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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e—intro—intercolumn

칼럼소개 특 55 호>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

by e-bluespirit 2001. 9. 29.






문학 속의 침묵, 침묵 속의 문학



















    
테마논평 -시와 회화, 그리고 여백 (2000 년 8 월호)



문학 속의 침묵, 침묵 속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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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빈

1956년생으로, 한국외국어대학 불어과를 졸업했고, 프랑스 PARIS 제8대학에서 불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외대 외국문학연구소 전임연구원,『문학과의식』 기획위원, 『미네르바』 편집위원으로 활동중이다.


등학교 입시에 떨어졌던 적이 있다. 낙방 결과를 보고 더없이 죄송한 심정으로 집으로 들아갔을 때 아버지는 술상을 받아 놓고 소리 없이 울고 계셨다. 그때 나는 침묵으로 일관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거의 공포감에 가까운 느낌을 받은 기억이 있다. 실향민들에게 자식 교육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없었던 까닭이다. KBS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이 매일 저녁 온 국민들의 심금을 울려대던 시절, 아버지는 유달리 신경질적이셨고, 가족들을 찾아 보자는 어머니의 제의에도 불구하고 프로그램이 시작될 때면 TV를 늘 서둘러 꺼 버리셨다. 다소 감상적이셨던 아버지가 때때로 연출했던 아라비아 춤과 신경질로 어설프게 무장한 아버지의 외로움 사이에 어떤 매개 변수가 존재했었는지 지금은 알 길이 없다. 나의 기억 속에는 아버지가 늘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불러대시던 「황성 옛터」 가락과, "타향살이 몇 년인가 손꼽아 헤어 보니…"로 시작되는 노래의 울림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다. 이산가족들이 구구절절한 사연들로 광장 전체를 슬프게 만들던 바로 여의도 그 장소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나는 고향을 잃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었다. 그렇게 아버지는 자신의 실향(失鄕)에 대해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침묵으로 일관하셨다.



  침묵에 대하여


  묵에 대해 무엇을 이야기할까? 침묵 그 자체로 족하지, 그것을 굳이 설명하려는 노력이 필요할까? 침묵을 묘사하기 위해 언어를 동원하는 사실 자체가 모순되어 보인다. 그러나 침묵에 대해 이야기하는 문인은 적지 않다. 공자는 좬논어』에서 <침묵이란 결코 배반하지 않는 친구다>라고 설파하며, 세네카는 좬티에스트(Thyestes)』에서 <인생의 불행은 침묵의 예술을 가르친다>고 말한다. 혹자는 침묵이 <사물의 영혼>이라 이야기하고, 정신분석의 임상적 차원에서 침묵은 <저항>을 뜻하기도 한다.


   어떤 의미에서 침묵은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이기도 하다. 그 침묵은 인위적인 모든 것을 경계한다. 불안한 리듬으로 점점 커져 가는 공해에 가까운 소음에 피곤해 있는 현대인들은 그런 맥락에서 자연을 찾고 있다. 자연은 아주 유익한 방식으로 침묵을 제공한다. 비가 꽃을 살찌우듯, 침묵은 창조에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가장 심오한 감정과의 접촉을 유지하고 영혼을 갱신하기 위하여서는 관조와 사색의 시간이 필요하고, 그 감정이 우리를 감싸고 있는 세계와 합류하게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침묵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침묵이 죽음, 불행, 공포, 무기력을 상징하기 때문일까. 정신분석에서 침묵은 죽음의 충동에 맞닿아 있다. 비극적 운명을 맞이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침묵으로 일관하는 모습을 통해 그 사실은 확연히 드러난다. 죽음에 가까이 이르면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더럽혀지는 일을 피하고, 자기만의 절대적 순결과 고독 속에서 <근원>을 찾기 위해 전적인 고립을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침묵은 부조리한 세상 질서에 대한 무언의 항거를 뜻한다. 그때의 침묵은 내재화된 외침이며, 진실을 향한 포고이다.


