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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e—live—Library

해인으로 가는 길 - 도종환 시집

by e-bluespirit 2010. 5. 10.

 

 

 

 

 

 

 

 

 

「산경」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 했다
산도 똑같이 아무 말을 안 했다
말없이 산 옆에 있는 게 싫지 않았다
산도 내가 있는 걸 싫어하지 않았다
하늘은 하루 종일 티 없이 맑았다
가끔 구름이 떠오고 새 날아왔지만
잠시 머물다 곧 지나가버렸다
내게 온 꽃잎과 바람도 잠시 머물다 갔다
골짜기 물에 호미를 씻는 동안
손에 묻은 흙은 저절로 씻겨내려갔다
앞산 뒷산에 큰 도움은 못 되었지만
하늘 아래 허물없이 하루가 갔다

 

 

 

 

 

하늘 아래 허물없이 하루가 갔다

아픈 몸과 지친 마음을 이끌고 시인은 삼 년 전 아무 말 없이 산으로 올라갔다. 그가 온몸, 온 마음으로 평생 투쟁하듯 사랑했던 세상은 얼핏 쫓기듯 산에 드는 그에게 손을 내밀어주지 않는 듯했다. ‘꽃 지는 사람의 마을’을 떠나 깊은 산중에 집을 짓고 시인은 자신을 “빈 밭처럼 내버려”둔 채 그저 고요히 “정지해 있을”(「산방에서 보내는 편지」) 뿐이었다.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듯 가끔은 스스로가 측은해졌지만 이내 다시 익숙한 고요함이 찾아왔다. 그리고 눈 위에 다시 눈이 내리듯, 바람이 빈 나뭇가지를 어루만지듯 가만 보면 모두 혼자인 것들 사이로 스며들어, 자연이 자신을 위해 내준 텃밭을 일구기 시작했다. 시집의 초입을 지키고 서 있는 시 「산경」은 그저 하루 동안의 일을 말하고 있으나 그 동안 시인이 일구어온 시간의 내부를 정직하게 보여준다. “하늘 아래 허물없이 하루가 갔다”고 쓰기까지 시인의 마음이 내내 머물렀던 오래되고 고즈넉한 풍경을.

 

 

 


고통도 아픔도 내게 오는 건 다 축복이었다

병들었던 시인의 심신은 자연 속에 묻혀 어느덧 천천히 아물어갔다. 오랜 상흔을 지우며 “가지마다 살갗에 화색이 도는”(「산벚나무」) 봄의 나무처럼 시인의 일상에도 새살이 돋았던 것이다. 나무를 하고 장작을 패고 밥을 짓는 일보다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이 시가 쓰였다. 곰삭은 반성과 따뜻하고 평온한 화해의 시간 속에서 개울물처럼 투명해진 마음은 시로써 새록새록 돋아났다. “모순투성이의 날들이 내게 오지 않았다면/내 삶은 심심하였”(「밀물」)을 거라는 삶에 대한 긍정이 찾아들었고, 아무렇지 않게 지나왔으나 내내 보이지 않았던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멀리 서서 보면 길보다/두려움이 먼저 안개처럼 앞을 가리지만/아무리 험한 산도/길을 품지 않은 산은 없다는”(「피반령」) 깨달음의 냄새가 외딴 산방에 은은하게 퍼져나갔다. 「축복」은 그 향기가 피워올린 그야말로 축복 같은 시다.

 

 


이른 봄에 내 곁에 와 피는
봄꽃만 축복이 아니다
내게 오는 건 다 축복이었다
고통도 아픔도 축복이었다
(……)
세상이 내 멱살을 잡고 다리를 걸어
길바닥에 팽개치고 어둔 굴 속에 가둔 것도
영혼의 담금질이었다
(……)
육신에 병이 조금 들었다고 어이 불행이라 말하랴
내게 오는 건 통증조차도 축복이다
죽음도 통곡도 축복으로 바꾸며 오지 않았는가
이 봄 어이 매화꽃만 축복이랴
내게 오는 건 시련도 비명도 다 축복이다


―「축복」중에서

 

 

 


시집의 해설에서 이문재 시인은 “도종환 시인의 삶과 시는 화엄사상과 생태학이 만나는 또 하나의 꼭짓점”이라며 “해인(海印)은 생태학적 삶이 추구하는 단순한 삶, 조화로운 삶, 일관성을 잃지 않는 삶과 다르지 않다”고 설명한다. 허욕과 집착을 비우고 또 비워 고통과 아픔을 삶의 축복으로 치환하는 대긍정의 단계에 이르기까지 시인의 삶과 시는 눈에 띄게 단순해지고 그러면서도 더욱 꼿꼿해졌다. ‘바다가 만상(萬象)을 비추듯’(海印) 시인은 자신의 삶을 내내 되비추며 어느새 다시 세상으로 손 내밀어 한데 어울리고 있었던 것이다.

