해졌다.
내년 2월이면 결혼한지 만으로 20년, 강산이 두 번 바뀔 시간에 내 입맛이 변한 것이 아니
고, 내가 하는 말이 조금 바뀌었다.
딸애는 미역국이 아니면 별로 먹지 않는데 비해서 국 좋아하는 것은 아들녀석이 나를 닮았
는데, 된장국이 오른 날, 이놈이 겁도 없이 한 마디 했다.
"엄마, 이 국 누가 끓였는데요?"
"왜? 맛있나?"
"예. 엄마 솜씨 안 같애. 외할머니 솜씨 같은데?"
"에라이, 이놈의 자슥이. 그런 말 하다가 엄마한테 다시는 국 얻어먹을라 카나, 말라 카나."
아내가 눈을 흘기며 아들 녀석을 야단칠 때, 나는 한 발 슬쩍 뒤로 물러났다.
"얌마! 엄마 솜씨 걸지 마라. 니도 나중에 결혼하면 엄마 솜씨가 그리울 때가 있을 게다."
"아빠! 그래도 엄마보다는 외할머니가 국 잘 끓이지요?"
"그래, 잘 끓이지. 하지만 아빠 입에는 돌아가신 할머니 국이 제일 맛있더라."
"그럼 나도 나중에 엄마 국이 제일 맛있을랑가?"
"글쎄다. 그건 나도 모르겠다."
"부자지간에 자알 한다. 자꾸 그러면 아예 국물도 없을 줄 아소."
"아들아, 그만하고 이거라도... 줄 때 먹자, 음 먹을만하네."
♧
지난 8월 초순 어느 날 저녁, 아내가 모처럼 시원한 조개국을 끓였는데 밥을 차리기도 전에
아들놈은 국 냄새를 맡고 국을 한 그릇 비웠다.
자식들이 맛있게 음식먹는 모습이 부모 눈에 큰 기쁨이란 말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간만에 아내 손으로 차려주는 푸짐한(?) 저녁 식탁을 마주하고 나는 국을 한
숟갈 뜨면서 한 마디 툭 던졌다.
"나중에 다시 태어나 결혼한다면, 국 잘 끓여줄 수 있는 지 물어보고 결혼해야지."
농담삼아 던진 말인데 나중에 들으니 그 말이 아내 가슴에 비수가 되었다고 했다.
아내는 그 말에 아주 섭섭한 얼굴이 되더니
"그냥 내가 가고 나면... 국 잘 끓여주는 여자 하나 데리고 사시구려."
그리고 나서 다음날 아침부터 아내는 몸이 안 좋다고 이 더운 여름날씨에 약 열흘간 집에
누워 있었다.
나는 국은커녕 밥도 못 얻어먹었다.
----------------(2001. 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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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운운했던 말에 아내가 왜 그렇게 섭섭했느냐하면, 지난해인가? 아내가 다니던 교회에
서의 일이다.
2,000명이 넘는 어른들이 모인 자리에서 목사님이 물어보시더란다.
만약 다음에 다시 태어난대도 지금의 짝이랑 결혼하고 싶은 사람 솔직히('솔직히'라는 말을
몇 번이고 강조했다고 한다.) 손들어보라고 하라는 말에, 자기를 포함해서 단 세 사람이 손
을 들었다고 했다.
그 날 집에 와서는 내게 물었다.
"나는 그런데... 당신은 어쩔건데?"
"쓸데없는 걸 왜 묻노?"
"아니제? 아니제?"
"그렇게 아닌 줄 알면, 머할라꼬 자꾸 묻노?"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 하기사 내가 당신이라도 안 하겠다."
"왜?"
"몰라서 묻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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