그렇다. 박노해의 시처럼, 〔진실은 가슴에서 가슴으로/ 침 뺨 속에 익어가고 침묵 속에 터트리는 날/ 푸른 사람들, 소리치며 일어설 것이다/ 침묵이 말을 한다/ 침묵이 소리친다.〕 어떤 의미에서 진실은 침묵 속에서 더욱 발견하기 쉬울지도, 아니 침묵 속에서만 발견되는지도 모른다. 진실은 표출됨으로써 그 진실 자체가 희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을 빌자면, 결국 [도(道)라 하지만, 말로 할 수 있는 도는 절대의 도가 아니다(道可道 非常道).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말로 할 수 있는 것은 진실이라 할 수 없다.] 노자의 이 글은 오로지 죽음만이 확실하며, 그밖의 모든 것이 불확실하기 때문에 침묵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으며, 금언(禁言)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생각을 담고 있다. 노자는 또 이야기한다. <아는 자는 말하지 않는다.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라고. 그러니 대부분의 언어는 소리에 그치며,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언어의 기능이 근본적으로 불신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진실에의 귀기울임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내면을 향하게 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김명인은 침묵을 〔그 사람의 우연에 대해서 생각하지만/ 말할 수 없는 것, 침묵은 필경 그런 것이다/ 나는 창 하나의 넓이만큼만 저 캄캄함을 본다/ 그 속에서도 바람은/ 안에서 불고 밖에서도 분다/ 분간이 안 될 정도로 길은 이미 지워졌지만/ 누구나 제 안에서 들끓는 길의 침묵을/ 울면서 들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제 안에서 들끓는 길의 침묵>이라는 표현은 침묵이 우리 모두가 벗어날 수 없는, 우리 안의 공간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 지독한 침묵을 우리는 체념하며 받아들일 뿐이다. 좬이방인』에서 주인공 뫼르소는 죽음 직전에 처음 느낀 세상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세상의 함성과 대비시키고 있다. 그 침묵은 세상의 질서를 거부한 뫼르소의 고독에서 비롯되지만,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연의 질서에 대한 순응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괴로움을 씻어 주고 희망을 가시게 해 준 것처럼, 표적들과 별들이 드리운 밤을 앞에 보며,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다정스러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그처럼 세계가 나와 다름없고 형제 같음을 느끼며, 나는 전에도 행복하였고, 지금도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내가 외롭지 않다는 것을 느끼기 위하여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증오의 함성으로써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다.

   -까뮈, 이방인』

  
   하지만 침묵은 때로 경이와 아름다움을 표상하며, 꿈과 희망을 불러일으킨다. 침묵은 내면의 평화로 침잠하게 하며, 앨범을 들여다보듯이 가장 아름다웠던 삶의 순간들을 반추하게 한다. 연인들 사이의 사랑은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침묵은 사랑스러운 교응(交應)을 위한 준비 단계이며, 그런 차원에서 사랑과 밀접한 공모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침묵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무엇보다도 종교적 색채를 배제할 수 없다. <한 마디도 대답지 아니 하시니 총독이 심히 기이히 여기더라>(마태복음 27장 14절). 수난을 당한 그리스도의 침묵은, 인간의 혀가 악의 뿌리와도 같고 혀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소리의 세계가 우리 정신의 지성적 자양분을 포함하고 있다면, 침묵의 세계는 초(超)의식의 신비와 이해 불가능한 것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언어로 구축된 담론은 이미 익숙한 것 전부를 관습적이고도 미학적인 형태를 통하여 포착해 내지만, 미지의 것에 대해서는 느끼게만 해 줄 뿐이다. 언어의 전통적 기능이 부정당함은, 사회에 대해 외치던 문학의 기능이 이제 필경(筆耕)의 기능으로 변경되면서(플로베르, 좬부바르와 페퀴셰』) 문학이 언어의 유희를 뛰어넘어 종교적 세계와 합류함을 뜻한다. 그때의 문학은 무엇인가에 대해 말하되,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는 기능을 수행한다. 예컨대 불교관에서 보자면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의 세계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염화시중의 미소는 언어의 기능이 더 이상 요구되지 않는 무아(無我)의 경지이자, 동시에 모든 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 충만(充滿) 그 자체이다. 동양적 정서가 흐르는 문학에서 침묵은 도의 개념과 합류한다. 〔도를 닦아 이루면/ 공허의 극치에 이르리/ 고요한 속에/ 천지만물과 나란히/ 우주의 근원으로 돌아가 하나가 된다〕(예이츠, 「공허와 침묵」). 침묵은 공허를 의미하지만, 도를 통하여 우주와 합치한다. 침묵은 우주를 창조한 천지만물과 만나며,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는 침묵 이전의 세계와 만난다. 그때 언어는 언어의 부재이며, 말씀은 곧 침묵이다. 그렇게 때문에 정복과 지배욕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 침묵을 견지함은 언어라는 힘의 논리로 구축된 인간의 세계가 얼마나 허약하고 허망한 것인지를 아주 자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침묵은 문학 속에서 무상적(無償的) 행위를 통하여 세계를 지탱하고 있는 법, 경제, 제도 등의 외피(外皮)를 벗기고 있는 것이다.