 

 


언젠가 해인의 고요한 암자 곁을 흘러
화엄의 바다에 드는 날이 있으리라
그날을 생각하며 천천히 천천히 해인으로 간다
―「해인으로 가는 길」중에서

 

 


*시집에 실려 있는 60여 편의 시는 모두 보은 법주리 산방에 머무는 동안 쓴 것들로 2005년 2월부터 올해 1월까지 ‘아름다운 가게’ 홈페이지의 ‘시인의 선물’이라는 칼럼난을 통해 정기적으로 소개되었다. 아름다운 가게는 『해인으로 가는 길』의 출간을 기념해 2006년 4월 21일 ‘시와 노래로 베트남 평화학교 짓기’라는 모임을 갖는다. 이번 시집의 인세는 전액 아름다운 가게에 기부되어 잘못된 길로 들어선 청소년을 위해 쓰인다.

 

 


시로 인해 생긴 이윤이 내 집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


“심신에 병이 들어 쫓기듯 해인을 찾아간다” 하였거니와, 도종환 시인이 산방에 들어 최근 몇 년간에 쓴 시를 읽으며 나는 ‘마음이 멀면 사는 곳이 절로 외지다(心遠地自偏)’는 도연명의 한 구절을 생각했다. 산 속에 들었다고는 하나 세상을 버린 것이 아니기에, 김우창 교수의 말마따나 ‘세간을 버리고 세간에 나는 것이 아니라 세간에 들어서 세간을 나는’ 불도의 입장을 보인 만해 생각도 난다.
이와 함께, 오랜 숲속생활을 통해 몸과 마음이 이미 자연과 하나가 되어 있는 시인의 경지를 나는 확인한다. 차거운 방에 불을 지피려고 장작을 패면서도, 나무 쪼개지는 소리에 어제 심은 강낭콩과 감자, 다람쥐와 고라니가 편치 않을 듯해서 도끼질을 멈춘다는 시인의 마음을 읽으며 나는 무릎을 치고 경탄을 금치 못한다. 정희성(시인)

 


오랜 시간 깊은 침묵 우려낸 그의 절창과 지혜를 단 몇 줄의 시평으로 대신하는 일은 가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뒤처지는 것들을 경멸하고 조소하는 이 광속의 시대에 삼십 년을 연필로만 시를 써온 시인은 지금 세 해째 ‘법주리’ 산중에서 “수련이 열었던 꽃을 닫는 걸음”의 속도(스콧 니어링의 평온한 속도)로 살고 있다. 편지 한두 통 쓰는 데 한나절을 보내고 제자들이 부려놓고 간 식량으로 하루 두 끼를 먹으며 산짐승에게 미안해하는 그의 시편들을 읽으며 나는 내내 ‘심마니’를 떠올렸다. 짝퉁이 판치는 세상에서 진리의 산삼을 캐는 시인 심마니! 기교를 버림으로써 깊이를 얻은 호랑지빠귀 울음으로 그는 海印에 가고 있는 중이다.
“시로 인해 생긴 이윤이 내 집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시인이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우리 모두의 행운이자,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이재무(시인)

 

 

 

 

 

구름은 비를 뿌리며 빠르게 동쪽으로 몰려가고
숲의 나무들은 비에 젖은 머리를 흔들어 털고 있다
처음 이 산에 들어올 땐
나 혼자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내가 흔들릴 때
같이 흔들리며 안타까워하는 나무들을 보며
혼자 있다는 말 하지 않기로 했다
아침저녁으로 맑은 숨결을 길어올려 끼얹어주고
조릿대 참대소리로 마음 정결하게
빗질해주는 이는 누구일까
숲가 나무가 내 폐의 바깥인 걸 알았다
더러운 내 몸과 탄식을 고스란히 받아주는 걸 보며
숲도 날 제 식구처럼 여기는 걸 알았다
나리꽃 보리수 오리나무와 같이 있는 거지
혼자 있는 게 아니다
내가 숲의 뱃속에 있고
숲이 내 정신의 일부가 되어 들어오고
그렇게 함께 숨쉬며 살아 있는 것이다


-「숲의 식구」전문

 

 

 

 

 

 

 

도종환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충남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주성대 문예창작과 겸임교수를 역임하였다. 1998년 해직 십 년 만에 덕산중학교로 복직하여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지금은 학교를 그만두고 보은군 내북면에서 잠시 쉬고 있다.
시집 『고두미마을에서』『접시꽃 당신』『당신은 누구십니까』『부드러운 직선』『슬픔의 뿌리』『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 산문집 『그때 그 도마뱀은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모과』『사람은 누구나 꽃이다』, 교육에세이 『마지막 한 번을 더 용서하는 마음』, 동화 『바다유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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