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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e—intro—intercolumn

칼럼소개 특 79 호> "부끄러운 삶을 돌아보며"

by e-bluespirit 2002. 2. 10.

아침산행

우리 부부는 일요일이면 아이들을 앞세우고 산행을 한다.
산행이라고 하면 주왕산이라든가 황악산,지리산과 같이 제법 높고 이름있는 산을 연상하겠지만,
말이 좋아 근사하게 산행이라고 표현했을 뿐이지
기실은 동네 뒤쪽 금오산 자락의 나지막한 산을 오르는 일이다
.
해발 300미터 남짓 될까 말까 한 이 산 덕분으로 일요일이면 리듬이 깨지기 일쑤였던
우리집이 다시금 질서를 되찾았다.
그전까지 일요일은 늦잠자는 날이었다.
해가 중천에 뜨도록 늘어지게 자고 나서 아침도 아니고 점심도 아닌
어중간한 식사를 하며 게으름을 있는대로 부렸다.

그 게으름이 아침산행 이후로는 부지런함,
즉 건강과 활기로 바뀐 것이다.
너저분한 상가와 미로처럼 뚫려있는 주택가의 골목길을 서둘러 빠져나와 들길에 다다르면 가슴이 확 트인다.
이곳은 말 그대로 열린 공간이요,
자연과 정서에 목말라있는 우리 아이들의 유일한 자연 학습장이기도 하다.
길섶에는 제비꽃,강아지꽃,명아주,자운영이 지천으로 널려있고
물방개와 소금쟁이가 노니는 철길넘어 작은 연못에는 괭이밥과 게아재비가 늘상 부초처럼 떠있다.

그뿐이랴.
봄이면 산자락 아래 과수원에서 피는 복사꽃과 능금꽃의 환상의 가까운 빛깔을 대하며
조물주의 전지전능함에 놀라워 한다.
옅은 풀빛에 섞여있어 더욱 근사한 오얏꽃,
눈이 시리도록 하이얀 배꽃이 배시시 웃고있을 양이면
덕지덕지 때뭍이고 살아온 지난 날들이 부끄러워 산에 오르는 마음또한 가볍지가 않았다.

사실 산에 오른다기보다 집에서부터 산 입구까지 펼쳐진 최소한의 자연 공간을 향유하기 위하여,
또 도회지에서 태어나 심령이 가난한 내 아이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키워주기 위해서
일요일만 되면 산을 핑계삼아 서둘러 집을 나오는 것이다.

계절이 여러번 바뀌니 아이들의 눈도 이제 어지간히 열려서
들판의 모습 만으로도 계절을 감지해 내는것 같다.
토란 이파리의 크기 만으로,옥수수 수염의 빛깔이나 밭두렁의 풋콩이 살쪄가는 모습에서,
가을 바람이 서걱이는 수숫잎 부딫이는 소리로도 곧잘 계절의 숨소리를 감지해 내고도 한다.

소나무보다 굴참나무랑 밤나무가 더 많은 산입구를
우리 아이들은 너도밤나무,나도밤나무 하면서 재잘거리며 오른다.

산사태를 막기 위함인지 아카시아 또한 군락을 이루어서 산내음이 가득하다.
조금 가파른 등산로 인지라 워밍업을 하든 호흡을 조절하며 천천히 걸어도
얼마못가서 흠뻑 땀에 젖는다.
멧새의 지저귐을 들으며 계속 오솔길을 따르오르는 산 중턱에 다다른다.
이곳에는 줄넘기,훌라,아령,널뛰기,그네,매달리기 등을 할수있는
간단한 운동 기구들이 놓여있어서 산에 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한다.
누구의 선행인지 큰 나뭇가지에는 시계도 걸려있고
커다란 바위 밑에는 돗자리가 여러장 깔려 준비해 두고 있어
휴식과 운동에 도움을 주고 있다.

이 작은 마음 씀씀이가 얼마나 훈훈한지
사용후 누구하나 팽개치는 법 없이 항상 제자리에 정연하게 있는것 또한 잔잔환 기쁨을 준다.

훌라와 줄넘기로 가볍게 몸을 조절하고 천천히 산 정상을 향한다.
산마루를 향해 오를수록 온통 정적 뿐이다.
시끄러운 인간 세상에서 멀어질수록 고요하고 넉넉한 원초적인 신선의 뜰이 펼쳐진다.
생각해보면 오늘날의 우리들은 소음속에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곳곳이 자동차의 소음,경적,TV,전화벨 소리,계란장수의 확성기 따위로
밤낮 시끄럽지 않을때가 없다.
그러나 산에는 소음이 없다.
고작 환경 파괴나 일삼고 끝없는 욕망과 탐욕에 눈이 먼 인간 군상에게
오로지 생명의 고귀함과 우주의 질서를 가르쳐줄 뿐이다.

산에는 질서가 분명하다.
이른봄 맨 처음 봄을 알리는 산수유와 산벚꽃이 구름처럼 피어나면
뒤이어 참곷과 철쭉이 봄산을 수줍게 물들인다.

오월이면 아카시아 꽃과 찔레꽃이 은은한 향을 날리며 흐드러지게 피어나며
유월이면 밤꽃 향기가 온 산을 뒤덮는다.
여름 그 성숙의 계절을 거쳐 가을이면 미련없이 입을 떨구는 대자연의 질서 앞에서
그저 나약한 인간의 초라함만 확인할 뿐이다.
표준 체중마저 밑돌 정도로 허약한 아이들에게 다리 힘이라도 키워줄 양으로
가볍게 시작한 아침 산행에서 뜻밖에도 많은것을 한꺼번에 얻었다.
산에 오르기까지의 힘겨움을 통해 삶이 그리 쉽고 순탄치 않음을
가파른 길에서는 따뜻한 가족애를 확인한다.

그 뿐인가,
자연에 무지한 내 아이들에게 정사함양은 물론 포근한 유년의 초억을 심어준듯 하여 흐뭇하기 그지 없다.
이렇듯 몇해동안 작은꿈과 기쁨을 선사했던 아침 산행도 아제는 끝내야 할것같다.
우리의 산행길이 지난해부터 대규모 택시 개발 지구로 지정되어
B건설의 사업 시행 공고 팻말과 공룡같은 포크레인으로 막혀버렸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이곳에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설 것이다.
개발이라는 미명아래 우리는 많은것을 한꺼번에 잃어버리게 되었다.
철길너머 우리 가족만이 비밀스럽게 알고 있는 네잎클로버의 군락지를 잃게 되었고
모내기전 무논의 떠들썩한 개구리 울음이며 산행의 오봇한 즐거움 까지를...

수십년이 흐르도록 흑백 필름처럼 갇혀있는 내 어린날의 기억처럼
내 아이들 또한 아침 산행이 좋은 추억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랫마을에서 목을 꺾고 길게 울어대는 낮닭 소리를, 꽃물든 봄산에 애끓는 두견의 울음 소리를,
그리고 시계풀로 풀꽃반지 만들어 끼던 일이며 패랭이 꽃의 선명한 빛깔까지도
오래오래 가슴에 깃들어 삶의 향기로 되살아 났으면 좋겠다.

1996년

졸작 구미문화 가을 창간호에 기고했던 글이구요
아래 사진은 저와 제 아이들이 아니라 인터넷 싸이트에서 퍼온것입니다
넉넉한 산자락과 티없는 동심들이 자연과 어우러진 모습이 너무 정겨워서 퍼왔습니다



부끄러운 삶을 돌아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