   언어와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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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묵은 모든 언어의 부재이다. 침묵은 모든 언어가 시작되는 0도이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럙i-Strauss)의 표현을 빌자면, <순수한 자연>이며, 그렇기 때문에 <접근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 대척점에 있는 문화는 침묵과의 결정적인 단절을 뜻한다. 문화의 한 하위개념이 문학이라면, 문학은 그래서 침묵과 화해할 수 없는 듯이 보인다. 문학이 언어를 기반으로 하고 있고, 언어의 주요 기능 중의 하나가 <의사소통>이라고 할 때, 언어의 기능을 박탈당한 침묵은 문학의 영역에 속한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러나 언어의 의사소통 기능이 거부당할 때, 언어의 사회학적 의미를 어떻게 해독해 낼까?


   사회 내에서 기능을 거부당한 언어가 문화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또 그렇다면 침묵은 비문화적인가? 이런 관점에서 문학과 침묵 사이의 영역 구분은 그다지 명확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문학 속에 침묵이 있고, 침묵 속에 문학이 있다는 표현이 옳다. 그러나 그 둘 사이의 관계 역시, 시대에 따라 문학의 외양과 역할이 달라지듯 시간에 의해 규정되는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역사적 경험을 통해 관찰한 바로는 언어는 침묵으로 향하고 있다. <문학은 어디로 가는가? 스스로의 소멸을 향해서>이다(블랑쇼, 좬미래의 책』). 블랑쇼에게 있어 문학의 공간이란 곧 죽음의 공간이다. 그에게 있어 작가란 <아무것>도 할말이 없으면서도 <바로 그 아무것도 아닌 것>을 말해야 하는 자이다. 시대의 이성이 부정당하는 우리 시대에, 로고스의 질서 속에 편입된 작품으로서의 문학은 자발적으로 침묵으로 향한다. 이 생각은 작품의 부재(不在)로서의 광기에 대해 설파하는 푸코의 생각에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더 나아가 사드(Sade)의 글이나 고야(Goya)의 그림에는 그들의 광기, 우울증, 망상 등이 모두 표현되어 있지만 그것이 작품의 형태를 띨 때 광기는 더 이상 광기가 아니다.


〔니체의 절규는 이성과 비이성의 경계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작품의 소멸이며, 거기서부터 작품은 불가능해지고 침묵을 지켜야 한다〕(푸코, 좬광기의 역사』). 그는 <광기에 대한 이성의 독백인 정신분석의 언어를 쓰고 싶지 않고, 차라리 그 침묵의 고고학을 쓰고 싶다>고 말한다. 이때 사용되는 언어는 질서의 언어, 이성의 언어가 아니라 <의지할 데 없고 받침대 없는 언어>이자, <언어 없는 말들(des mots sans langage)>이다. <침묵 그 자체가 역사를 갖고 있는가>, <아무리 침묵에 관한 것이라 해도 고고학은 벌써 논리학이 아닌가> 하는 차원에서 푸코가 데리다에 의해 비록 공격받고 있기는 하지만, 조작된 언어, 즉 이성이 구축한 질서의 개념과 연계된 하나의 <작품>의 부재가 곧 광기이자 침묵이라는 사실은 푸코에 의해 설득력 있게 주장되고 있다. 침묵은 질서와 이성을 거부하고, 언어의 기능을 배척한다. 적어도 이 세상의 질서가 힘의 질서, 현실 원칙에 기초해 있는 한 침묵은 끊임없이 이성의 이름으로 구축된 세계를 깨뜨리는 혁명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언어의 문제로 환원시켜 보자. 어떤 의미에서는 언어와 침묵의 대립은 〔한편으로는 세상의 문제에 대한 참여를 상상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녕 무상적인, 비참여적인, 순수한 즐거움의 활동을 상상〕(롤랑 바르트·모리스 나도, 좬문학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하는 문학의 이중적 기능과도 연결된다. 문학은 세상에 대해 필연코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숙명을 안고 있지만, 동시에 그 기능은 유희 자체가 내포하는 무상성으로 인해 내면적인 모습을 취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문학은 자신의 고유한 기능을 통해 세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따라서 언어를 전제로 하는 문학과, 언어의 기능을 내적으로 수행하는 침묵과의 관계는 마치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상호보족적이다. 또 문화를 구성하는 가장 중심 단어 중의 하나가 <기억>이다. 다시 말해, 문화는 기억의 기록을 통해 전승되며, 반면 침묵은 문화의 단절을 의미한다. 그러나 문화라는 것이 선택적 기억에 의해 구축된 또 하나의 허구는 아닐까?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가짜다>라고 트리스탕 짜라(Tristan Tzara)는 이야기한다(1918년 다다 선언문). <기억의 폐기(l’abolition de la m럐oire)>를 외치는 그의 주장은 옳다. 예를 들어 집합적 기억이란 한 집단이 스스로의 결속력을 다지고,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가상으로 만들어 낸 허구에 불과하다. 어떤 의미에서 집합적 기억은 개별적 기억을 억압하고 인정하지 않는다. 글을 통한 역사와 문화의 구축이 필연적으로 이데올로기와 연계되고 있을 때, 문학쪽의 침묵은 전적으로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다. 하지만 <상황 속에서 침묵하기>는 비록 그 무엇을 말하고 언어로 표현하더라도 정확한 진실이 될 수 없다는 생각에서 시작되지만, 동시에 내면의 근원으로 접근해 들어간 사람들에게 그 태도는 냉정하고 오만하기 그지없다. 이는 언어의 기능이 문학의 속성 그 자체처럼 순기능과 역기능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처럼, 침묵 역시 상황에 대한 항거의 절대적 표현이자, 상황에 대한 타협과 은폐를 동시에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상에 대해 표현하되, 어떻게 표현해 내는가가 문제시된다.



   이상의 사고들은 방법론적 측면에서 모든 문제를 언어의 문제로 환원시키면서 언어의 투명함을 지향했던 상징주의는 침묵과 자연스럽게 만나게 된다. 그들에게 있어 언어로 표상되는 이미지와 언어의 울림은 그 역할을 공유하고 있으며, 기존의 언어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뒤엎고 있다. 상징주의자들의 논리를 따르면, 지시적 기능에만 머물러 있는 언어 체계는 그것에 담겨지는 본질이나 관념의 세계를 올바르게 드러낼 수 없다. 말의 사원(寺院) 속에서, 침묵은 말없음이 아니라 말의 기능을 뛰어넘는다. 상징주의적 모험을 통하여 우리는 랭보(Rimbaud)의 견자(見者)가 된다. 바라봄은 곧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바람과 노닐고 구름과 더불어 이야기하고>(보들레르, 「축복(B럑럅iction)」), <인생을 굽어보며, 노력 없이도/ 말없는 꽃과 사물들의 언어를 이해하는>(보들레르, 「상승(El럙ation)」) 시인이 된다. 그렇게 쉬고 있을 때나 행동하고 있을 때 침묵과의 접촉은 항상 가능하며, 언어의 숲을 통하여 시인은 자연의 비밀을 해독하는 연금술사가 된다.


   결국 문학은, 언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 세계에 대해 언어로써 저항하는 방식이다. 언어가 무(無)와 합류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애썼다는 점에서 상징주의자들의 시도는 지극히 흥미롭다.



   침묵 속의 문학


  늘날 문학의 제 기능은 불신당하고 있다. 시대의 진실은 20세기의 모든 문학적 담론들을 경직시켜 버렸다. 침묵에 자발적으로 협력하는 문학의 경우 자신의 사변적 기능을 거세하면서 진지함과 엄숙주의로 가장할 수 있다. 어두운 시대와 외로이 맞선 문학은 모든 우화적 형태의 글쓰기를 비웃거나, 전혀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 소설은 허구가 아닌가? 문학은 곧 이야기의 모험이 아니던가? 침묵이 문학의 허구적 기능을 비웃고 있는 반면, 이야기를 이루는 재담은 나름대로 침묵의 현학적 기능을 또 부인하고 있지 않은가? 시대에 대한 성찰이 문학으로 하여금 허구적 요소를 제거하게끔 요구하고 있으며, 따라서 진실을 전제로 하는 기록문학, 체험담, 회상록, 자서전 등을 더욱 무성하게 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서구를 지탱해 왔던 제 가치에 대한 부정은 19세기를 지배해 왔던 문학적 기능들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는 인식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진실주의>와 <그럴듯함>은 문학이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이라는 지난 시대의 순진한 생각으로는 적절했지만, 문학적 성격의 글을 허구로 간주하면서, 자신이 글쓴 것이 <참>이라고 주창하는 작가의 말을 전적으로 믿지 않는 현대의 독자들, 다시 말해 역사와 문학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이 시대를 영위하는 독자들은 문학이 하나의 거짓 이야기에 또 다른 거짓 이야기를 보태는 기능을 수행하는 데 만족하고 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미학은 허구를 통해 현실을 승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역사에 의해 간섭받기 시작한 문학의 이름으로 더 무엇을 이야기할까? 사회를 변모시키고자 하던 문학적 열정은 그 변혁의 능력을 상실한 채 지난 시대의 영화를 그리워하고 있다.

  
   예컨대 전체주의의 망령 앞에 문학이 무기력해하는 모습은 이제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어 보인다. 갖가지 형태적 실험을 거듭하며 지난 세기를 정리하려는 영화쪽의 적극적 의지에 비해, 문학쪽의 접근은 상대적으로 빈약하고 초라해 보인다. 문학은 적어도 20세기의 가공할 극한적 현실 앞에서 설명할 능력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문학은 지식의 마테시스, 질서, 체계, 구조적인 장이다. 그러나 그 장은 무한하지 않다. 문학은 한편으로 당대의 지식을 넘어설 수 없고, 다른 한편 문학은 전부를 말할 수 없다. 언어 활동으로서 그리고 <유한한> 일반성으로서, 그것은 아연실색할 정도로 깜짝 놀라게 하는 여러 가지 대상이나 스펙터클이나 사건들에 대한 설명 능력을 잃어버리고 만다.

  
-롤랑바르트, 롤랑바르트가 쓴 롤랑바르트』
  
   브레히트에 대한 롤랑바르트의 인정과 같이, 아우슈비츠, 바르샤바 게토, 부헨발트의 사건들은 문학적 성격의 기술을 참아 내지 못할 것이 틀림없다. 문학은 그러한 일에 대비하지 않았으며 설명해 낼 방법을 부여받지 못했다. 죽음의 미학이 강조되는 우리 시대에 문학은 겸손하기를 강요당하며, 현실의 드러냄에 가장 적확한 방법론을 찾아내기 위해 절치부심하고 있다. 문학은 전대미문의 현실 앞에서 그 자생 능력을 시험당하고 있는 중이며, 형태적 변모를 강요당하고 있다. 하지만 문학이 그려내지 못한 현실이 있었던가? 그렇다면 이제 <문학으로써 무엇을 이야기할까?>라는 질문은 <문학의 이름으로 어떻게 이야기할까?>라는 질문으로 대치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진실의 드러냄이라는 본래적 기능에는 당연히 의혹의 시선이 쏠릴 것이 분명하다. 문학의 이름으로 시대를 증거하라고? 문학의 이름으로 대량 학살에 대해 이야기하라고? 란쯔만이 자신의 영화 「쇼아(Shoah)」에 대해 피력하고 있는 생각은 문학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쉰들러 리스트」가 개봉되었을 때, 나는 스필버그가 「쇼아」에 대해서도, 영화라는 장르에 대해서도, 이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충분히 숙고해 보지 않았다고 비난한 바 있습니다. 그는 허구로 하여금, 스스로에게 문제를 총체적으로 제기해 보게끔 현실을 극화시켰습니다. 나는 가스실 내에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한꺼번에 3,000명씩 죽어 가는 장면을 영화를 통해 어떻게 그려 낼 수 있을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여러 다른 가능성들이 존재하겠지요.



그러나 무엇이 진정한 의미의 증인이고, 증언일까? 프리모 레비(Primo Levi)의 표현대로,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대부분의 경우 이야기하는 자는 가짜 증인이거나, 거짓 증거하고 있다. 극도의 불행은 말의 기능을 축소시킨다. 언어의 기본적 기능 중 하나가 의사소통 기능이라면, 시대의 야만은 언어에게서 그 기능을 박탈해 버리며 침묵케 하고 있는 것이다. 타인들이 겪은 극도의 불행 앞에서 요구되는 정신적 수줍음은 유태인 학살을 한결같이 증언해 온 엘리 위젤(Elie Wiesel)의 노력조차 추문으로 만들어 버린다. 위젤에게 1986년 노벨 평화상이 수여된 사실은 학살수용소의 야만성을 전 세계에 알리려는 위젤의 한결같음에 대한 경외감의 표시였지만, 그가 <겪은 자만이 알 수 있다>는 주장 아래 끊임없이 주장해 온 유태인 학살의 유일무이성에 대한 존경은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진정한 <증인>들이 견지하고 있는 침묵은 웅변 이상으로 많은 말을 하고 있다. 어쩌면 인간의 본성은 레비의 표현대로, <회색지대(zone grise)>일지도 모른다. 타인은 지옥이며, 그런 연유로 언어 또한 지옥이다. 지나친 불행은 실어증(失語症)에 빠지게 만들고, 인간의 언어에 대해 극도로 불신케 하고 있다.


자신의 언어에 대한 불신의 골이 너무 깊을 경우, 다시 말해 경험의 정도에 비해 언어가 너무도 무기력하다고 느낄 때, 일부 작가들은 이미 구사하던 언어를 포기하고 후에 습득한 언어를 통하여 자신의 체험을 피력해 내기도 한다.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비트겐슈타인). 우리는 진실을 말하기 위해 항상 노력하지만, 말로 표현되는 것은 언제나 진실을 전달하려는 우리의 의지일 따름이다. 진실은 언어로 표현될 수도 없고 전달될 수도 없다는 극단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진실과도 같은 것을 전달한 적이 없으면서도, 진실을 전달하려는 시도를 평생 동안 중단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말해야 한다. 우리는 진실을 말하고자 하지만, 우리는 말하지 않는다.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하실』
  
   <명명 불가능>이라는 표현이 시대를 풍미하고 있다. 문학으로서는 접근 불가능한 영역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말이며, 문학은 그 한계를 확연히 안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시대의 절망 앞에서 문학과 예술에 요구되는 겸손함과 침묵은, 예술을 통해서만이, 예술에 내재한 침묵을 통해서만이 구원이 가능하다는 역설로 바뀐다. 하지만 예술은 고통 앞에서 무의미한 존재이며, 어떤 그림도 피비린내 나는 현실 앞에서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불행한 사실을 우리가 쉽게 인정해야 할 것인가?


예컨대 <배고파 죽어 가는 아이 앞에서 문학이 어떤 소용이 있는가>라는 사르트르의 단언은 격동의 유럽사(프랑스 대혁명에서 러시아 대혁명에 이르기까지)를 체험한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샀지만, 고야 같은 화가는 살육당한 스페인의 현실을 예술이라는 수단을 빌어 증거하고 있다. 문학과 예술은 침묵을 통하여 인간을 제어하고 있는 조건들을 성찰케 한다. 목 잘린 장면, 강간당하는 장면, 아이들의 시체 등 그는 예술이 감내할 수 있는 한계에 도전하며 현실과 위태로운 내기를 벌이고 있다. 고야에게 있어 예술은 묘사 불가능한 현실에 빈 자리를 내어주는 무기력한 수단이 아니라, <명명 불가능한 것>에 맞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정당화시키고, 극한적 현실을 <명명>하며, 현실을 초극하는 행위이다.


이 경우 예술은 웅변을 뛰어넘는다. 하지만 「변덕」, 「부조화(Disparates)」 시리즈들을 주도 면밀히 살펴보면 고야가 이성을 통해 현실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이성적인 착란을 통해 현실 혹은 상상의 산물들이 정신세계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며, 우리로 하여금 신과 인간과 동물들이 뒤엉켜 있는 무의식의 영역으로 인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의 모습이 사라지기 시작한 그 세계는 이성에 바탕을 둔 우리의 보편적 인식을 흔들어 놓고 있다. 루벤스의 그림에서는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아버지를 폐위시키고 자식들을 잡아먹는 신화에 충실한 로마의 신 사투르누스가 등장한다면, 고야의 「사투르누스」의 입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인육은 여체이다. 그 여체는 남자들의 성적(性的) 대상으로서의 여체이지만, 신이 인간을, 인간이 인간을 먹는 환상 속의 현실이다. 인간들과 인간의 언어가 부재하기 시작한 세상에서 갖가지 악마들이 그 마성(魔性)을 드러내고 있으며, 인간의 두상은 동물 모습을 하고 있다. 「커다란 염소」는 마녀 집회의 한가운데 위치해, 마녀들을 설법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인간의 부재를 통하여 인간을 현존시킨다는 점에서 고야의 그림들은 극히 동시대적이다.


그가 드러내는 세계는, 양차 세계대전 이후 <이미 행복한 시대는 가 버렸다>라는 서구인들의 절망과 맥을 같이 한다. 그 불안감은 이성과 합리가 지배하던 세계, 질서와 명증성으로 충만하던 데카르트적 세계관이 근본적으로 와해되고 있음을 뜻한다. 그 가운데 위치한 인간들은 극도의 불안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실존적 존재들이다. 인간은 불가해한 존재이며, 그 인간들로 구성된 세계는 고야의 그림이 드러내듯 선악에 대한 마니교적 구분이 통용되지 않는 불가지(不可知)의 세계이다. 현대의 문학과 예술이 그려 내는 인간들의 제 양상은 광기와 이성 사이, 빛과 어둠 사이를 배회하는 존재들이다. 명계(冥界)로부터 들려오는 소리, 그 침묵의 소리를 예술은 포착한다. 문학은 침묵을 빌려 시대를 증언한다.


   현실에서 가상으로


 시대는 급속도로 변하고 있다. 맥루한의 주장대로 구텐베르크 시대의 쇠퇴와 마르코니 시대의 대두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종국적으로 문자 매체는 사라지고, 영상 매체가 판을 치는 세상으로 변하게 될까? 마르코니 시대에 대한 그의 메시아적 비전은 아직 전혀 검증된 바 없지만, 적어도 우리에게 익숙한 기존의 일상 문화를 위협하고 있는 것은 자명해 보인다. 그리고 결국 인식과 판단의 전통적 형태인 문학이 도태될까? 일례로 프랑스 문화의 변화 양상을 지켜봐도 문학의 퇴행 모습은 뚜렷해 보인다. 연극에서 전통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던 희곡은 상대적으로 그 비중이 퇴색되고, 빛과 소리를 아우르는 종합예술로 화하게 된다. 이미지와 언어를 동시에 보여 주는 만화는 세대간의 격차에도 불구하고 만인이 애호하는 장르로 자리잡게 되었으며, 점증하는 TV의 역할과 더불어 작가들 역시 외모, 목소리, 글재주를 동시에 겸비한 스타를 꿈꾸고 있다. 작가들 역시 보여 주기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익명의 사이버 공간은 이미지를 무차별적으로 제공하고 있다. 시청자와 네티즌들은 이미지의 홍수에 순응적으로 반응할 뿐이다. 이미지는 그 대상으로 하여금 침묵을 강요한다. 언어가 무기력해진 시대에 현대인들은 수동성을 강요당하고 있으며, 사상과 행동을 위한 무기로서의 언어의 기능은 극도로 위축되고 있다. 자본주의적 소비 욕구로 헛헛증을 이루는 현대의 소비자들 앞에서 이데올로기를 실어 나르는 가장 유효한 매체로서의 언어는 구시대의 유물로만 비추어질 뿐이다. 이 경우 침묵은 말의 부재이며, 결핍이다. 물화(物化)된 세계에서 인간은 말을 상실하고 있다. 현란한 시각적 즐김이 느림의 미학, 관조의 미학을 대치하고 있으며, 그런 만큼 더욱 인간들은 소외되고 있다. 한 조사는 아주 흥미로운 결과를 보여 주고 있는데, 컴퓨터 매개 집단이 면대면 집단보다 정해진 시간 내의 언어교환이 더 적었다는 사실이다(황상민·한규석, 좬사이버공간의 심리』). 이미지는 말의 횟수까지 줄이고 있는 것이다. 시각은 더 느끼게 만들며, 더 감각에 직접적으로 호소하고 있다. 사유하는 도구로서의 말의 존재는 이미지의 파시즘 앞에 질식당하고 있다. 이 경우 이미지는 권력이며, 인간의 정신을 통제하는 가공스러운 무기가 된다. 하지만 이미지의 성실성을 대변한다는 다큐멘터리의 위험은 이미 1930년대에, 파시즘이 기승을 부리던 바로 그 시절 이미 입증되지 않았는가?


그런 연유로 시대의 물신화를 고발하는 문학의 역할은 더욱 강조되어야 한다. 사회 속의 문학의 의미가 달라진 만큼 문학은 시대의 단순한 기록을 뛰어넘어 지속적인 변화를 통하여 상황에 적응해야 하지 않을까? 문학은 이미 인터랙티브 문학이란 이름으로 상호성을 강조하며 긍정적으로는 작가와 독자의 경계를 소멸시키고 있지만, 장기적으로 새로운 형태의 문학이 이미지의 범람으로부터 비롯되는 침묵을 어떻게 극복할지는 그 자신에게 부과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도 <의사소통>이라는 언어의 일차적 기능을 회복시켜야 하고, 그 교류의 활성화를 통해 문학은 현재를 각성케 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되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이야기되지 않는다. 아니, 중요한 것은 문학의 이름으로 이야기되어야 한다. 문학은 언어와 침묵이 공존하는 인생으로부터의 유배를 의미한다. 엄밀히 말해, 문학의 이름으로 끊임없이 언어와 침묵 사이를 선택해 나간다는 것은 문학을 통하여 부단한 실험을 계속하는 행위와 시대 앞에서의 추스름을 함께 의미하고 있다. 문학의 형태를 늘 새롭게 하는 행위는 어떤 억압으로부터도 늘 자유롭고자 하는 문학의 본질로 귀결된다. 환언하자면 언어와 침묵을 되풀이함은, 〔문학의 역사와 전통이 그렇게 오래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삶의 조건은 그렇게 개선되지 못했다는 <현실> 인식에서 비롯되고 있다](김치수, 「누보 로망의 논리」). 이미 강박적으로 변해 버린 기억, 그 기억이 산출해 내는 문화, 문화와 언어, 언어와 침묵 사이의 관계가 우리 시대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더불어 근본부터 재조명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